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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47화 (147/153)

147화.

‘뭐, 뭐야.’

일순 이베론의 눈동자에 일순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목격한 리엘리는 본능적으로 두어 걸음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런 느낌을 이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로즈니에게서.

‘뭔가에 돌아버린 사람의 눈빛이야.’

저런 눈을 한 사람의 곁에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

그러나 이베론 역시 두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옴으로써 거리는 다시 좁혀졌다.

이베론은 리엘리가 자리를 피하기도 전에 돌발행동을 했다.

그는 리엘리의 앞에 무릎 꿇고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살짝 고개를 수그렸다.

신하가 주인에게 올릴 법한 행동이었다.

정확하게는 리엘리의 어깨에 앉은 율렌에게 올리는 공경의 표시였다.

“살아생전 드래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또한 문헌에만 나와 있던 위대한 드래곤의 능력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였던 제 과거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리엘리는 한참 율렌의 위대함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댔다.

장본인인 율렌은 그다지 감흥 있는 표정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혼자 심취하기라도 했는지 시종일관 감동에 젖은 표정이었다.

그런 이베론을 보며 리엘리는 작게 미소 지었다.

마탑주라는 시점에서 평범한 성격일 것이란 생각은 애초에 버린 지 오래였다.

오히려 본래 성격이 오만하고 고고하며 제가 인정하지 않은 것에서는 부러질지언정 수그리지 않는 점을 조사원을 통해 보고 받았을 때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한 성정으로 인해 여태 황실과 대립해 왔던 것이기에.

황실과 척을 지면서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세이오넬 공작과도 결탁하지 않던 마탑주.

제국을 이루는 주요 인물 중 최우선 순위로 포섭해야 할 자가 바로 이베론 그리프트였다.

아르반 역시 수차례 그를 포섭하고자 만남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었다고 했다.

‘그런 자를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지금 저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율렌을 미끼로 마탑주를 끌어들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말을 꺼내기는 좀 그러니 아르반에게 마탑주와 다시 만나보라고 해야겠다.’

리엘리는 손을 뻗어 율렌의 머리께를 쓰다듬었다.

“뭐야.”

투덜대면서도 그 손길에 머리를 맡기는 율렌이 이 순간만큼은 더 예쁘게만 보였다.

‘아이구, 우리 복덩이.’

생각해보니 성검을 찾아 나서서 율렌을 만난 것부터 지금까지 녀석 덕에 고난을 헤쳐온 경우가 참 많았다.

리엘리는 솟아나는 애정을 듬뿍 담아 녀석을 쓱쓱 쓰다듬었고, 그 손길이 반복되자 더는 못 참겠는지 폴짝 뛰어오른 율렌이 리엘리의 머리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너 지금 어딜 올라와!”

“흥, 그러니까 적당히 만지라고.”

“머리 망가지니까 빨리 내려와!”

리엘리가 질색하면서도 혹시나 율렌의 발톱과 머리칼이 엉킬까 조심하며 녀석을 떼어냈다.

“안 쓰다듬을게. 미안해.”

“…그래.”

리엘리와 율렌의 대화를 모두 관찰하던 이베론의 눈이 반짝였다.

‘드래곤께서는 공녀를 상당히 아끼고 관대하게 대하고 계시군.’

지금도 본래 주인 되는 대공이 아닌 공녀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인다.

더구나 카넬로웰 대공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연인 관계.

이미 라이셀 샤루스와의 약혼 소식이 퍼지기 전에도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이베론은 조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라이셀 샤루스가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럼 정당한 계승권자인 아르반 카넬로웰이 황태자의 자리에 서게 될 테고, 상대는 바뀌긴 했지만 본래 그 연인인 리엘리 로베르가 예정처럼 황태자비가 되겠지.

일단 드래곤의 주인은 카넬로웰 대공이니 그쪽과의 관계를 다시 쌓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리엘리 공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드래곤과 가까워지기 좋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이베론은 환히 미소 지으며 드래곤과 옥신각신하고 있는 공녀에게 말했다.

“공녀, 앞으로 자주 마주했으면 좋겠군요. 물론 율렌님도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드래곤을 모시고 마탑으로 향해 마법에 관한 토론을 벌이고 진행 중인 실험을 도와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안면을 익힌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살펴 가시길.”

리엘리는 율렌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과 달리 재빨리 퇴장하는 이베론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잡지는 않았다.

이베론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율렌을 돌아보다가 이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연회장으로 사라졌다.

* * *

아르반과 미리 말을 맞춘 대로, 율렌은 저택으로 돌아갈 때도 나를 따라왔다.

황제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마당에 나 혼자 있는 것은 너무 위험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당당히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율렌은 내 어깨에 자리를 잡고 기분 좋은 듯 꼬리를 살랑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시선이 부담스럽네.’

드래곤이라는 환상 속 생물을 어깨에 얹고 있으니 아무렴 누군들 쳐다보지 않겠냐마는.

돌아오는 마차에 몸을 싣기까지 귀족은 물론 궁 안의 모든 사용인 또한 거의 넋을 놓고 나를 바라봤기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드래곤, 율렌의 존재를 더욱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소문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렇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율렌을 굳이 어깨에 얹고 다니며 홍보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되겠지….”

진이 빠진다.

내가 마차 등받이에 힘없이 늘어지며 중얼거리자 율렌이 성의 없이 내 허벅지를 토닥여왔다.

아몬 또한 질세라 나의 안색을 살피며 조곤조곤 응원했다.

“기운 내세요, 누나.”

“고마워, 아몬.”

황궁으로 향할 때는 따로였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아몬과 같은 마차를 탔다.

아침에 부쩍 울적해 보이는 아이의 표정이 아까와는 달리 비교적 편안해 보여 다행이다 싶었다.

공작가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야말로 연회장에서와 같은 반응의 연속이었다.

약혼식이 중간에 파했다는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한 저택의 사용인들은 나와 함께 귀가한 율렌을 보고 까무러쳤다.

천만다행으로 나를 대신해 상황을 설명해줄 에바와 세바니가 있었기에 나는 옷을 갈아있고 쉴 수 있었다.

“아.”

그러다 이제껏 잊고 있었던 한 사람을 떠올린 나는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냉큼 율렌을 집어 들며 서둘러 클레어의 방을 향해 발을 뗐다.

“뭐야, 왜 이래!!”

“클레어 치료해줘야지!”

“아….”

황당하다는 듯이 외치는 율렌에게 다급히 답하고는 클레어의 방문을 두드렸다.

“클레어, 나야 리엘리.”

“…아가씨?”

클레어는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문을 열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냥 부르시지.”

“마음이 급해서. 잠깐 들어가도 될까?”

“아, 네.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차를 내어오겠다는 클레어의 말을 거절하고는 간결하게 율렌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떠름하게 반응하던 클레어는 곧 떨리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작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 눈을 고칠 수 있다는 말씀이, 맞나요?”

“…응, 맞아. 여태 말 못 해서 미안해.”

“아니, 아니에요. 전에 제 눈을 고쳐주신다고 말씀해주셨었는데… 믿지 못해 죄송해요.”

클레어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푹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클레어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고 토닥여 주었다.

“저, 가능하다면 오빠가 있는 곳에서 치료받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하자.”

클레어가 편한 쪽으로 배려해 주는 게 맞다.

나는 율렌과 클레어를 데리고 리셀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 시간을 넘긴 늦은 오후였기에 다행히도 그는 어디 가지 않고 제 방에 있었다.

“아가씨? 클레어?”

그는 이런 시간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우리로 인해 다소 놀란 듯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에는 눈을 크게 뜨며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저, 정말 클레어의 눈이 회복 가능합니까?!”

“응. 리셀도 얘기는 들었지? 이쪽은 율렌이고, 율렌이 가진 신성력이면 완치가 가능해.”

“정말 감사… 감사합니다.”

“아냐, 내가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모든 일의 원흉이 로베르 공작이니, 내가 수습하는 게 맞기도 하고.

리셀은 클레어보다 더욱 떨리는 음성으로 감사를 표했다.

“율렌, 부탁할게.”

“그래.”

더 시간 끌어 뭐하겠는가. 남매 속만 타지.

내 부탁에 율렌은 곧장 클레어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신성한 하얀빛 무리가 클레어를 감싼 직후, 클레어는 바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끌어 내렸다.

“아….”

클레어가 나직이 탄식했다.

곧장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내리감긴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서서히 눈을 뜨고, 그 보랏빛 눈동자에 우리의 모습이 비쳤을 때, 리셀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클레어를 와락 끌어안으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런 리셀의 어깨에 기대며, 클레어는 그간의 설움을 다 털어낼 듯한 기세로 굵은 눈물을 떨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눈치껏 빠져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는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 녀석의 마력 회로 복구에 관해서도 얘기하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맞아. 근데 그런 분위기에서 말을 꺼내기도 좀 그래서… 내일 다시 찾아가 보자.”

그리고 클레어가 없을 때 얘기를 꺼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어의 눈이야 아무 부작용 없이 신성력만 퍼부으면 고칠 수 있다지만 리셀의 마력 회로를 복구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 충격에 죽을 수도 있으니.

‘그래도 그 선택지는 온전히 리셀만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가 평생을 바쳤던 일이었으니, 목숨을 걸고서라도 복구에 도전할 생각이 있다면 그 의사를 따르는 게 옳았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셀과 클레어가 나란히 내 방문을 두드려왔다.

둘 다 겸연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와 율렌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는 물러갔다.

그리 말하는 두 사람의 얼굴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았기에 보는 나로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다시 한번 율렌과 함께 리셀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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