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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52화 (152/153)

152화.

* * *

황태자,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태자였던 라이셀은 황제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 채 침묵을 지켰다.

“한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야.”

라이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모든 면에서 등을 떠밀어주는 수준으로 지원해줬음에도 여태 제대로 된 성과를 올리지 못했음을.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움직였지만, 아르반 카넬로웰은 그 하나가 어찌 노력한다고 해서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그 사실은 황제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제 자신 역시도 아르반을 암살하기 위해 정예들을 파견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만 있었다.

‘이제는 더 두고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지.’

황제는 푹 수그러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 라이셀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비록 자신에게 모욕을 안겨주었다지만 그 문제를 차치하고 아르반 카넬로웰을 정말 후계로 거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실상 상황은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전과 마탑.

거대한 두 세력이 모두 아르반 카넬로웰의 세력을 자청하고 있다.

신전과 마탑 모두 부와 명예와는 거리가 먼 세력들이었기에 그들을 포섭하는 것은 황제로서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르반 카넬로웰은 그 존재만으로 그들을 끌어들이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성검과 드래곤의 주인.

두 세력이 두 팔 벌려 환영해 마지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걸 이용하는 게 현명하다.’

그렇지만 아르반 카넬로웰은 감히 제게 모욕을 주었다.

또한 어찌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에 황위 계승권 역시 아르반에게 쥐여준 상황.

그가 죽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도 다른 이를 황위 계승권자로 올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역시 말 잘 듣는 무능한 놈이 더 다루기 쉽지.’

그렇기에 모자라기 짝이 없지만 제 명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닌 라이셀이 더 황태자 자리에 적합했다.

그렇다면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르반 카넬로웰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가 제 손에 쥔 세력을 휘두르기 전에.

‘분명 놈은 반역을 꾀하고 있다.’

자세한 시기를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가까운 시일에 움직일 터였다.

황제는 이런 상황에 금술에 사용할 영혼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매우 심기 불편했다.

사실 그간 모아두었던 영혼을 믿고 금술을 남발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기에 아르반 카넬로웰이 언제 손을 쓸지 모르는 현 상황에서 금술을 이용한 결계로 종일 황궁을 지키기란 불가능했다.

때문에 황제는 하는 수 없이 황성이 아닌, 제가 기거하는 본궁에만 금술을 사용해 결계를 둘렀다.

별안간 황제가 퍼뜩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조금 전, 본궁을 감싼 결계가 사라졌다.

‘설마.’

황제는 재차 금술을 존재를 확인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계가 파괴됐다.

그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금술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국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꼽아낸다면….

쾅-!!

황제가 침입자의 정체를 생각할 때, 난데없이 응접실 문짝이 뜯겨 나갔다.

그와 함께 굉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이렇게 빨리 여기까지 도달한다고?’

황제 그 스스로가 금술을 맹신하여 궁 내부에는 많은 수의 호의를 배치하지 않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속도라니….

아주 놀랍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문 너머에 서 있는 자를 바라봤다.

‘그래, 네가 아니면 이런 상황은 말이 되지 않지.’

아르반 카넬로웰.

“헉!”

오직 라이셀만이 당혹스러운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들이켜며 몸을 굳혔다.

하지만 라이셀이 그런 반응을 보이든 말든, 아르반과 황제는 서로를 인식한 순간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황제는 곧장 금술을 사용했고, 침입자인 아르반은 성검을 빼 들고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큭….”

아르반은 금술을 베어내려 했지만 예상보다 강한 위력에 그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그렇지만 단번에 금술을 베어낸 아르반은 그 강한 힘의 반동으로 작게 뒤로 물러섰다.

또한 그가 베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은 금술의 잔재를 확인한 아르반은 뒤에서 신음과 비명이 들려옴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쿠궁, 쾅!

“아악!”

“끅!”

무너진 벽의 일부와 사람들의 단말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실내를 가득 메우는 혈향과 사라진 인기척들.

날아오는 폭탄을 베어낸다 해도 터지는 건 마찬가지듯이, 금술 역시 베어냈음에도 그 힘을 잃지 않고 아르반을 제외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르반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황제를 응시했다.

제 움직임과 엇비슷한 속도로 공격이 들어왔다. 분명 상대를 인식한 것은 자신보다 늦었음에도, 마치 생각만으로 금술을 사용할 수 있는 듯이.

아르반의 짐작과 같이 황제는 그저 사고만으로 술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더 많은 대가가 필요하지.’

황제는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일격에 죽이고자 작정하고 금술을 사용했는데 저리 멀쩡히 살아있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배알이 뒤틀렸다.

가뜩이나 모아둔 영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차였다. 여기서 시간을 끄는 건 좋을 게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황제뿐 아니라 아르반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유지하던 마법사 역시 금술에 의해 사망했다.

그러니 황궁의 사용인들이 들이닥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라는 말이었다.

황제는 그런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아르반으로서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는 분명 무고한 이도 섞여 있을 테니까.

‘이후에 사실을 알게 된 엘리가 슬퍼하겠지.’

그가 데려온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모두 사망했으니, 이미 희생된 이의 수가 적지 않았다.

거기서 더 수를 늘릴 생각은 없었기에, 아르반은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 아르반을 마찬가지로 예의 주시하던 황제 역시 곧장 금술을 사용했다.

라이셀은 아무렇게나 날뛰는 금술의 범위에서 벗어나고자 응접실의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긴 채 공방을 지켜봤다.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렇다면 아르반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황제가 자신 또한 살려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아르반과 그를 노리고 휘몰아치는 금술의 모든 움직임을 쫓기 위해선 눈을 부릅뜨고 집중해야만 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가며 아르반과 황제는 어렴풋이 한 가지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는다.’

황제가 사용하는 금술과 아르반이 사용하는 성검.

무엇 하나 온전히 서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아주 작은 차이라도 발생했을 시 한쪽이 무너진다는 뜻과도 같았다.

“라이셀!! 벌레만도 못한 놈! 바닥을 기고 있을 시간이 있다면 이놈의 앞에서 발악이라도 해 보거라!”

그 사실을 인지한 황제가 라이셀을 찾아 버럭 소리쳤다.

지금 황제는 금술의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해 아낌없이 영혼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용할 수 있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고, 그에 봉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작 라이셀 따위가 끼어든다고 해서 틀어질 판이 아니었지만 아르반과 황제를 제외한다면 라이셀 외에 존재하는 이가 없었다.

라이셀은 황제의 벼락같은 부름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명령이긴 했지만, 상황 파악을 못 할 만큼 모자라지는 않았다.

다만 황제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아르반에게 그가 공격을 한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죽이겠다고 날뛰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라이셀은 순간 자신이 한심해졌다.

금술을 다루는 황제와 막상막하를 이루다니.

전쟁에서 위명을 떨치고 검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라이셀은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해서야 자신이 아르반을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를 깨달았다.

라이셀은 아득한 심정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흑마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을 느끼기도 잠시.

“크… 흡….”

잠시나마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허무하게 라이셀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그가 무언가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아르반이 그의 뱃가죽에 검을 박아 넣었다.

아르반은 곧 다시 칼을 뽑으며 라이셀을 아무렇게나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라이셀 샤루스는 살아있는 편이 이득이었다.

중상이기는 했으나 일부러 급소를 피했으니 빠르게 황제를 죽이고 치료한다면 목숨은 위험하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황실에서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다지만 흑마법사들을 이용한 것과 황족이 직접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달랐으니까.

아르반이 이끌고 왔던 신관들은 몰살당했기에 이 상황이 종결된 후 황태자였던 라이셀의 신변을 신전 측에 넘겨야만 했다.

흑마법에 의해 타락해 버린 현 황제와 전 황태자 때문임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했으며, 신전은 그에 대한 명백한 물증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명분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는 아르반 카넬로웰이 황위 계승 서열 1위에 등극했음에도 반역을 일으킬 수밖에 없던 이유기도 했다.

아르반은 몸의 긴장을 끌어올리며 황제의 동태를 주시했다.

벌써 수차례 공방이 이어졌지만 실제로 흘러간 시간은 오 분조차 되지 않았다.

“허… 허억! 폐, 폐하!”

“여신이시여….”

경비는 모두 처리하고 들어왔지만 사용인들은 아니었기에 그들이 일으키는 치열한 굉음에 여러 사용인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수많은 시체와 아르반을 발견하고는 겁에 질려 옴짝달싹하지 못함에도 황제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쉽게 도망가지 못했다.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

아르반은 나지막이 경고했다.

그들의 눈에 무도한 이는 아르반이겠지만 정작 자신들의 목숨을 조금이나마 신경 써 주는 건 황제가 아닌 그라는 사실을 사용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꼭 살해 협박과도 같은 아르반의 한마디는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르반은 작게 혀를 찼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슬슬 끝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최대한으로 마력을 끌어올리기에는 장소가 부적절했다.

황제가 아니라 이 황궁이 박살이 날 테지. 그럼 제 뒤에 있는 이들은 모두 개죽음행이었다.

“아르반.”

그때, 공작을 잡아들이고 급히 황궁으로 찾아온 리엘리가 작게 아르반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아르반과 황제의 시선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황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또 다른 불청객으로 인해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리엘리를 포함해 새로이 앞길을 막는 이들을 먼저 쓸어내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치워내기 힘든 아르반이나 율렌보다 상대적으로 힘없는 쪽을 먼저 없애는 게 편했으니까.

황제는 재빨리 금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황제의 시선이 리엘리에게 닿았던 순간, 먼저 몸을 움직여 그 앞을 가로막은 아르반으로 인해 그 시도는 수포가 되고 말았다.

“……!”

리엘리는 놀라 눈을 부릅뜨며 정면을 응시했다.

하지만 리엘리의 시야에 들어온 황제는 공격당할 뻔한 그녀보다 더욱 경악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제가 금술을 사용함과 거의 동시에 아르반이 리엘리 앞을 가로막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다시금 공격하고자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르반에 의해 제압당했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금술이….’

일순이지만 금술이 황제의 의지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때, 황제의 낯이 단번에 구겨졌다.

“콜록… 컥! 쿨럭!”

이윽고 황제가 격하게 기침을 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황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며 제가 토해낸 것들을 확인했다.

이대로 과다출혈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양이다.

“엘리, 괜찮습니까.”

심상치 않아 보이는 황제를 여전히 경계하면서도 아르반은 곁눈질로 리엘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자신이 황제를 막아섰기에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제가 토해낸 피를 망연히 바라보던 황제는 아르반이 리엘리를 살피기 위해 제게 등을 보이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금술을 사용했다.

아니, 하려 했다.

“무, 무슨….”

하지만 여태까지 그의 수족과도 같이 움직여주었던 금술은 황제의 의지를 배반했다.

그 믿을 수 없는 현상에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하물며 저도 모르게 경악에 젖은 음성을 내뱉고도 그 스스로 인지하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있어서 금술을 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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