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 *
내일이 약혼식이기 때문에 미리 입궁해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내일 마주할 텐데 오늘 부르는 이야기가 뭐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래도 황제가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나는 작게 안도했다.
여태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기에 율렌의 존재를 약혼식에서 내보일 생각이 아닌 건가 고민했던 시간이 아까웠다.
“폐하, 리엘리 로베르 공녀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여라.”
나는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황제의 의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율렌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부른 것 같은데.’
굳이 하루 전에 부른 건 쓸데없는 머리 굴리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공녀. 이쪽으로 앉게.”
“예.”
처음 마주하는 황제는 황태자와는 전혀 다른 생김을 취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
차라리 아르반과 더 닮은 외모였다.
‘그렇다고 이목구비가 닮은 건 아니지만.’
이미지가 그랬다.
“서로 바쁠 테니 본론만 말하지. 내가 공녀를 부른 이유. 그리고 굳이 블란드와 라이셀을 파혼시킨 이유가 뭔지 생각해봤다면 아마 짐작하고 있겠지.”
“…….”
“드래곤.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정정한다. 이자는 아르반과 전혀 닮지 않았다.
이런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보고 그를 떠올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말하지 않으마. 드래곤을 약혼식에서 선보일 생각이야. 회장 안의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갈 이야기가 더욱더 극적이려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게 좋겠군.”
황제는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제 계획에 대해 줄줄 읊어댔다.
그러나 딱히 상관없었다.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보이되, 속내가 읽히지 않게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기대하도록 하지.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협박이로군.
그래도 주체적으로 명을 따르지 않으면 따를 불이익에 대해 읊어주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내 순순한 대답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예, 폐하.”
“이만 물러가도 좋다.”
나는 내일까지 내가 생활하게 될 궁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황궁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대단히 실망시켜드릴 예정이니 기대하시길.’
* * *
벌써 오늘이던가.
아르반 카넬로웰은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불빛에 눈을 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황태자와 엘리의 약혼식.’
약혼식. 그래, 빌어먹을 약혼식.
아르반은 어제 잠이 들기 직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단어를 곱씹으며 성마른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저 형식뿐인 약혼식이었다.
비록 성대하고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하나 리엘리와 아르반은 오늘 약혼식의 끝에 있을 파국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르반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리엘리의 약혼식이라는 사실만으로 복장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요 한 달간 그에게 보내왔던 암살자들과 수많은 정치 공작들보다도 거슬렸다.
‘오늘은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군.’
아르반은 가볍게 혀를 찼다.
오늘 같은 날에 암살자라도 있었다면 분풀이라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사뭇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는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쯤 흐른 시각, 황궁에서는 리엘리 로베르가 기상하여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안 씻어?”
“이거 먼저 마시고.”
리엘리는 제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율렌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다시 커피를 들어 올렸다.
약혼식이라고 하지만 그 말로를 알고 있기에 떨린다거나 다른 심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황태자와 황제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는 것을 제외한다면.
“쌍둥이들이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고 있어.”
“…그래?”
시계를 확인한 리엘리는 작게 혀를 찼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었나.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도착 시각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사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약혼식에 늦을 수는 없었다.
황실 사람들의 눈에야 어떻게 비쳐도 상관없었으나 다른 귀족들에게 그렇게 몰상식하고 개념 없는 이로 낙인찍히면 매우 곤란했다.
조금 남은 커피를 모조리 입에 털어 넣은 리엘리는 본격적으로 약혼식 준비에 돌입했다.
“너무 화려하지 않게 해 줘.”
“네, 아가씨.”
진짜 약혼할 것도 아니고, 체면이 깎일 정도만 아니면 되겠지.
심드렁히 생각한 리엘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시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어제 황궁에 입궁하기 전, 나를 배웅하던 아몬의 얼굴에 떠올랐던 걱정과 우울함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런 얼굴을 하니까 마음 아프긴 한데….’
좀 더 달래주고 왔어야 했나.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좀처럼 표정이 펴지지 않는 아몬을 뒤로하고 왔던 게 후회가 됐다.
조금 있다 연회장에서 마주할 아이의 얼굴은 어제와 같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준비를 마친 나는 그대로 약혼식이 치러질 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두 놈의 얼굴이 일그러질 걸 생각하니 벌써 설레는 기분이야.”
“그건 그러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황제와 황태자.
둘에게 엿 먹일 생각만 놓고 보면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율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거의 도착해 있었다.
“황태자가 네 마중을 나와 있군.”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거겠지.”
어떻게든 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니.
그러나 알고 있음에도 역시 불쾌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차가 멈춰서며 문을 열고 마주한 이가 황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물며 그와 세트로 맞춘 의상을 입고 함께 입장해야 한다니 더더욱 역겨울 따름이었다.
웃음기는커녕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을 리엘리와는 달리 만면에 미소를 띤 황태자가 손을 내밀었다.
정원에 나와 있는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리엘리는 저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상상을 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개 올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참아야지.’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피한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 인간인데 피해야만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상황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리엘리는 제 손을 꽉 잡고 천천히 입을 맞추는 황태자의 행동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려 애를 썼다.
손등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다.
레이스로 된 얇은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그 감각은 맨손과 같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환영해. 오늘도 그 아름다운 미모는 여전하군, 리엘리.”
“…저희는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니오니 호칭을 정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하.”
예의 바르게 지적했지만, 아직 너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말란 뜻에 불과했다.
황태자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불쾌한 내색 없이 웃는 낯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런, 무례를 범했군. 조금 있으면 아주 각별하고 긴밀한 사이가 될 예정이니 미리 입에 익혀두려 한 것뿐이네. 이해하겠지? 리엘리 공녀.”
“…물론이죠.”
리엘리는 정원에서 회장으로 향하며 황태자와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임에도 벌써 집에 가고 싶어졌다.
싫어하는 사람과 말을 섞는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재수 없는 새끼. 저렇게 웃는 것도 잠깐이지.”
“푸… 크흠!”
리엘리는 제 귀에만 들려오는 율렌의 불평을 듣고 순간 터질 뻔한 웃음을 헛기침으로 가렸다.
그리고 회장을 둘러보다 익숙하지만,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아몬과 공작이 나란히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것이다.
물론 약혼녀의 가족이니 모두 참석하는 게 맞지만, 아몬과 로베르 공작의 조합은 마치 수채화와 유화처럼 썩 어울리지 않았다.
리엘리는 잠시 황태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딘가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작과 그 옆에서 리엘리를 바라보는 아몬에게 다가갔다.
공작은 그녀에게 짧게 시선을 주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리엘리 또한 그에게 다른 말을 붙일 생각이 없었기에 그저 아몬의 상태를 확인하기만 했다.
아몬은 표정을 신경 쓰고 있는지 어제보다 얼굴은 좋아 보였지만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뚜렷했다.
리엘리가 그런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자 처음 보는 남자가 보였다.
붉은 머리와 대조되는 파란 눈동자의 남자는 제 옆에서 뭐라 말을 붙이는 사람을 완전히 무시한 채 리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황태자를 보고 있어.’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는데 이놈의 황태자는 저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리엘리는 다시금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남자의 옆에서 떠들고 있는 샛노란 머리칼에 같은 색 눈동자의 남자를 보고 리엘리는 확신했다.
“저놈이 마탑주라는 놈인가 본데.”
율렌의 대답에 속으로만 긍정한 리엘리는 마탑주에게 살포시 웃어 보이고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쟤 계속 이쪽 본다.”
알고 있었다.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으니.
다만 그가 왜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지 모르겠어 작게 미간을 좁혔다.
그런 리엘리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율렌이 한마디 했다.
“저 옆에 있는 놈 말을 들어보니까 황실의 압박 때문에 억지로 자리에 참석한 모양이야.”
아하. 그제야 저리 죽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는 게 이해가 됐다.
‘마탑에 압력을 넣는 건 황제로서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벤트를 크게 부풀리고 싶다는 거겠지.
“자, 리엘리 공녀.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아끼는 이들입니다.”
황태자는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모여든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미안해, 아몬. 조금 이따가 보자.”
“…네, 누님.”
리엘리는 아몬을 뒤로 한 채 순순히 그 손길에 이끌려가 주었다.
조금 전까지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리 공들인 약혼식에 초를 칠 생각을 하니 또 못 참아 줄 것도 없다 싶었다.
‘아냐, 본격적으로 어울려줄까.’
그래야 뒤통수를 맞았을 때 배는 더 얼얼할 테니.
“반갑습니다. 리엘리 로베르예요.”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소문대로 굉장한 미인이시군요.”
“공녀, 이쪽은-.”
소개를 받으며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이미 황태자에게 줄을 댄 귀족들의 명단이야 작성되어 있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그중에서도 주의할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제게 인사하는 이들 중 블란드 후작이 섞여 있단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진력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거래의 일환이라지만 그래도 제 딸이 파혼당한 마당인데 저리 뻔뻔하게 약혼식에 참석하다니, 참 어지간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모든 초대객이 연회장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연회의 주인공은 리엘리와 황태자였지만 이곳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입장하는 이는 황제였다.
그 입장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고개를 드시오.”
리엘리는 단상에 올라선 황제의 명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아르반이 자리 잡은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그도 리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리엘리 역시도 답하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전과 같이 장황하고도 지루한 황제의 축사가 이뤄지는 동안 황태자는 리엘리의 팔을 잡고 단상 앞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당장 이 상황 자체는 도망가고 싶을 만큼 싫었지만, 그 뒤에 있을 황태자와 황제의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하며 참아냈다.
그리고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무렵, 황제가 그녀와 황태자를 호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