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라이셀 샤루스가 물러간 이후에도 생각에 잠긴 황제는 한동안 미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로베르 공작가 역시도 이제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군’
이전의 로베르 공작은 훌륭한 자금책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걸리는 게 많군.’
황궁에서 그가 맡은 업무야 다른 이를 앉혀도 그만이지만 로베르 공작을 죽이면 그 후계는 자연스럽게 리엘리 로베르가 가져가게 된다.
사실상 현재로서도 로베르 공작이 실무를 놓아 버린 상황이기에, 이전부터 공작의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가신들은 공작보다 그녀를 신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공작이 살아 있는 한 어디까지나 가주는 로베르 공작이다.
차라리 공작을 살려두고 아르반과 함께 리엘리 공녀를 제거하는 편이 나으리라.
공작을 다시 돌려보내 리엘리 공녀가 쥐게 된 실권을 빼앗고 싶었지만,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간 로베르 공작을 이용하기 쉽게 그의 약한 정신을 파고들어 흑마법을 사용한 탓에 까딱하다가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 상황에 공작이 집착하는 세리나 로베르를 그에게서 떨어뜨려 놓는 건 매우 위험했다.
그렇다고 세리나 로베르를 황궁 밖으로 옮기자니 신전의 눈이 걸린다.
‘여러모로 좋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그저 리엘리 로베르가 공 작가를 운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향후 거슬리는 문제를 모두 치웠을 때, 로베르 공작가는 다시 훌륭한 자금 조달처가 되어줄 터였다. 그렇기에 이대로 공작가가 무너지는 것은 그로서도 제법 곤란했다.
* * *
마력을 완벽히 회복한 리셀은 다시 마탑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완성한 내 초상화를 남겨두고.
클레어는 한동안 남아 더불어 쌍둥이에게 제대로 시녀로서 일을 배우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공작 대신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간간이 도착하는 아르반의 편지를 통해 신전과 마탑과 접촉했고 두 세력과 어떤 진척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예상보다 진행이 빠르네.’
계속 이렇게 착착 진행된다면 황제를 끌어내리는 날도 머지않았다.
그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내 기분은 현재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실험에 사용할 사람들을 보충했나 싶었는데.’
나는 최근 올라온 보고서를 바라봤다.
물론 그 사람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으리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예는 물론이거니와 영지의 사람들마저 잡아다가 희생시켰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내가 공작을 대신해 실무를 잡고 조사를 지시하니 그간 실종된 영지민의 수가 상당했다.
그것도 연고가 없는 자들과 부랑자들이 몇 년 사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게 제 아내 하나 살리자고 하는 짓이라니.’
이건 사랑이 아니다. 그저 집착일 뿐이지.
공작은 여전히 황궁에 처박힌 채 이제 영지와 저택에는 얼굴조차 비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내가 완전히 공작가를 주무르는 데 어려움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시라도 빨리 모든 일을 깔끔히 정리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 * *
그러나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한탄한 게 화가 되었나 보다.
“크아아악!”
막 잠자리에 들려던 리엘리는 난데없이 귓전을 강타한 비명에 튀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옆에서 함께 몸을 말고 있던 율렌은 그다지 놀란 기색 없이 중얼거렸다.
“쥐새끼가 기어들어 왔네.”
다른 곳은 몰라도 리엘리의 방과 집무실만큼은 철저하게 율렌의 통제하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 곳에 강제로 몸을 욱여넣으려 했으니, 미리 준비해둔 마법에 걸린 침입자는 거미줄에 걸려버린 날벌레처럼 몸을 버둥거리며 발버둥 쳤다.
다른 점이라면 그저 몸이 붙어버릴 뿐인 거미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통이 동반된다는 것일까.
율렌은 통증으로 인해 입만 뻐끔거리는 놈을 지긋이 내려다보다 고통을 없애고 결박마법만을 남겨 놓았다.
침입자 주제에 이대로 통구이가 되어 죽어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그래도 무슨 속셈으로 기어들었는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이 사람….”
침입자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율렌과 달리 리엘리는 잊지 못할 그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일레이.’
그녀를 납치하고는 성녀니, 뭐니 하던 헛소리를 지껄이며 혼자 갖은 오해를 하고는 자취를 감춘 남자.
“…너는 뭐 하자고 이렇게 기어들어 온 건데. 날 암살이라도 하려고 했어?”
리엘리는 율렌에 의해 온몸이 구속된 채 침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흑마법사, 일레이를 툭 치며 물었다.
“아, 율렌 입만 좀 풀어줘.”
“…오랜만이야. 근데 좀 살살 다뤄줄래? 이거 본체라 아껴야 하거든.”
리엘리는 질린 눈으로 일레이를 내려다봤다. 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구나.
그런 그녀의 눈빛을 읽은 일레이가 픽 웃으며 말했다.
“안 나올 건 또 뭔데.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애초에 죽음이 두려웠다면 이렇게 살지도 않았어.”
“참, 당당하시네. 그래서.”
“아, 원래 너를 암살할 것까진 아니었어. 그냥 괘씸해서 좀 괴롭혀 줄까 싶어 온 거지.”
“…괘씸?”
그게 지금 네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던가. 기가 막혔던 리엘리가 일레이가 뱉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래. 설마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황제 역시 드래곤이 유체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기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드래곤은 고고한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가 굳이 저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이유가 없으리라 여긴 것이다.
‘방심을 유도한 건가.’
엘레이는 제대로 마법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붙잡힌 자신의 처지와 착각에 빠져있을 황제가 우스워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성녀도 아니었잖아. 그런데 나를 속였고.”
엘리이의 시선이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드래곤에게로 향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이전에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강력한 신성은 이 드래곤의 것이었군. 그런데 공녀, 아직 네게서도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이 느껴지는 이유가 뭐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네가 내게 질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냐.”
만약 반대 위치에 있었다 한들 얘기해줄 마음도 없었지만 말이다.
“율렌, 다시 입 좀 막아줘. 어차피 더 들을 필요도 없는 것 같네.”
보아하니 황제나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침입한 게 아니라 전처럼 단독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대체 나를 얼마나 물로 봤으면 이런 반응일까.’
물론 이전의 나였다면 그럴 만도 했지만, 마법을 익히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은 충분히 한 사람 정도의 몫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곁에는 항상 율렌이 있다.
작다고 해서 드래곤을 얕본 건가.
리엘리는 율렌을 바라봤다.
작은 몸체와 어울리는 짧은 다리와 밤톨만 한 머리, 아몬드 형태의 큰 눈.
생김새는 매우 무해하고 귀엽기 짝이 없다.
‘저 외형에 속아 황제도 이자처럼 잔뜩 방심해주면 좋겠네,’
“율렌, 이자를 아르반에게 전달해 줄 수 있지?”
“당연하지. 왜? 정보를 빼내려는 거면 여기서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해도 되고.”
“아니,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공간이 없어. 만약 내 방에 가둔다고 해도 쌍둥이나 클레어가 드나들며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정확하게는 온전히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없었다.
몰래 지하 감옥으로 옮긴다 쳐도 그곳을 관리하는 사용인이나 정찰을 도는 기사들에게 금세 발각될 테지.
‘아직 공작과 황제의 사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니, 혹시라도 일레이를 붙잡았다는 소식이 그쪽에 전달되면 안 돼,’
그럼 일레이에게서 정보를 듣는다고 해도 대부분 쓸모없어질 것이다.
리엘리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율렌이 일레이에게 꼬리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금방 올 거니까 쉬고 있어.”
“고마워.”
안 그래도 막 잠들려던 차에 깨어버렸던지라 그 말을 들으니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들었다.
리엘리는 꾸물꾸물 침대로 들어가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이미 잠은 다 달아난 상황이라 리엘리는 한참을 뒤척여야만 했다.
* * *
한편, 곧장 아르반의 집무실로 이동한 율렌은 아직까지 일을 하고 있는 주인에게 물었다.
“피곤하면 회복시켜줄까?”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따로 있었지만 제 주인의 안위가 우선인 율렌의 질문에 아르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작스러운 마력의 파동에 뭔가 싶었는데, 이내 익숙한 녀석의 모습에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뒤에 짐을 하나 달고 나타났다.
“그보다 저게 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시간에 일부러 결박까지 해가며 데려올 정도니 예사 것은 아니겠지.
아르반은 그리 생각하며 마법으로 구속된 남자를 내려다봤다.
“아, 저놈이 예전 그놈이야. 리엘리 납치사건의 범인.”
율렌은 일레이를 잡게 된 과정과 이곳으로 놈을 끌고 온 이유를 설명했다.
아르반은 그 모든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율렌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
고저 없는 목소리였으나 서슬 퍼런 푸른 안광과 어우러지니 훌륭한 살해 협박이 되었다.
일레이는 그대로 대공저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에 감금되었다.
저택에 일하는 사용인들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공간으로.
당연하지만 비위생적인 공간과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축축한 지하실은 쾌적함과는 정반대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아르반은 일레이의 입을 열기 위해 고생할 필요조차 없었다.
놈이 너무도 순순히 제가 먼저 입을 열며 리엘리와 자신에 대해 아는 정도며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공작에 대해서까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