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황태자, 라이셀 샤루스와 리엘리 로베르 공녀는 앞으로.”
이에 황태자가 리엘리의 손을 잡고 황제의 앞에 섰다.
“유서 깊은 로베르 가문과 황실의 결합은 제국의 앞날에 있어 큰 복이오.”
이런. 잡말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이었나.
못마땅함에 슬쩍 황제를 쳐다본 리엘리는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잠시 몸을 굳혔다.
황제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또한 약속과 더불어 축하할 일이 있소.”
리엘리는 바로 지금이 황제가 미리 말했던 때라는 걸 알았다.
‘율렌을 공개하란 거지.’
“지금인 것 같아.”
리엘리가 중얼거리자 그녀의 어깨에서 함께 황제를 노려보던 율렌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알고 있어. 어차피 저놈들에게 엿 먹이려고 참는 거지만 그래도 저딴 놈의 명을 듣는다는 건 참 기분 더럽네.”
바로 코앞에서 황제와 황태자를 욕하는 율렌의 말에 리엘리는 반사적으로 둘을 번갈아 살폈다.
하지만 둘 다 율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미동이 없었다.
“……!”
“세상에!!”
“저, 저건 설마!”
이윽고, 율렌이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자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주변의 모든 귀족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율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몸집을 키운 상태로 날개를 폈다. 그리고 작은 돌풍을 일으키며 황제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황태자와 황제의 잘 정돈되었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평소 녀석이 이렇게 풍압을 일으키지 않고도 충분히 날아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리엘리는 율렌이 일부러 작은 심술을 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그녀의 길게 풀어진 머리칼은 바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황제와 황태자에 대한 일종의 조롱일 터였다.
리엘리는 픽, 하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율렌의 의도를 눈치챈 사람은 리엘리뿐이었다.
곧이어 귀족들의 새된 비명이 귀를 파고들었다. 살면서 드래곤을 볼 수 있으리란 생각도 못 해본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다만 황제와 황태자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덩달아 놀라지 않고, 간절히 원하던 물건을 드디어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사람처럼 욕망에 부풀어 있었다.
‘더러운 놈들.’
리엘리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체통 없이 고개를 꺾어 홀린 듯 율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둘을 노려봤다.
‘희열에 가득 찬 얼굴도 잠시뿐이야.’
이 수 초간의 행복을 어디 마음껏 음미해보라지.
리엘리는 속으로 그 두 사람을 조롱하고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제법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율렌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주인에게 반드시 돌아오는 전서구처럼 자연스레 제 팔뚝에 발을 걸치고 앉은 율렌을 데리고 몸을 약간 틀어 섰다.
그러자 황제가 기다렸다는 양 입을 열었다.
“리엘리 로베르 공녀는 400년 만에 나타난 새로운 드래곤의 주인이오. 이는 우리 샤루스 제국의 무궁한 영광과 더불어 여신의 사랑 역시 변치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지.”
“실버 드래곤….”
단상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신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리엘리는 신관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대신관을 상징하는 의상을 입고 있었다.
대신관씩이나 되는 분이니 실버 드래곤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을 터였다.
유일하게 신성력을 품고 있기에 그 비늘이 은빛이라는 걸.
그러니 저리 멍청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제가 데리고 있는 드래곤입니다.”
리엘리는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고 귀족들을 향해 선언했다.
“그러나, 한가지 정정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공녀.”
뜬금없이 예정에 없던 돌발행동을 하는 리엘리의 손목을 잡아챈 황태자가 경고하듯 그녀를 불렀다.
리엘리는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봤다.
라이셀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듯 눈살을 찌푸린 채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나 작은 코웃음과 함께 그 손을 세게 뿌리친 리엘리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폭탄 발언을 던졌다.
“저는 이 드래곤의 주인이 아닙니다. 다만 드래곤의 주인 되는 분과 아주 긴밀한 사이고, 드래곤 역시 제게 호의적이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 함께 생활하고 있을 뿐이죠.”
그러자 단상 가까운 곳에서 리엘리가 황태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는 것을 보고 동요하던 귀족들의 주의가 단번에 집중됐다.
리엘리는 그들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말을 이었다.
“드래곤, 율렌의 주인이자 성검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초대 샤루스 황제의 후손뿐입니다.”
모두가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가운데, 율렌이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느새 단상으로 오른 녀석은 대공으로서 상석에 앉은 아르반의 어깨에 안정적으로 착지하며 만족스러운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바로 여기 계시는 아르반 카넬로웰 대공 각하께서 드래곤 율렌의 주인이자 성검의 선택을 받은 분이십니다.”
리엘리는 로베르 공작과 아몬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아몬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른 귀족들처럼 넋을 놓고 있었고, 공작 역시 큰 충격을 받은 양 작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비록 아르반이 성검을 꺼내 들어 높이 치켜드는 식의 쇼맨십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검집부터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성검은 그의 허리춤에서도 충분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럼 저게 그 성검….”
귀족들의 감탄사를 배경음 삼아 황제와 마주 선 아르반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성검의 선택을 받아 드래곤 율렌의 주인이 되었으니, 법률에 따라주실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황제와 아르반의 시선이 부딪혔다.
아르반은 넘실대는 분노가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황제의 푸른 눈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쩌면 그는 생각보다도 더 많이, 이 순간을 바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분노와 적의로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을 직시하며 조롱할 수 있는 순간을.
“초대 샤루스 황제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검의 소유주인 제가 황위 계승서열 1순위에 오름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충격적인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황제와 아르반의 숨 막히는 대치를 차치하더라도 귀족들은 시시각각 급변하는 현 상황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하고 있었다.
성검의 소유주가 계승서열 1순위로 등극한다는 법률이 존재했는지를 알고 있는 자도 거의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곧 혼란에 빠졌던 귀족들은 작게 귓속말을 나누며 아르반 카넬로웰의 주장이 옳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모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법전을 살피면 사실 여부가 파악될 얄팍한 거짓말을 이런 자리에서 던질 이유가 없다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본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제 연인이 다른 이와 약혼하는 것을 막고자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연인이라….”
황제는 기가 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르반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예. 연인이 황명으로 황태자 전하와 약혼을 거행하게 되어 좌절하는데 그사이 공교롭게도 제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지요.”
아르반은 이제 분노를 삭이기 위해 이마에 핏대가 선 황제를 응시하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본래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황제를 치기에는 이런 식의 드러내기식 도발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약혼식을 거행하고 후일을 도모하기에는 리엘리의 안전이 걸리는 바가 많았다.
항시 율렌이 함께할 테지만 정식으로 황태자의 약혼녀가 된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황궁에 잡혀있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물론 사적인 감정 역시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라이셀 샤루스 황자의 지위 변동에 따라, 황태자비의 자리가 약속된 리엘리 로베르와의 약혼은 이후로 미루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르반은 말이 없는 황제에게 약혼식을 이대로 파할 것을 제안했다.
황제는 오직 시선만으로도 아르반을 찢어 죽일 수 있을 듯이 날카롭게 노려봤지만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좋겠군. 오늘 예정되었던 약혼식은 보류하고 아르반 카넬로웰 대공에 대한 계승권은 논의를 걸쳐 발표하도록 하지.”
황제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서슬 퍼런 황제의 기색에 기겁한 귀족들 또한 황급히 몸을 물렸다.
단상에는 아르반과 리엘리, 그리고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의 황태자, 아니 라이셀만이 남았다.
그러나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라이셀 역시 입술을 꽉 깨물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버리자 아르반과 리엘리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하나둘씩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나 아르반보다 비교적 말을 걸기 편한 리엘리 쪽으로 많이 몰렸기에 아르반은 율렌을 그녀에게 보내 만약을 대비하게 했다.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리엘리에 관해서는 과하다 할 만큼 신경을 기울여야만 아르반의 마음이 편했다.
드래곤인 율렌이 리엘리의 어깨에 자리를 잡자 더욱 호기심을 드러내는 귀족들을 그가 눈을 샐쭉하니 뜨고 바라봤다.
그러자 새끼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리엘리 로베르 공녀.”
사람들이 주춤거리는 그 잠깐 사이에 한 남자가 파고들었다.
마탑주, 이벨론 그리프트였다.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리엘리는 자신과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그가 다짜고짜 던진 제안에도 불쾌한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도 자신도 서로가 누군지 알고 있는 마당에 불필요한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마 이벨론이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말을 붙였는지 모른다면 좀 더 경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유가 매우 명백해 보였기에 꺼릴 것도 없었다.
말로는 자신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서도 그 시선은 율렌에게 가서 박혀있으니, 그 의도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겠는가.
리엘리는 발코니에서 그와 마주한 채 섰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벨론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당황한 리엘리가 그를 일으키기 위해 한걸음 가까이 다가갔지만, 곧 이어지는 이벨론의 목소리에 뻗었던 손을 도로 거두어 들였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주제넘은 부탁이겠지만 부디 한 번만 마력 스캔을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여전히 리엘리가 아닌 율렌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베론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흥, 마음대로 해.”
율렌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성의 없게 꼬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 이베론은 율렌이 무슨 하늘에서 내린 구원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고도 절박하게 꼬리에 손을 댔다.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는 듯하던 이베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리엘리는 순간 놀라 살짝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