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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43화 (143/153)

143화.

“율렌.”

어차피 조금 있으면 모두에게 드러날 율렌이었기에 아몬에게는 미리 말해두기로 녀석과 상의 끝에 결정을 내렸다.

“누님? 무… 무슨?!”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크게 동요하는 법이 없는 아몬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서 꼬리를 살랑이던 율렌이 아몬에게 말을 붙였다.

“율렌이다. 엘리의 동생아. 보시다시피 드래곤이지.”

나는 입을 벌리고 흔들리는 눈으로 나와 율렌을 번갈아 바라보는 아몬을 진정시키고자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놀란 마음을 누그러뜨린 아몬을 자리에 앉혀두고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 보이는 세이린에게도 함께 설명해 주었다.

드래곤, 율렌이 나와 함께 있는 이유와 그 주인이 내가 아닌 아르반이라는 것.

그리고 황제에게 율렌의 존재가 노출되어 그로 인해 착각한 황제가 나와 황태자의 약혼을 진행하려 한다는 것까지.

흑마법에 관한 것만 제외하고는 대략 적으로 모두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황제가 정말 누님께서 이… 드래곤이 주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면 파혼시키려 할까요. 누님께서는 드래곤의 존재를 제외하더라도 최고의 신붓감이신데.”

“그럴 거야.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누나가 생각이 있으니까.”

파혼은 중요한 사항도 아니었다.

약혼한 당사자가 죽어버리면 어차피 그 약혼은 파기될 테니.

황태자 역시 흑마법을 사용하는 인간이니, 파혼하지 않더라도 아르반의 손에 처형될 운명에 불과했다.

가까스로 아몬을 달래 방으로 돌려보낸 나는 세이린과 함께 업무로 복귀하며 그녀에게 덧붙여 설명했다.

“그, 세이린. 사실 전에 율렌에 대한 것만 말씀드렸는데….”

나는 그녀에게 흑마법과 관련된 일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공작과 황실, 그리고 세리나의 존재까지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아르반이 황제를 치고 그 자리로 올라갈 생각이란 것도.

내 이야기가 끝나자 세이린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군께서 드디어 가만히 안주하시는 선택에서 벗어나셨군요.”

그리고는 업무용 책상에 착석하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겠죠.”

“그… 렇죠.”

우리는 그렇게 다시 묵묵히 서류에 코를 박았다.

다음날 오전에는 사무엘과 티베온이 불쑥 저택에 찾아와 내가 괜찮은지 여부를 살펴왔다.

이해는 됐다. 아무래도 사무엘은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으니 이게 나에게 얼마나 날벼락 같은 상황인지를 잘 알 테고, 티베온 역시 마찬가지.

그의 도움을 거절하면서까지 평화롭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남기로 한 내가 갑작스레 황태자와 약혼을 한다니, 당황스럽지 않을 턱이 없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줄줄 늘어놓아야 했다.

그럼에도 납득하지 못하는 듯한 티베온을 억지로 돌려보내며, 사무엘에게는 율렌을 통해 살짝 미처 설명하지 못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아마 솔렘으로 떠나기 전까지 계속 걱정하며 들여다볼 것 같아 신경 쓰였지만 별다른 수도 없었기에 그냥 웃는 낯을 일관하며 앵무새같이 같은 말을 반복해야겠지.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로즈니가 찾아왔다.

방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수도에 자자하게 퍼진 나와 황태자의 약혼 때문이었다.

“엘리! 세상에, 엘리! 제가 들은 말들이 전부 사실인가요? 아니죠? 네?”

인사조차 잊은 채 하얗게 탈색된 낯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오며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그러자 로즈니는 갑자기 입을 딱 다물고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음, 황태자랑 약혼… 할 건 맞지만 괜찮아요. 파혼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손에 쥐고 있거든요.”

“…그럼 일단 황태자 전하와 약혼을 하는 건 맞다는 거군요.”

“네, 맞아요.”

로즈니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할지 난감해졌다.

다른 이들한테야 조금씩이나마 비밀에 대해 말해줬다지만 로즈니에게 흑마법에 대해 털어놓는다면 도리어 그녀의 걱정만 가중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로즈니가 현재로서는 말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나중에, 꼭 전부 이야기해줄게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로즈니가 눈매를 접으며 살짝 웃어 보였다.

“제가 알면 곤란해질 이야기인가 보네요. 그럼 말씀해주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할게요.”

그녀는 다과를 권하는 내게 손사래를 치고는 급히 가봐야 한다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일이 있는데 너무 신경이 쓰여 방문했답니다. 실례가 많았어요.”

“실례는요. 그럼 나중에 봐요.”

그리고 로즈니가 돌아간 후, 점심 식사를 마쳤을 때쯤 황실에서 편지를 든 시종이 도착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리엘리 로베르 공녀님께 보내시는 편지입니다.”

황금색의 봉투. 붉은색 실링 왁스에 찍힌 황실의 인장.

공식적인 문서에나 사용하는 것들인데….

나는 편지 칼을 무시한 채 편지의 옆구리를 대충 뜯어 종이를 빼 들었다.

안에 든 내용물이 대충 어떨지를 알아서인지 고작 봉투임에도 예쁘게 뜯어주고 싶지 않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채워진 편지를 요약하면 한 문장으로 일축할 수 있었다.

‘한 달 뒤, 약혼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마 이 한 달이란 시간은 연회를 준비하기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 기간 때문이겠지.

“한 달이라…. 어때 율렌. 한 달이면 네가 다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것 같은데, 솔직히 다 회복되지 않아도 그때가 되면 감히 누가 내게 범접할 수 없을 거야.”

자신만만한 음성과 살랑이는 꼬리로 보아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됐어.”

나는 손안에 든 편지를 구겨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솔렘의 사절단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기 전까지도 내게 찾아와 괜찮으냐 재차 물어댈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사무엘도, 티베온도 그 이후로 달리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마지막 인사로 가벼운 포옹을 할 때, 속삭이듯 작게 물어오는 티베온의 걱정스러운 한마디에는 잠시 멈칫했다.

“비밀 연락책이다. 아몬과 함께도 좋으니, 벗어나고 싶다면 언제라도 연락하렴.”

황태자비가 될 사람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그럼 티베온 자신 역시도 현실을 무시할 리가 없을 텐데도 나와 아몬을 숨겨주겠단 그의 의지에 설핏 웃어 버렸다.

“감사해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멀어져가는 그들의 마차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아마 이게 마지막은 아닐 터였다.

티베온이든, 사무엘이든, 누가 됐든 아르반이 권좌에 오른다면 다시 볼 수 있겠지.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부쳤다.

솔렌의 사절단에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아가씨, 블란드 영애께서 보내셨어요.”

“고마워.”

나는 손에 들린 봉투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무슨 생각인지 내가 보낸 티타임 초대에 수락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다소 놀라웠다.

‘먼저 권한 입장에서 놀라는 건 좀 웃긴가.’

그래도 정말 응하리란 기대가 없었기에 더욱더 놀라웠고, 또 반갑게 느껴졌다.

“사흘 뒤에 중요한 손님이 오실 거야. 잘 준비해줘.”

“네, 아가씨.”

나는 에바와 세바니에게 당부하며 일에 몰두했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이런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이 의외로 참 시간이 잘 흘러간다 싶었다.

어, 하면 점심때고, 또 집중했다 고개를 들면 저녁때였으니까.

사흘이란 시간도 그렇게 금세 돌아왔다.

* * *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베르 공녀님.”

“천만에요. 저야말로 응해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홍차와 함께 테이블 한가득 디저트들이 들어찼다.

“드셔보세요.”

쌍둥이가 내 명에 따라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한 음식들이었다.

프리실라는 잔을 들어 슬쩍 향을 맡더니 한 모금 머금고는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향이 무척 좋네요.”

그럼. 무슨 홍차였는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먼 남쪽 끝자락에서만 재배한다는 귀한 찻잎이었다.

“사실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해주시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조금 의아하네요.”

“블란드 후작 영애를 모시는데 부족하지 않게 준비했을 뿐인걸요.”

“블란드 후작 영애…. 그렇죠. 이제는 정식으로 샤루스의 성을 사용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블란드 후작 영애로 돌아와 버렸네요.”

나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녀를 바라봤다.

원망이라도 하려는 걸까, 싶었는데 그렇다기에는 너무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소식은 들었어요. 황태자 전하와의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비록 미소를 머금은 밝은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리 말하는 프리실라의 낯빛이 오묘했다.

이번에는 분명한 원망이 묻어나고 있었으나, 그 원망의 대상은 내가 아닌듯한 표정.

“…감사합니다.”

제가 본래 갖고 있던 지위를 빼앗아간 이의 초대를 받은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온 걸까.

문득 조금 궁금해졌다.

* * *

프리실라 블란드는 제 앞에서 참으로 무구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리엘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슬슬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보시고자 하셨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본래라면 어떤 자리에서도 상대가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프리실라가 그 연유에 대해 캐묻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리엘리 로베르라는 인물 자체에 큰 악감정이 없다 한들,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불편했다.

황태자비, 나아가 황후가 될 사람.

그 자리가 제 것이 될 수 있단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은 꿈만 같았다.

숨 막히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기회였으니까.

황후가 된다면 아무리 친정이라 한들, 후작인 아버지가 감히 지금처럼 자신을 편한 체스 말처럼 사용할 수는 없어질 터였다.

그렇기에 오직 완벽한 황태자비, 완벽한 황후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던 시간들은 희망이 차올랐던 그 날처럼 단 한 순간에 무너져내렸다.

그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황제의 뜻이라는 이유만으로.

더구나 분노에 치를 떨어야 마땅한 아버지는 너무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걸고 있었다.

그때 프리실라는 알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황후로 내세우는 것보다 더욱 큰 무언가를 보상으로 받기로 했음을.

아버지는 명예욕보다 물욕이 강한 사람이었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 약혼 관계에 얽혀든 모두가 만족스러운 거래를 성사한 모양이었다.

프리실라 블란드, 자신만을 제외하고는.

* * *

리엘리는 본론을 언급하는 프리실라를 보며 그녀와 블란드 후작의 관계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떠올렸다.

비록 급하게 파고들었기에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프리실라와 블란드 후작의 관계의 골이 워낙 깊다는 사실은 꽤 유명했다.

프리실라가 막 사교계에 데뷔했을 무렵, 블란드 후작의 정부 노릇을 하던 한 남작 영애가 그녀의 뺨을 후려친 일은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고도 종종 화두가 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남작 영애가 주제도 모르고 제가 뭐라도 되는 양 프리실라의 앞에서 건방을 떨다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블란드 후작은 딸의 명예를 위해 남작 영애를 벌하는 대신 그 상황을 무마하고 전과 같이 남작 영애를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지.

‘쓰레기 새끼.’

“사실 블란드 영애를 보고자 한 건, 영애. 혹시 나와 손잡을 생각이 없는지 묻고 싶어서요.”

리엘리는 제 뜬금없는 제안에 모욕을 당했다는 듯 표정이 구겨지려는 프리실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 사람이 되어줬으면 해요. 제 손을 잡는다면 블란드 후작과 대적할, 아니, 그보다 더 큰 힘을 실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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