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제정신인 건가.
프리실라는 가늘게 눈가를 접으며 공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리엘리 공녀가 설핏 웃어 보였다.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황태자가 영애와 파혼하고 저와 약혼하는 이유, 혹시 알고 계시나요.”
“…아뇨. 모릅니다. 저는 그저 통보받았을 뿐이에요.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사족은 붙이지 않아도 됐을 말인데.
프리실라는 충동에 덧붙인 한마디를 후회했다. 아버지에 대한 악감정이 극에 달했기에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버렸다.
“후작께서 영애께 통보했었군요.”
리엘리는 분노를 삼키지 못하는 프리실라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율렌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하고자 던진 질문인데, 뜻밖의 감정을 엿보게 되었다.
프리실라 블란드는 단순히 제 아비인 후작과 데면데면하거나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블란드 후작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자식을 존중하기는커녕 제가 조정하는 인형처럼 마음대로 취급하고 중요한 사항조차 설명해주지 않는 무정한 아비였다.
아무리 아버지라 한들, 그런 사실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 리가.
“영애, 황제가 저와 황태자를 결혼시키려는 이유는 단순해요. 제게 드래곤 친구가 있기 때문이죠.”
프리실라 블란드가 율렌에 대해 퍼트리고 다닐 걱정은 없었다.
그 사실이 일찍 퍼져봐야 나에 대한 옹호 여론만이 형성될 뿐이니까.
‘물론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한해서겠지.’
대다수의 사람은 헛소문 취급할 것이다.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고자 이곳까지 걸음 한 게 아닌데요.”
바로 날카롭게 눈빛을 바꾸는 프리실라처럼.
“거짓이 아닙니다.”
“그래,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는데 거짓말 취급하다니.”
내 대답과 동시에 투명화 마법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율렌이 가볍게 핀잔을 줬다.
“…꺅!”
프리실라는 정말 많이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만 찻잔을 건드렸다.
잔에서 흘러내린 찻물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적시려는데, 율렌이 혀를 끌끌 차며 가벼운 마법을 사용해 잔과 찻물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영애, 진정해요. 해치지 않으니까.”
“이게, 무슨….”
프리실라가 진정하길 잠시 기다려주던 리엘리는 그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판단되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드래곤이에요. 저와 친한 친구죠. 이 친구의 존재를 황제에게 들키는 바람에 영애와 제가 현재와 같은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겁니다.”
프리실라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드래곤이라니, 실존하는지조차 불확실했던 환상 속의 존재였다.
또한, 그제야 납득이 갔다.
드래곤을 보유한 공녀와 일개 후작 영애인 자신.
실상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비단 프리실라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가문의 영애가 온다 해도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으리라.
“황제는 제가 아니라 드래곤을 손에 넣고 싶어 하시죠. 그러나 저는 황태자비가 되기보다는 제 가문을 잇고 싶습니다.”
“황태자비가 되시면 그보다 높은 위치에 서실 수 있을 텐데요.”
“원치 않아요. 저는 제가 원하는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그런 말씀을 제게 하셔도 전 공녀님을 도와드릴 힘이 없어요.”
“도와달란 게 아니에요. 이건 단순히 제가 가진 패를 영애에게 내보인 것일 뿐이죠.”
반역에 관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프리실라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지금 당장은 입 꾹 다물고 다른 제안을 하며 회유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약혼식 날이 되면 만천하가 알게 될 사실이다.
그럴 바에는 제 입으로 먼저 그녀에게 사실을 전하는 편이 낫다.
‘아르반과 내가 본래 연인이라는 것도 사교계에 모르는 이가 없는 일이고, 당일에 율렌을 알리고 아르반이 나서면 모두가 알게 되겠지.’
리엘리 로베르가 황태자와 순순히 약혼할 마음이 없다는 걸.
구구절절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니 일부 사실만이라도 그녀에게 얘기한 것이었다.
“제가 공작위를 찾을 수 있든 어쩔 수 없이 황태자비가 되든 관계없이, 저는 제법 영향력 있는 사람이에요.”
로베르 공작가의 가세와 드래곤. 둘 중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리엘리 로베르 공녀를 무시할 수 있을 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프리실라에게 리엘리가 재차 제안했다.
“프리실라 블란드 영애. 전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어요. 당신이 제 곁에서 일해줬으면 해요. 그리고 제게는 당신을 블란드 후작의 품에서 벗어나게 해드릴 힘이 있죠.”
프리실라와 후작의 관계를 제외하더라도 그녀는 앞으로의 문제에 대해 고민이 깊을 터였다.
‘이곳에서 파혼 딱지가 붙은 영애가 제대로 된 사람과 재혼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니.’
대체로 지위 높은 늙은이의 재취 자리거나 한참이나 낮은 지위를 가진 남자의 아내로 들어가게 되겠지.
안타깝지만 그게 이곳의 현실이었다.
‘그녀가 내게 필요한 것도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쓰이기도 해.’
본래라면 황태자비에서 무사히 황후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을 사람이었다.
‘내게 도움이 될 것도 맞고.’
황후로서 제 역할을 다했던 그녀였으니, 옆에 둔다면 어느 쪽으로든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리엘리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프리실라 블란드는 의아해졌다.
‘대체, 내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블란드 후작가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리엘리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면 돼요. 블란드 후작과는 어차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거든요.”
좋은 관계고 뭐고, 모든 일을 마치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질 운명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프리실라는 곧 입술을 열었다.
“…계약서를 작성해주세요.”
리엘리 공녀가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까닭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공녀를 따라가지 않으면 내 앞날은 없어.’
애석하지만 그랬다.
“얼마든지요.”
리엘리 역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질문은 더 없냐 되묻지 않았다.
* * *
프리실라가 돌아간 이후, 나와 그녀는 드문드문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스스로 움직여 블란드 후작의 수상한 점이나 미심쩍은 부분에 관한 모든 내용을 내게 적어 보내곤 했다.
이제껏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길밖에 없었기에 잠자코 있었던 걸까. 그간 어떻게 조용히 있을 수 있었는지 의아할 만큼, 그녀는 적극적으로 나서고자 했다.
그러니 내가 시키지도 않은 간첩 노릇을 하려는 거겠지.
위험하니까 그만두라고 할까, 하다가 넘겨오는 정보가 블란드 가문의 기밀이라 할만한 건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기밀 사항이 아니라고는 하나 제 가문의 정보를 유출하는 것은 위험이 따랐기에, 그녀의 편지를 내게 전달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 중년 여성이었다.
아마도 프리실라와 긴밀한 관계인 듯해 보이는 그녀는 항상 동이 트기 전에 몰래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간다고 했으니, 프리실라로서도 제 나름대로 조심하는 거겠지 싶었다.
‘이 정도 정보만 넘겨주면 이쪽에서 은밀히 파고들어 더 세부적으로 얽힌 부분과 그 증거들을 확보하면 되고, 만약 사실이 들통난다 해도 크게 질책받지는 않겠지.’
덕분에 블란드 후작의 비리에 대해 좀 더 수월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나눠 가졌다지만, 이러다 내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내가 프리실라, 그녀만큼이나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나.
그렇다면 납득되는 행동이기도 했다.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이들이라면 제 이름과 직인이 찍힌 계약의 이행을 어기고, 그 사실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릴 테니까.
뭐, 어찌 됐든 그녀가 나를 온전히 신뢰하기보다 그런 사실을 기반으로 마음을 놓은 것이라면 오히려 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함부로 아무나 믿었다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게 파다했으니까.
“근데 무슨 좋은 일 있어?”
나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계속 곁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 좀 봐줘.’라고 시위하는 듯한 율렌에게 물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정신 사납게 굴고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건지….
“회복됐어.”
“뭐가… 어. 회복됐다고? 마력이?”
내가 갑작스러운 율렌의 선언에 조금 놀라 되묻자 녀석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완전히 회복됐다고. 이거 봐.”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눈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식겁하여 숨을 크게 들이켰다.
“흡!”
놀란 가슴이 미친 듯이 펌프질하며 날뛰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율렌이라 추정되는 한 남자가 방긋 미소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을 손으로 받치고 허리를 숙이고 있는 자세 탓에 율렌이라 추정되는 남자의 긴 은발이 서류를 가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와 섬세하고 뚜렷한 이목구비.
아무리 봐도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잘생긴 남자를 보았다기보다 상상 속의 아름다운 천사와 실제로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은 인상이었다.
그런 감탄이 내 시선에도 섞여든 모양인지, 남자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봐. 내가 정말 아름다울 거라고 했잖아.”
“…그래. 너 진짜 아름답다.”
이건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새삼스레 눈을 굴렸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율렌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받아들이지 않아 이 잠시간의 침묵마저도 어색하게 다가왔다.
내가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자 율렌이 내 테이블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투덜거렸다.
“뭐야. 좀 더 좋아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반응이 너무 미지근하잖아.”
익숙한 투덜거림이 익숙하지 못한 음성으로 뱉어지니 정말 묘했다.
그런 와중 슬쩍슬쩍 녀석을 관찰하던 나는 녀석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러자 마치 마법에 걸렸다 풀려나기라도 한 듯, 어색한 공기가 겉도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눈동자를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 남자가, 내가 아는 그 드래곤 율렌이 맞다는 걸.
“네가 완전히 회복했다는 증거인데 안 좋아할 리가 없잖아. 놀라서 그랬어.”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불만 가득해 보이는 표정을 거둔 율렌이 설핏 미소 지었다.
드래곤일 때도 느꼈던 바였지만 사람의 모습을 하니 그 평화가 더 극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율렌은 인간으로 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순간에 다시 새끼 드래곤의 형태로 돌아왔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율렌이 테이블 한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한동안은 계속 이 모습으로 지낼 거야. 그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여기서는 돌아다니기도 어렵고 이 모습을 오래 유지해서 이제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거든.”
“들키지 않는 내에서 네 마음대로 해.”
약혼식 전에 율렌이 힘을 회복해서일까, 마음이 좀 더 든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