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황제의 폭탄 발언에 회장이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황제의 발언으로 인해 기묘한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이대로 황태자비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법. 이에 황태자 라이셀 샤루스와 리엘리 로베르 공녀가 약혼을 앞두고 있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공식적으로 발표하겠소.”
일순, 회장 모든 귀족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그러나 나는 눈을 부릅뜨고 공작을 찾았다.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율렌이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안이 벙벙한 나는 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 또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는 입장이었으니까.
‘약혼? 저게 무슨 개소리야. 이미 아르반과 내가 연인이라는 건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순간 프리실라가 보내온 의미심장한 편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미리 알고 있었구나. 이혼을 이전에 통보받았을 테니. 그래서 나한테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던 거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시야에 들어온 공작은, 나와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보지 못한 척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하.’
그의 뻔뻔한 태도에서 나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깨달았다.
공작은 사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일언반구 의논도 없이 황태자와 약혼 진행에 동의한 것이다.
나는 황제가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는 동안에도 공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제도 황제지만 공작에게 치미는 분노를 참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후계자 취급하며 온갖 업무는 다 떠맡겼던 주제에 이제 와서 뭐? 황태자와 약혼?’
그것도 멀쩡하던 황태자비를 끌어내리면서까지. 정말 가지가지 한다.
나는 가까스로 공작에게서 눈을 떼고 냉정하게 생각하려 애를 썼다.
‘공작이야 세리나 때문에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쳐. 근데 황제는 갑자기 왜 저러는….’
아. 나는 입 밖으로 터져나가려는 탄식을 겨우 참아냈다.
“엘리,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귓가를 스치는 걱정스러운 한마디.
‘율렌의 방에 숨어들었던 자들이 설마 황제에게 그 사실을 고해바친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누군가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율렌, 금술을 사용하면 타인의 기억을 읽는 게 가능할까.”
나는 갑작스러운 약혼 발표에 궁금증을 한 아름 안고 내게 모여드는 귀족들을 피해 걸음을 옮기며 작게 물었다.
“그 정도야 당연히 가능하지.”
그래, 그럼 내 예상이 맞겠구나.
율렌. 드래곤의 존재를 확인한 황제가 나를 제게 온전히 묶어두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약혼이란 게.
나는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와 뛰듯이 걸었다.
한창 연회가 진행 중인지라 텅 빈 복도를 울리는 내 구두 굽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그러던 중, 다른 누군가의 발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러나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돌아보지 않았고, 그러다 가까이 다가선 그 걸음의 주인이 나를 부를 떼에서야 가까스로 멈춰 섰다.
“엘리.”
“…아르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린 나는 다소 얼빠진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누군가 따라온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율렌도 조용했고, 아르반이라면 저리 크게 발소리를 내지 않음을 알기에 무시했는데….
나를 위해 일부러 제가 내 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소리를 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잔뜩 굳어진 낯으로 나와 함께 궁의 빈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제 모습을 드러낸 율렌이 나와 아르반 사이의 정적을 깨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 존재가 황제 측에 넘어간 듯한데.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리엘리 네가 내 주인이라 여기는 모양이지.”
율렌 역시 내가 응접실로 향하는 동안 말없이 추측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 것 같군.”
아르반 역시도 내가 미리 전해둔 서신을 통해 율렌의 존재가 누군지 모를 이에게 노출되었음을 알았으므로, 곧장 율렌의 의견에 동의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상황 자체는 이해가 가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율렌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놈과 당신의… 약혼식에서 드래곤을 드러내 보다 극적인 반응을 끌어낼 모양입니다.”
“극적인 반응이라면 외국의 사절들까지 참석해 있는 지금이 더 적기이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율렌이 힘을 잃어 저런 모습이 되었다는 걸 모르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외국 사절들에게 새끼 드래곤을 선보이기 꺼림칙할 수도 있죠.”
나는 율렌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새끼 드래곤이라도 드래곤은 드래곤인데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지금 율렌의 모습은 누가 봐도 드래곤은 맞으나 위엄있어 보이지는 않죠.”
“그렇긴 하죠.”
위엄보다는 귀엽고 하찮지만 신비로워 보였다.
“타국 주요 인사들에게 그 외형은 만만한 인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아.”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
결국 새끼이니 힘을 쓰지 못한다며 얕잡아 볼 게 분명했다.
그건 결코 황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겠지.
율렌의 존재가 드러나면 제국민들은 열광할 터지만 현재의 외형만 보고 가진 무력이 대단하다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야 한다 생각하겠지.
그러니 제국의 귀족들 앞에서만 공개하고, 외국에는 그저 소문만을 퍼트리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아르반이 입을 열었다.
“일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서두르겠다고요?”
“예. 당신과… 황태자의 약혼식 날, 율렌의 존재를 세간에 발표한다면 그에 맞춰 드래곤의 주인이 당신이 아닌 저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좋겠죠.”
그의 주장대로 황제에게 물 먹이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방법일 터였다. 다만 그 뒤로 아르반은 본격적인 황실의 견제를 받게 될 테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실을 밝히고, 약혼 자체를 무르고 싶지만….”
그래, 시기상조였다.
율렌이 힘을 완전히 되찾은 것도 아닌 데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 역시 아직은 완전하지 못했다.
나는 슬쩍 그에게로 한발 가까이 다가가 꽉 움켜쥔 그의 손을 감쌌다.
“괜찮아요.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파투 낼 약혼 따위 신경을 안 쓰니까.”
“…어떻게 신경이 안 쓰시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더 안타깝다는 듯이 조심스레 내 얼굴을 쓸었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지만 정말 괜찮아요. 황제를 끌어내리면 해결될 문제고, 그 안에 결혼할 일은 없을 테니.”
결혼은 무슨. 율렌이 성검에 묶인 드래곤이란 사실과 그 주인이 내가 아닌 아르반 이란 게 밝혀지면 당장 나와의 약혼부터 파투 내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게 굳어진 아르반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당신은 다시 돌아가 봐요. 이대로 저희 둘 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 오해를 살 수 있잖아요. 우선 제가 먼저 나갈게요.”
내가 황태자와 약혼한다 발표된 시점에서 내가 끌어들인 사람들은 아르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실상은 다르지만, 현재의 그림만 놓고 보면 나를 포함한 로베르 공작가 전체가 황실의 측근으로 비칠 테니, 이제부터는 황실에 줄을 서기 위해 내게 접근하는 자들만 득실거릴 터였다.
‘죽 쑤어 개 줄 수는 없지.’
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머뭇거리는 아르반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 연회장으로 돌려보낸 뒤, 혼자 궁을 빠져나와 저택으로 향했다.
황제의 연설 이후라면 언제든지 귀가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인맥 만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기에 이 시간에 돌아가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러나 황제가 저런 폭탄 발언을 던져 버린 마당에 내가 저기에 남아 있는 건 미련하기만 한 행동이었다.
공작이야 어차피 황궁에 남을 테니 마차를 내가 가져간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참, 율렌. 황태자한테서 검은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는 바람에 깜빡하고 있던 사실을 묻자 율렌이 간결히 답해왔다.
“그래. 느껴졌어.”
“역시.”
둘이 나란히 퇴장시키면 되겠네.
황태자와 강제로 약혼할 마당에 만에 하나라도 그가 무고하다면 오히려 곤란해졌을 터라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가씨! 일찍 돌아오셨네요?”
저택에 도착하자 놀란 토끼 눈으로 튀어나온 세바니가 나와 내 뒤에 서 있는 에바를 반겼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일찍 돌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평소와 달리 내가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세바니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다른 때였다면 푸념이라도 했을 텐데 영 기운이 없었다.
“미안한데 바로 씻고 싶어서. 준비해줄래?”
“아, 네!”
그대로 욕실로 향하는 세바니를 내버려 두고 에바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벗었다.
어차피 내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에바가 알려줄 이야기였다.
‘아니다. 아마 내일쯤 가면 수도에 있는 제국민 모두가 다 알게 될 사실일지도….’
발 없는 말이 가장 빠른 법이었으니.
특히나 이번 약혼 선언은 유례에 없을 만큼 큰 이슈였다.
무려 본래 버젓이 존재하던 황태자비와 갈라서고 즉시 다른 이를 그 자리에 들이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보니 그쪽이 조용한 게 너무 이상한데?’
블란드 후작가에서 노발대발해도 모자란 판국이었다.
그런데 프리실라 블란드는 불참, 블란드 후작은 분명 자리해 있음에도 어떤 불편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뒤로 다른 모종의 거래가 있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조용할 리가 없겠지.
나는 욕조에 목 끝까지 몸을 담그고 고민에 빠졌다.
사실 생각해서 풀릴만한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떨쳐버릴 수도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온 뒤에는 바로 업무로 복귀했다.
내게 한마디 언급도 없이 약혼을 진행하게 한 공작이 괘씸해서 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일순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다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공작은 이미 정무에서 손을 놔버렸고, 여기다 나까지 나 몰라라 하면 결국 황제와 함께 공작이 무너져 내린 뒤 수습해야 할 업무의 양만 늘어날 테니까.
그리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아몬과 세이린에게 어렵사리 입을 뗐다.
황태자와 약혼은 하게 됐지만 어찌 됐든 내 의지는 없었고, 공작과 얘기해 완만히 해결하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아몬이나 세이린이나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한 얼굴을 했다.
“누님께서는 이미 스승님과 교제 중이신데 황태자와 약혼이라뇨.”
아몬은 분노와 어처구니없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너무 부당한 일이에요. 가주께 가서 당장….”
“아냐. 괜찮아, 아몬.”
나는 흥분한 듯한 아이를 진정시키고자 중간에 말을 잘랐다.
그리고 손짓을 해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을 모두 물린 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