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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48화 (148/153)

148화.

“공녀님? 여기까지 어쩐 일로….”

리셀은 순순히 나를 반겼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자신을 찾아온 게 상당히 의아한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사실 어제 얘기하려 했는데, 하지 못한 게 있어서요.”

“예. 말씀하십시오.”

리셀의 대답과 거의 동시에, 율렌이 대뜸 입을 열었다.

“네 마력 회로를 복구할 방법이 있다.”

“…예?”

“네 망가진 마력 회로를 내가 복구해 줄 수 있다고. 하지만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거야. 실제로 죽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런 고통과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하면 내가 고쳐주마.”

나는 율렌이 세부적인 조건을 모두 생략한 채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 하는 수 없이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그러니까….

“검은 마력은 결국 다른 인간의 마력을 강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과 마력이 혼합돼서 발생해요.”

그 때문에 마력을 강탈할 인간에게 극한의 고통을 느끼도록 유도하며, 그건 리셀을 제외한 다른 실험체들이 살아남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이전에 율렌이 내게 해줬던 얘기를 떠올리며 그에게 설명했다.

“음, 그러니까… 강탈당할 때 아무렇게나 찢겨나갔을 마력 회로를 그대로 다시 찢었다가 회복시켜야 해서, 아마 마력을 강탈당할 당시와 흡사할 만큼의 고통을 느끼게 될 거예요.”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에서 당황이 걷히고 그대로 굳어졌다.

리셀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그때 느꼈던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 마력을 되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리셀의 질문에는 나 대신 율렌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래, 맞아. 할 테냐?”

“예, 하겠습니다.”

나는 너무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리셀에게 조금 더 경고를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리셀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내 설명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저 남자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감수하겠다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저리 대답한 것이다.

“엘리, 너는 밖에 나가 있어. 아니, 그냥 네 방에 가 있어. 끝나면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찾아갈 테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율렌은 그 즉시 리셀의 마력 회로를 복구시켜줄 요량인지, 망설임 없이 내게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아냐. 나도 함께 있을게.”

“제 생각에도 나가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녀님. 분명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알겠어요.”

리셀 역시 율렌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요구했기에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야만 했다.

둘이 나를 내보내려는 의도를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걱정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백 프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천천히 방문을 닫으며, 그 사이로 리셀이 가벼운 눈인사를 보내오는 것을 보았다.

문을 닫고 나니 그제야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만약에 잘못돼서 리셀이 죽기라도 하면… 클레어를 무슨 낯으로 봐야 하는 걸까. 하다못해 그 애가 있을 때 얘기할 걸 그랬나.

일순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차올랐지만 거세게 고개를 내저어 머릿속에서 떨쳐내고자 애썼다.

이미 리셀이 결정한 사항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리셀과 율렌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

나는 리셀의 방문 앞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앉아 다리를 감쌌다.

지나가는 사용인도 많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오래 있다가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도 없을 테지.

비록 율렌이 마력을 사용하면서 결계를 함께 펼쳐 밖으로 새어 나오는 기색은 전무했으나 그래도 이곳에 시선을 집중되게 만들면 곤란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자리에서 벗어났다.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으로 걸어 방에 도착해 그 이후로는 계속 소파에 앉아 시계만을 들여다보았다.

일 분이 이렇게 길었나. 내가 방에 들어선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체감으로는 벌써 한 시간은 족히 넘은 듯이 느껴졌다.

큰 병으로 수술실에 들어간 환자를 기다리는 보호자의 가족이라도 된 듯, 초조함에 손가락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연신 두드려댈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어떻게 됐어!”

나는 율렌이 갑작스럽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온 것에 놀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율렌은 그런 나를 보고 일순 당황한 듯 눈을 둥글게 떴다가 씩 미소 지었다.

우아해 보이는 얼굴과 상반되게 천진해 보이는 미소였다.

“내가 누구야, 성공했지.”

“아… 진짜 다행이다.”

그 확답을 듣고 나니 긴장이 풀려 나도 모르게 소파에 털썩 주저앉듯 몸을 기댔다.

“리셀은? 어때?”

“재워뒀어. 몸은 완벽히 회복됐지만 정신적 타격까지는 어떻게 못 해주니까 차라리 수면을 통해 그때의 기억을 완화해주는 게 나아.”

마력 회로도 복구시켜주고 꿈을 조종해 멘탈 테라피까지 해주다니. 애프터 서비스가 좋구나.

긴장이 풀리니 술술 실없는 생각도 밀려들었다.

“그 고통을 견디고도 살아남은 인간이니 어지간히 독종이다 싶었지만 상상 이상이었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참, 근데 왜 그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한동안 드래곤으로 있는 게 낫다는 데는 너도 동의했으면서. 많이 불편해?”

“아무래도 혼자 날아다니니까 마주치는 애마다 자꾸 놀라길래 변한 건데, 이래도 반응은 비슷하더라.”

율렌은 머쓱하게 말하며 다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다.

“역시 너랑 같이 다니는 게 낫겠어.”

아직은 저택의 모두가 율렌에게 적응하지 못해 그런 반응이었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그래도 이로써 클레어와 리셀의 문제만큼은 완전히 해결했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직은 시기상조지만 약간 기대되기도 했다. 리셀이 다시 마탑으로 복귀해 승승장구할 나날도. 클레어가 다른 꿈을 찾아갈 미래도.

‘이제 온전히 황제를 끌어내리는 것에만 집중하면 돼.’

그 과정에는 로베르 공작에 대한 처분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 * *

아르반은 여느 때처럼 늦은 밤에도 홀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곳이었지만 늘 그렇듯 빠르게 정리되었으니, 다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시시때때로 시달렸던 암살 시도였기에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큰 위험이 되지도 않는다. 그저 번거롭고 귀찮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 자세로 몇 시간 동안 서류를 읽어 내리고 펜을 들어 올리기를 반복하던 그는 환기를 위해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새어드는 부엉이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깜깜한 밤하늘, 오늘따라 유독 밝게 빛나는 듯한 달을 눈에 담으며 아르반은 며칠 전 파투가 난 리엘리의 약혼식을 회상했다.

초반까지만 해도 불쾌함을 어떻게든 참은 기억이 전부였다.

그러나 리엘리가 율렌의 존재를 알리고 자신이 황제와 마주했던 순간,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다잡는 황제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추하고 저열해 보였지만 그런 모습을 시야에 담고 있던 아르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아주 잠시뿐이었다지만.

기뻤던 것도, 복수를 달성했다는 쾌감도 아닌, 그저 조소였다.

그런 황제의 앞에서 아르반은 조금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탑주가 찾아왔었지.’

그리 포섭하려들 때는 자신과 세이오넬 공작 모두의 연락을 무시하더니, 드래곤의 등장으로 그의 태도는 판이해졌다.

스스로 아르반을 찾아와 자발적으로 그의 수족이 될 준비가 됐다고 말하던 남자.

사실 이유야 어찌 됐든 좋았다. 마탑주가 배신하지 않고 함께한다는 보장만 따른다면.

아르반은 단번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국쯤은 간단히 밀어버릴 수 있는 무력을 지닌 마탑이다. 그만한 힘을 가졌기에 세이오넬 공작과 아르반 역시 계속해서 그를 포섭하려 했던 것이고.

그런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마탑의 주인이지만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조차 없고 자율 의지가 강한 자였다.

오직 마법에만 미쳐있는 남자.

오히려 그런 자였기에 드래곤 율렌의 존재는 그자를 아르반에게 묶어두는 강력한 사슬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자의 마법에 대한 집착만큼은 믿을 수 있지.’

그러니 아르반이 율렌의 주인인 이상 마탑주는 그들을 배신하지 않을 터였다.

‘이제 신전 쪽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건가.’

아르반은 생각에 잠기며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방문을 응시했다.

조금 전부터 집무실 너머 복도에서 조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이리 당당히 집무실 앞까지 걸음 할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답신이 왔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지 않은 채 그에게 다가와 편지를 내밀었다.

“각하, 신전 측에서 보내온 답신입니다.”

“수고했다.”

아르반이 편지를 받아들자 고개를 푹 숙여 보인 남자는 조용히 문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인장도 찍혀있지 않은, 그저 회색 왁스로 밀봉된 봉투.

잠시 편지를 내려다보던 아르반은 망설임 없이 봉투를 뜯어내고는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용을 모두 확인한 그는 벽난로로 다가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 편지를 던져넣었다.

리엘리의 약혼식 이후, 아르반은 은밀히 신전 측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가 성검의 새로운 주인이란 사실이 알려지고 신전은 그에게 큰 호의와 신뢰를 보였다.

아르반은 그 신뢰를 이용해 신전에 은밀한 극비를 전달했다.

바로 로베르 공작과 현 황제 그리고 황태자가 흑마법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그 정보를 전달받은 신전 측은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르반은 그들에게 성물을 이용해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지 조사해달라 부탁했고, 신전은 마지못해 그의 말을 따랐다.

신빙성이 떨어진다 생각했지만 성검의 주인이 아르반의 이야기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반은 로베르 공작저를 포함하여 리엘리가 수도를 돌아다니며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고 전해 받은 가문들의 목록을 모두 신전 측에 전달했다.

무턱대고 황궁 검문을 통과해 성물을 들고 확인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그렇게 신뢰를 얻는 게 더 나으리라 판단했고, 그 결과 다이에나 대신관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르반이 짚어준 모든 곳에서 검은 마력의 기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황궁에 대한 조사 역시 은밀히 진행할 예정이란 것도.

‘완전한 신뢰를 얻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군.’

신전 측에서 황제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현 황제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아르반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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