153화.
내내 리엘리의 어깨 위에 자리하고 있던 율렌이 슬쩍 몸을 일으키며 냉정하게 황제를 훑어내렸다.
폴짝, 가볍게 리엘리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율렌은 곧장 인간의 모습으로 변함과 동시에 성큼성큼 황제에게로 발을 뗐다.
“율렌, 왜 그래?”
뒤에서 리엘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지만 율렌은 한쪽 손을 들어 가볍게 내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율렌이 제 코앞까지 당당히 걸어와 자리했음에도 여전히 손을 벌벌 떨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율렌은 그런 황제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르반은 자신을 쳐다보는 율렌을 지나쳐 황제의 앞에 서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얗고 커다란 손이 황제의 검은 머리카락을 우악스레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황제와 아르반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 교차했다.
그 순간, 아르반은 망설임 없이 황제의 복부에 성검을 쑤셔 넣었다.
“크윽…!”
황제는 일순 신음을 내뱉으며 금술을 사용해 아르반을 제게서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금술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어, 째서…!?’
황제는 낯선 당혹감에 머릿속이 하얗게 세어버렸다.
내장이 찢기는 고통보다 금술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르반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황제의 푸른 눈동자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금술을 사용하지 않는 걸까.
성검이 금술을 파훼하는 역할을 한다지만 비단 그 이유 때문이라기에는 조금 전 황제의 몸에 검을 박아 넣기 전에도 이상한 기색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곧 율렌이 그런 아르반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영혼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는군.”
아르반과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온 율렌이 속삭였다.
“네까짓 게 그 힘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오만이다, 어리석은 인간아.”
하지 말라는 건 제발 좀 하지 말라고 부모가 가르치지 않든?
율렌은 곧 입가에 걸고 있던 조소를 지워냈다.
그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 바로 황제와 같은 자들이었다.
하지 말라는 것에 굳이 손을 대는, 몰염치하고 제 욕심만 아는 버러지만도 못한 지능을 가진 부류.
황제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여전히 제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아르반을 뿌리치려 했다.
“쿨럭…!”
그러나 아직까지 검이 황제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고스란히 황제 자신에게 돌아왔다.
아르반은 그런 황제를 내려다보다가 단번에 검을 뽑아냈다.
“……!”
황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제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압력으로 멈출만한 출혈량이 아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황제를 냉정한 얼굴로 내려다본 아르반은 율렌에게 들었던 설명을 상기해냈다.
한 명의 인간이 금술을 무리하게 운용하면 그 영혼에 어떤 일이 발생하고, 그 과정이 어떠한지를.
율렌이 황제의 영혼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말했으니 얼마 뒤면 저렇게 움직일 수도 없을 터였다.
‘곧 시작될 테지.’
그렇게 된다면 고작 배에 뚫린 구멍 하나쯤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우리라.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황제는 율렌이 속삭인 진실을 외면한 채 제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금술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럼 어찌해야 하지?
눈앞이 까마득했다.
금술에 손을 댄 이후 그전에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그 매혹적이고 절대적인 힘에 매료되었다.
늘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힘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 부재는 황제에게 있어 더욱더 크게 다가왔다.
잘게 떨리는 황제의 눈동자가 율렌과 아르반을 지나 그 뒤에 자리한 이들에게로 향했다.
황제와도 안면이 있는 고위 마법사와 신관, 성기사들 가운데서도 단연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 사람.
‘다이에나 대신관.’
설마 그녀가 직접 행차했을 줄이야.
황제는 리엘리와 함께 들어선 그녀를 향해 외쳤다.
“대신… 관, 무슨 말을 듣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가 있는 듯하군. 대화가 필요할 듯하니, 치료를….”
“…오해라고 하셨습니까. 이걸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시는지요.”
다이에나는 힘겹게 입술을 떼는 황제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 감춰져 있던 성물을 꺼내 들었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성물을 보란 듯이 들이미는 다이에나의 얼굴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대신관의 반응에 에도 초조해하거나 경악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복부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무뎌지고 있었다.
그 변화가 영혼이 붕괴됨에 따라 육체와 괴리감이 발생하는 현상임을 모르는 황제로서는 고통이 줄어 그나마 냉정히 사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어차피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제 결백을 믿어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이런 소모적인 대화를 통해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더불어 다이에나 대신관에게 ‘혹시’라는 의구심을 심어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금술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제 힘이 사라질 리 없었다.
‘영혼이 붕괴된다고? 웃기는 소리.’
황제는 드래곤이 제게 속삭인 진실을 외면했다.
금술을 사용할 때 필요한 건 제물로 소모될 영혼이지 시전자의 영혼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흑마법에 손을 댄 건 맞소. 하지만 나는 아니지. 그러니 기사들만이라도 물리고 나를 치료해 주시오. 그 뒤에 대화를 하면 되는 게 아니겠소.”
시답잖은 황제의 변명에 다이에나 대신관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보다 더한 힘에 손을 대셨죠.”
신전 측 고위 신관들은 금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비록 그게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르반 카넬로웰과 합력하며 상세히 조사할 수 있었다.
또한 금술이 금술일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도.
황제는 다이에나 대신관의 냉정한 목소리에 작게 혀를 찼다.
다 알고 있었군.
아무래도 시간을 벌기에는 무리인 듯했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금술을 억지로라도 사용하려 끌어올렸다.
“…무슨.”
금술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으나,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황제의 뇌리에 세상이 부서지는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소리도, 감촉도 없었지만 분명 알 수 있었다. 깨졌다. 중요한 무언가가 깨져버렸다.
황제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또한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 황제에게 몰려왔다.
거대한 해일이 온몸을 채우는 듯이 고작 인간에게는 버겁다 못해 존재 자체가 바스러질 듯한 괴로움에, 황제는 어떻게든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조차 잊고 그저 죽고 싶어졌다.
그때 황제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율렌이 조소했다.
“깨졌구나. 영혼이 부서지도록 금술을 사용하다니, 어지간해.”
율렌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황제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내리눌렀다.
미약하게 힘을 주자 황제의 몸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너져 바닥에 무릎이 꿇려졌다.
그마저도 율렌이 황제의 머리를 지탱하고 있기에 넘어지지 않은 것일 뿐, 황제는 이미 제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편히 보내줄 수는 없지.”
이대로면 수 분 내로 영혼이 바스러져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만의 영혼을 희생시킨 무도한 놈을 그리 허망하게 보내줄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본래 영혼이 부서지는 것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동반한다.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감각에 비명을 내지르고 제 가슴에 구멍을 내서라도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하겠지.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비록 당사자가 그 수분을 억겁과 같은 시간으로 느낀다고 한들, 그건 율렌의 알 바가 아니었다.
고작 그 정도의 고통으로 수십만의 영혼에게 죗값을 치를 수야 없지 않은가.
율렌은 황제가 그 찰나에 불과한 고통을 견뎌낸 후 편안한 안식을 찾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너를 여신의 품으로 보내주마.”
율렌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사위가 워낙 조용했기에 그 한 마디를 전해 들은 주변인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여신의 품으로 보내주겠다니,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황제에게는 너무도 관대한 처사가 아닌가.
“율렌 님,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여신의 곁에서 네가 해친 영혼들의 남아있던 수명을 모두 합한 만큼만 참회하면 자비로운 여신님께서는 네 영혼의 자유를 허락하실 거다.”
율렌은 제 결정에 불만을 품은 한 성기사의 말허리를 자르며 확언했다.
“정확히 셈할 수야 없겠지만 아마 이 세계가 소멸할 때까지만 고생하면 될 거다.”
율렌이 황제의 머리에서 손을 떼자 어느새 영혼이 떠나간 황제의 육체가 맥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황제와 전 황태자, 라이셀 샤루스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샤루스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새벽에 직접 황궁에 잠입해 황제의 마지막을 목도한 다이에나 대신관이 직접 광장의 단상에 올라 대대적인 발표를 했다.
“카슈레인 샤루스와 황자 라이셀 샤루스는 여신의 선택을 받은 초대 황제의 후손이지만 흑마법에 손을 대는 중죄를 저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으로 인해 넓은 광장을 넘어 일반 거주지에서 생활하는 제국민들의 귀에까지 닿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그러게나 말이오.”
대다수가 여신을 섬기는 제국민들 사이에게 황제와 황자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둘의 만행을 파헤치고 구속한 이가 얼마 전 황위 계승 서열 1순위에 오른 아르반 카넬로웰이라고 알려지자, 충격에 휩싸였던 제국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제국 전역으로 이 소식이 퍼져나갈 때쯤, 아르반은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 받게 되었다.
황위 계승권 1순위였기는 하나 갑작스럽게 황제의 자리가 모두 공석이 되었던지라, 성대히 대관식을 치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더불어 리엘리 역시도 정식으로 공작위를 계승 받아 더욱더 안정적으로 공작가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리엘리는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드디어 내가 바라는 대로 살 수 있겠구나.’
황제의 영혼이 어찌 되었든 카슈레인 샤루스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라이셀 샤루스와 루퍼스 로베르는 살아남았지만 남은 일생을 지하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외에 황제와 협력관계에 있던 가문들을 처벌했으며, 그중에는 블란드 후작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후작가는 흑마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프리실라 블란드가 제 아버지의 악행을 미리 고해바쳤다는 증거가 있었기에 블란드 후작 하나만을 처벌하고 가문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리엘리가 바라던 대로 오롯이 아몬의 행복과 제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었다.
“좋긴 한데….”
한편으로는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큰 문제가 해결되니 자잘하고 개인적인 일들이 그녀의 뇌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아르반 카넬로웰 샤루스가 되었으니, 후계 문제를 좌시할 수 없겠지.’
그는 막 황좌에 올랐지만 후계 문제에 대해서는 그 직후부터 말이 많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아르반이 피를 나눈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슬하에 자식이 존재하지도 않으니.
후계가 필요하다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즉….
“황후가 필요하다 이 말이지.”
리엘리는 손가락 끝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전혀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닥치니 심란하긴 매한가지였다.
* * *
아르반을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한 나는 입궁하는 길에 율렌에게 들려 먼저 얼굴을 마주했다.
정확하게는, 서류 더미에 파묻힌 율렌이 고개만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는 게 옳겠지만.
상태는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아직 일이 많은 듯 보여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말을 걸었다.
“잘 지내고 있어?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들렸어.”
“…아마도? 그냥…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야.”
“옛날…?”
“제국 초창기에 일손이 부족할 때가 생각난다고.”
로베르 공작저에서 네 일을 도와줬던 때가 더 낫다 싶네.
율렌은 중얼거리며 서류를 힐끔거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나 한잔 마시고 가.”
“좋지.”
아직 아르반과 약속한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오랜만에 율렌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 뒤 느긋하게 아르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안내된 응접실에 앉아 아르반을 기다리길 벌써 몇십 분이 지났다.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늦는 감이 있다 싶을 때쯤, 아르반이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함박웃음을 지으려다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고 장난스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러다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찾아가려 했지만,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나는 맞은편에 앉아 미안한 듯한 얼굴로 웃어 보이는 아르반을 바라봤다.
황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와 나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존대를 했고, 이전처럼 얼굴을 마주할 시간 또한 부족했다.
“당신 탓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좀 서운해서요.”
그도 나도 서로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자리를 보존해야만 했다.
그나마 아르반보다는 내가 더 여유가 있었기에 내가 황궁으로 찾아온 것이고.
“그나저나, 요즘 대회의에서 자주 말이 나오던데….”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반을 응시했다. 슬쩍 눈길을 피하며 모른 척하고 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황후.”
“…….”
요 몇 달 사이 다시 안정을 찾은 제국으로 인해 귀족들 사이에서 더욱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아르반은 그에 대해 늘 무시로 일관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만은 없다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을 터였다.
아르반의 배우자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을 하고 싶다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깊어져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 때문에 심란한 내 상태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바로 아몬이었다.
“누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때 당시 나는 오랜만에 듣는 누님이란 호칭에 놀라 토끼 눈을 한 채 아몬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슬슬 차기 공작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싶어요.”
내가 의아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자 아몬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누님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누님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셨으면 해요.”
“아몬….”
“솔직히 언제까지나 이렇게 공작저에 남아주셨으면 하지만, 제 욕심이란 걸 알아요. 그리고 누님께서 저 때문에 발이 묶여 뜻대로 하지 못하시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간 바쁘다고 아몬에게 소홀했던 순간들이 뇌리를 스쳤다.
“스승님께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셨으니 배우자가 필요함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마도… 누님께서 심란하신 이유 역시 그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맞을까요.”
“…응, 맞아.”
“저는 오롯이 누님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하셨으면 해요. 결혼하고 싶으시다면 그 누구보다도 기쁘게 축하해 드릴게요.”
그 대신에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마음속에서는 제가 1순위였으면 해요.
나는 당당하게 말하다가 마지막에 수줍게 덧붙이는 아몬을 보고 결국 크게 웃으며 아이를 꼭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처 많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내 마음을 우선해서 생각해줄 만큼 커버린 걸까.
미안하기도 하고, 또 대견하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몬이 마음을 써준 만큼 더는 망설이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르반을 빤히 바라봤다.
주변에서도 결혼에 대해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에게서도 무언가 언급이 있을 만도 하건만.
그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늘 이 화제를 피하기 바빠 보였다.
“설마 아르반, 저랑 결혼하기 싫어요?”
그럴 리 없다 여기지만 또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요.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르반은 내가 이상한 방향으로 삽질하게 내버려 두는 대신 단칼에 생각을 끊어내 주었다.
“그럼 왜 저한테 아무 말도 없는 건데요.”
“…당신이 이전에 말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께는 로베르 공작가가 있지 않습니까. 저와 결혼한다면, 당연하지만 공작 위는 포기하셔야 할 테니까요.”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공작.
단 한 번도 내 것이라 여긴 적이 없는 작위였다. 그저 아몬을 무사히 지키는 데 필요했을 뿐.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지금 명확하게 깨달았다.
하기야 계속 차기 공작으로서 철저하게 움직였으니 오해할 만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작위는 관심도 없었어요. 제가 그 자리에 오르겠다 여긴 건 온전히 아몬 때문이었는걸요. 작위는 그 애가 성인이 되는 즉시 넘겨줄 생각이고요. 아몬과도 이미 이야기를 마친 상태예요.”
“그렇다면….”
내 대답에 아르반의 눈이 크게 뜨이며 안색이 밝아졌다. 나는 작게 웃으며 왼손을 내밀어 보였다.
“네 번째 손가락은 당신이 끼워 줄 반지를 기다리며 언제나 비워둘게요.”
그러니까 준비되면 청혼하러 오라고요.
내가 작게 덧붙이자 아르반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가 간신히 떨어지며 감정을 참아내듯 억눌린 음성을 토해냈다.
“…예,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그와 함께할 앞으로의 나날 또한 기대되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