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신관, 테렐은 황궁 밖을 서성이며 연신 제 목에 걸린 성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다이에나 대신관에게서 조사 임무를 하달받은 그는 바라만 보기에도 황송한 성물을 손에 쥔 채 황궁 근처를 배회해야 했다.
그의 주변에는 만약을 대비해 실력 있는 성기사들이 용병의 행색을 한 채 정체를 숨기고 테렐을, 정확히는 테렐의 손에 든 성물을 호위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궁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질 리가.’
그 자신이야 해당 건에 관해 회의적이었지만, 테렐은 그 누구보다 신실한 여신의 신자였고 다이에나 대신관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기에 군소리 없이 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흑마법에 손을 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대 황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된 게 현 황제도, 황태자도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 핏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여신이 선택한 초대 황제의 핏줄이 설마 그런 사특한 힘에 손을 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며칠 지내다 보면 분명 황실과는 아무 상관 없음을 인지하고 다른 귀족 가문을 조사하며….’
정말 흑마법에 손을 댄 이가 누구인지, 또한 그 사특한 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희생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테렐이 별안간 멈칫했다.
제 손안에 들려진 보석, 그러니까 성물이….
“부, 붉은색!”
그 빛깔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테렐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궁의 입구와는 거리가 멀지만 황태자 궁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한 외벽.
그는 외벽을 둘러싼 병사들의 시선이 제게 닿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미세하게나마 더욱더 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여신이시여.”
분명 며칠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테렐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성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탄식했다.
사실 황제는 황태자의 약혼식에 맞춰 평소보다 궁을 드나드는 이들이 많아졌기에 지금껏 금술을 사용해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지금 그 결계를 거둬들였을 뿐.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알 턱이 없는 테렐은 그저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보고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아아악!”
“저, 전하 고정을… 꺄악!”
라이셀 샤루스는 벌겋게 핏대가 선 눈으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던졌다.
그의 손에 들렸던 꽃병이 멀찍이서 벌벌 떨며 그를 만류하던 시녀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시녀는 산산이 조각나며 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도자기 조각에 낯빛이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간단한 요깃거리에도 파편이 가득 튀어 더는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가라. 꼴도 보기 싫으니.”
“예… 예, 전하.”
시녀는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라이셀이 명을 물리기라도 할까 싶어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드넓은 방에 홀로 남게 된 라이셀 샤루스는 씩씩거리며 엉망이 된 방과 마찬가지로 흉물이 된 소파에 대충 걸터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르반 카넬로웰. 리엘리 로베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들.
라이셀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리엘리 로베르가 드래곤의 주인이 아닌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인이 아르반 카넬로웰이란 것은, 라이셀에게 있어 용납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또다시 아르반 카넬로웰이군.”
비록 라이셀은 아르반과 얽힌 적이 많지 않으나 그는 어릴 적 제 아버지, 황제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를 기억하고 있었다.
“쯧. 아르반에 비해 잘난 게 하나도 없군. 이래서야 황자로 책봉한 이유가 없겠어.”
라이셀은 자신이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던 그의 어머니가 살아생전 술에 취해 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황제의 입에서 저런 비난을 듣게 된 라이셀은 열등감을 넘어 초조함에 안달이 났다.
황제의 친아들도 아니거니와 대공의 후계자보다도 무능력하다면 언제든 비참하게 죽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흑마법을 권하는 황제의 명에 불복하지 않았다. 힘을 손에 넣고 제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다면 수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힘을 얻고 나서는 제법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르반 카넬로웰에 대한 열등감 또한 전쟁터에서 귀환한 이후 황제에 의해 말 잘 듣는 개처럼 구는 모습을 보고 사그라들었다 여겼다.
하지만 약혼식장에서 리엘리 로베르가 제 뒤통수를 때리고 그자의 곁에 서는 모습을 보자니 분노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성검의 주인이 아르반이란 사실 또한 잠시 묻어뒀던 그의 열등감을 파고들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황태자의 자리를….”
황실의 피를 이은 성검의 주인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황위 계승서열 1위에 봉한다.
여태 그 전례가 없었기에 알고 있는 이조차 몇 없을 법률이었거늘.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그는 또다시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건을 집어 던졌다.
거슬리다 못해 당장 아르반 카넬로웰을 치워내지 않으면 온몸의 피가 역류할 듯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쓸모없는 것들.”
그의 아래에 있는 흑마법사 중 쓸만하다 싶은 놈들을 추려서 암살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직접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사실 라이셀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르반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흑마법이라는 사특한 편법을 사용했음에도 현실은 그러했다. 무의식중에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라이셀은 그저 이렇게 분풀이나 하며 제 화를 삭여야 했다.
“똑똑. 전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때,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이셀의 고개가 휙 들렸다.
노크는커녕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흑마법사, 일레이는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면서 씩 미소 지었다.
* * *
“라이셀 샤루스.”
황제, 카슈레인 샤루스는 형편없는 몰골로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라이셀을 내려다봤다.
한심하고 무능한 것.
그렇지만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제 앞에서만큼은 건방을 떨지 않는 놈이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버릴 수도 없지.’
아르반 카넬로웰. 놈은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성검의 주인이랍시고 유세를 떨며 황태자의 자리를 논하다니.
카슈레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뿐 아니라 요즘 들어 신전이 낌새 또한 심상치 않았다.
곳곳에 흑마법사들을 포진시켜둔 가문 주위로 여신의 신관들이 발을 들였다.
분명 흑마법의 단서를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마침 라이셀과 리엘리의 약혼식이 어그러진 직후였다.
‘우연이라 치기에는 지나치게 절묘하지.’
신전은 그야말로 여신에게 미친 종들의 소굴이다.
그런 곳에 초대 황제를 이어 다음 성검의 주인이 나타나니, 그자를 신봉하기 바쁠 터.
이미 신전은 아르반 카넬로웰과 한통속이라 봐도 무방했다.
‘여태까지도 신전 측의 방문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였지만….’
신전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은 사전에 입궁을 허락받고 철저하게 몸수색을 마친 후에야 안에 들이곤 했다.
또한 중요한 국가 행사나 큰 연회가 있을 때면 금술로 결계를 펼쳐 모든 흑마법에 대한 기운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전이 아닌 아르반 카넬로웰이 무언가를 눈치챘었고, 성검의 주인임을 밝힌 지금 신전의 호의를 등에 업고 함께 움직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로베르 공작저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지만, 그곳에는 증거라고 할 법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쯧.’
일단 어느 방향으로든 흑마법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감은 분명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물증은커녕 금술로 펼친 결계가 작용하는 황궁 내에서는 그저 돌멩이와 같아지는 성물로 검은 마력의 흔적을 찾지 못했을 텐데.
특히나 이번은 외국의 사절단 역시 방문했기 때문에 더더욱 신경을 썼다.
‘그 탓에 너무 많은 영혼을 낭비했어.’
그간 모아뒀던 영혼이 상당하긴 했지만, 뭐든 소모하는 건 금방이었다.
건국제를 위해 각국의 사절단이 방문하는 만큼 검문을 철저히 한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틈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사절단이 황궁에 머무는 내내 검은 마력의 기운을 교란하는 금술을 사용했고, 이번 약혼식까지 겹쳐 예상보다 큰 손실이 있었다.
소모량을 채우려면 그만한 수의 인간을 공급받아야 했는데, 현재로서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도, 그렇다고 대량의 노예를 구해올 곳 역시 마땅치 않았다.
연고 없는 평민들을 납치하는 것도 한계에 부딪혔다. 그렇다고 아예 가족과 친지가 있는 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 올 수 없었다.
결국 영혼을 모으기 위해서는 타국에서 은밀히 노예를 사 오거나 또 다른 전쟁을 일으켜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신전과 마탑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래, 마탑. 마탑주.
원래부터 거슬리던 그놈. 자신이 약혼식 장을 나서고 아르반 카넬로웰에게 접근했다는 보고를 들은 바가 있었다.
신전과 마찬가지로 마탑 역시 약혼식 날을 기점으로 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의 눈을 피해 대량의 제물을 구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그가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방해된다면 제거해야지.’
건방지게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아르반의 목적은 제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먼저 선수를 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적이 너무 많다. 또한, 그는 제가 아르반이라는 한 놈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카슈레인은 자신이 사용하는 금술의 힘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했다. 이 힘이 존재하는 한, 아르반 카넬로웰도, 마법의 정점에 섰다는 마탑주도 두렵지 않았다.
제가 움직일 생각이 없으니, 답은 하나였다. 현재 아르반은 세력을 모으고 있고, 분명 그를 위협하고자 하겠지.
그때까지 힘을 끌어모으며 잠시 숨을 죽였다가, 단번에 치워버린다.
금술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아르반을 치워버릴 명분 또한 확실해진다.
반역.
‘드래곤은 아직 새끼지. 하지만 마법은 사용하지 못해도 신성력은 사용할 수 있다.’
금술과 흑마법에 있어 신성력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영혼을 많이 손실했다 한들 모아온 세월이 있었다.
대신관 한둘 정도의 신성력으로는 황제가 사용하는 금술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아마도 유일한 위협일 것은 드래곤이 지닌 신성력.
그러나 현재 드래곤은 리엘리 공녀의 곁에 있으니, 감시의 끈을 놓지 말아야 했다.
황제가 홀로 생각에 잠긴 사이, 그 아래 꿇어앉은 라이셀은 혼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불러다 아무 말씀이 없는 건지 애가 탔다.
“…네 아래 있는 수족들을 모두 황궁으로 불러모으거라. 무력을 지닌 자라면 누구라도.”
“무슨 연유 때문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반란분자들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예, 알겠습니다.”
라이셀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말을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