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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51화 (151/153)

151화.

수상할 정도로 순순히 정보를 털어놓는 일레이를 보며, 아르반은 미간을 좁혔다.

애초에 무작정 놈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신용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태도가 너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아르반의 불신이 표정에서도 가감 없이 드러났다.

“하하, 못 믿는 눈치인데 내가 말한 정보들은 다 진짜야.”

아직까진 심문 외에 다른 해를 입은 것이 없는 일레이가 피곤하지만 멀쩡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럼 왜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거지.”

“왜겠어. 황제 놈 엿 먹으라고.”

그 비릿해 보이는 미소에 아르반은 순간 말문을 잃었지만 곧 입을 열었다.

“…네놈이 모시는 이가 아닌가.”

“모시지. 모셨었지.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내 생살여탈권은 대공 당신이 가지고 있고 이 상황에서 내가 사지 멀쩡히 기어나갈 수 있으리라 여길 만큼 낙관적이지는 않아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본체로 공작가에 침입하지 않았을 텐데. 일레이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세리나 로베르의 육체를 움직일 사람이 없으니 공작이 난리 치는 것도 시간문제겠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자신이 이 모양, 이 꼬락서니로 잡혀있는데 로베르 공작과 황제는 행복하고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내가 불행하면 다른 놈들도 공평하게 불행해야지.”

일레이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혼자 죽을 수야 없지.

* * *

황태자 라이셀 샤루스와 리엘리 로베르 공녀의 약혼식이 중지된 이후, 또 다른 소식이 제국 전역을 강타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400년 만에 성검의 선택을 받으신 대공께서 황위 계승 서열 1위를 보장받으셨다잖아.”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는?”

“계승 서열에서 밀리셨으니 그냥 황자 전하가 되시는 거지.”

바로 오늘 오전, 황명으로 황위 계승 서열 바뀌었다는 대대적인 발표가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부분의 제국민은 다소 얼떨떨해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라이셀 황태자나 카넬로웰 대공, 둘 중 누가 황제의 위에 오른다 해도 감히 불만을 품을 수도 없거니와, 만약 그런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한동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화젯거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음? 황태자 전하께서 황자 전하가 되시면 로베르 공녀님과의 약혼은 그대로 진행되는 건가.”

“글쎄…?”

한 상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혼잣말을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이가 아리송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현재 샤루스 제국은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몇 년 전까지 소국들과 벌여왔던 전쟁도 모두 종결되었고,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탈 없이 잔잔하기만 한 일상.

나무의 뿌리가 썩어 문드러졌다고 한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인다면 그 사실을 눈치채기까지 한참이 걸린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제국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황실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만행들을.

* * *

일레이가 뱉어낸 정보들은 제법 쓸만한 것들이 많았다.

세리나 로베르와 공작이 머무는 황궁 지하로 통하는 길, 그곳을 지키는 병력의 숫자, 흑마법으로 세리나의 부활을 연구한 결과물들이 보관된 장소.

그리고 로베르 공작이 흑마법을 통한 실험에 들어간 금액을 황제에게 얼마나 가져다 바쳤는지 기록한 장부는 그의 보좌관, 레이먼드가 가지고 있다는 것 등등.

‘파면 팔수록 비리가 넘쳐나네.’

일레이가 말한 정보를 알아볼수록 나날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또한 프리실라 블란드에게 받아보았던 정보를 토대로 조사를 이어오던 부분도 좋은 성과가 있었다.

블란드 후작의 탈세 정황과 외국에서 불법으로 노예를 들여온 내역을 알아냈고, 그에 대한 물증 역시 손에 넣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블란드 후작은 흑마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후 블란드 후작을 잡아넣는다 해도 프리실라 블란드의 자리보전에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아무래도 내부 밀고자니까.’

나는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저 하늘처럼 깨끗하게 제국을 청소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는 불가능하겠지. 현실적으로.

하지만 황제와 흑마법사, 그에 얽힌 귀족들을 솎아내면 한동안 제국이 평화로울 것만은 분명했다.

“이제 곧이구나.”

황성을 치기로 약속한 날까지.

뭐랄까,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 옆에서 서류를 보던 율렌이 내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걱정돼?”

“…조금?”

하지만 걱정해서 어쩌랴.

이미 모든 준비는 끝마쳤으니, 이제 나 자신과 아르반을 믿고 나아갈 일만 남았을 뿐이다.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보니 아르반은 결전의 날,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을 결사반대했었다.

물론 이전의 나였다면 그 생각에 내심 동의했을 터였다.

아무런 힘도 없이 사지로 뛰어드는 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 다르다.

아직 모든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자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지고 있는 마력이 방대했기에 공격력 하나만큼은 그야말로 발군.

마법을 연습할 때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며 폭발을 만들었던 경험을 역으로 이용하여 공격한다면 그 위력은 엄청났다.

‘그 외에도 공격 마법은 여러 개 사용할 수 있게 됐고.’

그 사실을 토대로 열심히 아르반을 설득하여 결국 나는 율렌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아르반은 황제에게로, 나는 공작이 숨어있는 곳으로 목표를 잡았다.

황제를 먼저 치자니 공작이 도망가거나 다른 수작을 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고,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그 하루에 모든 게 달렸구나.’

나와 아르반, 그리고 황실과 제국의 앞날까지도.

* * *

동이 트기 전, 아직 어두운 새벽.

미리 정해두었던 시간이었다.

“시간 됐어.”

“움직이죠.”

리엘리는 율렌의 신호에 반사적으로 옆을 바라봤다.

그러자 리엘리를 바라보고 있던 세이린이 생긋 웃어 보였다.

리엘리는 세이린과 함께 대기 중이던 신관들과 신전의 성기사들 그리고 아르반 휘하의 기사, 마법사들을 이끌고 이동했다.

수는 많지 않으나 엄선해서 데려온 이들이었기에 이동은 신속하고 조용히 이루어졌다.

황궁은 마법으로 결계가 쳐져 있었기에 출입 자체가 난관이라 할 수 있었지만 율렌이 있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경비는 또한 어느 때보다 견고했으나 일레이의 정보를 토대로 정예 부대를 이끌고 들어온 터라 그들을 처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경비들을 모두 제압해 묶어두고 내부로 침입해 즉시 공작이 기거하는 궁으로 향했다.

“…역겨워.”

“이 정도의 검은 마력을 숨겨두고 있었으니 어지간히도 금술을 남용했겠어.”

리엘리가 일순 뒤로 물러서며 주춤거리자 율렌이 냉소적으로 이야기했다.

“금술을 참 만만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이란 그리 단순한 게 아니거늘.”

이 기운을 신전에 발각되지 않겠다고 금술을 이용해 결계를 낭비해댔으니….

‘어리석긴.’

금술이 금술이라 불리게 된 까닭은 사실 필요한 제물인 영혼뿐 아니라 시전자 자신의 영혼 역시 술법을 사용할 때마다 갉아 먹히기 때문도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힘이었다.

잠시 금술에 대해 생각하던 율렌은 곧 직면한 상황에 집중했다.

“이 앞이네.”

궁 내부에는 곳곳에 흑마법사들 역시 포진해 있었지만 놈들을 귀신같이 골라내는 율렌이 있었기에 급습을 노리는 시도 역시 모두 무산되어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금세 주둔해 있던 기사들을 처리하고 잠입한 궁의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공작이 세리나 로베르와 함께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앞을 지키던 흑마법사들과 기사들 역시 순식간에 명을 달리했지만 일말의 비명조차 밖으로 새어 나가지는 못했다.

율렌이 시전한 마법에 의해 그들이 내는 모든 소리는 소멸되어 버렸기에.

리엘리는 잔뜩 굳어진 낯으로 눈조차 감지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지나쳤다.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직접 목도한 건 처음이었기에 속이 울렁거렸다.

‘참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마. 현 상황에만 집중해.’

한발 한발 안으로 내디디며, 리엘리는 침대에 미동 없이 앉아있는 로베르 공작을 응시했다.

“루퍼스 로베르.”

그녀의 부름에서야 비로소 로베르 공작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뭇한 눈매와 움푹 들어간 볼살로 인해 전에 봤을 때와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는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리엘리는 공작의 꼴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돌려 로베르 공작에게 가려져 있던 세리나 로베르의 모습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눈을 가린 채, 침대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여자.

루퍼스 로베르보다 더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체는 사체일 뿐이다.

리엘리의 눈이 탁한 빛을 띠었다.

비록 제 어머니는 아닐지라도 마땅히 안식을 취해야 할 이였다.

“리리, 리리…. 세리나가 일어나지 않는구나. 이리 와서 세리나를 좀 깨워다오.”

루퍼스 로베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엘리에게로 다가오더니, 이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곧 리엘리의 곁에 서 있던 기사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러자 루페르 공작은 언제 애절했냐는 양 금세 돌변했다.

“놔!!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지 알고 있느냐!”

리엘리는 제압당한 채 발버둥 치는 공작을 바라보며 헛웃음 지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이렇게 별것도 아닌 놈 하나 때문에….’

허망하리만치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

이런 자 때문에 아몬과 죽은 리엘리, 세리나까지 그 고생을 했다니.

실로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공녀님, 어찌하시겠습니까.”

성기사 하나가 리엘리에게 질문했다.

흑마법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자는 즉결 처형한다 해도 상관이 없었으니까.

“포박해두세요.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예.”

혈육이니 아무래도 죽이지 못하는 거겠거니, 예상했던 성기사는 우연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깨달았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구나.

보랏빛 눈동자는 지옥의 불길처럼 조용히, 그러나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저 이 자리에서 편안히 죽게 하지 않겠다는 뜻임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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