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정말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네.”
마차가 황궁에 가까워지자 율렌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니까. 어때? 금술의 기운이 느껴져?”
“그래. 황궁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결계를 펼쳐놨네. 징그럽게 많은 영혼이 갈려 나갔겠어.”
율렌의 말에 나는 창문 밖의 황궁 외벽을 바라봤다.
나로서는 느껴지는 바가 없었지만, 녀석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미루어 봐서는 어지간한 수준인 듯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영혼을 모아왔을지 모르겠어. 고작 만에 하나를 위해 이 정도의 결계를 펼칠 정도니.”
“…….”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름답기만 한 황궁이 그 무엇보다 꺼림칙하게 와닿았다.
검문을 무사히 마치고 황궁 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이번 건국제를 맞아 특별히 개방된 사파이어 궁에 도착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하는 궁으로, 그 외관은 물론이거니와 내부 역시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한가로이 궁을 둘러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바로 안쪽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미리 약속했던 대로 그곳에는 공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차려입은 공작의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당신 때문에 개고생한 건 난데 왜 자기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누가 보면 집안에 우환이라도 있냐 물어볼 만큼 참담했다.
그러나 내가 공작과 그런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니, 나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더구나 여긴 황궁이야. 행동을 조심해야 해.’
지금만 해도 내 뒤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가 있었다.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 언성이 높아지기라도 하면 무슨 소문이 나돌게 될지 몰랐다.
공작은 내게 말없이 제 팔을 내밀어왔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한 채 그 팔에 살짝 손을 올렸다.
회장으로 향하는 복도는 여러 초대객으로 인해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내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굳이 신경 쓸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나서 찾아갈 자들의 명단을 되뇌었다.
“루퍼스 로베르 공작님과 리엘리 로베르 공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리가 연회장으로 들어서니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중 솔렘의 사절단 일행을 발견한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사무엘 역시 그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내게 묵례해 보였다.
어찌 됐든 솔렘의 사절단으로 방문한 만큼 사무엘 역시 연회 며칠 전 입궁을 마쳤다.
이번 연회가 끝나면 조국으로 돌아갈 테니 더 볼 일은 많지 않을 터였다.
나는 잠시 사무엘이 떠나기 며칠 전 했던 제안을 다시 떠올렸다.
‘솔렘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지.’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재차 다시 얘기를 꺼냈을 뿐만 아니라, 진지한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정말 솔렘의 왕에게라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괜히 일만 커질 뿐이다.
또한 리엘리의 이모인 타티아나 솔렘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타국의 왕이 아니던가.
그런 이에게 타국의 반역을 도와달라 청하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바가 너무 많았다.
‘득보다 실이 더할 수도 있어.’
나는 사무엘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이번 반란에 관해 누설하지 말아 달라고.
나는 방긋 미소 지으며 지난번 데뷔탕트에서 안면을 익혔던 이들과 우선 인사를 나눴다.
공작은 그저 묵묵히 내 옆에 함께하며 장승같이 서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공작을 어렵게 생각하던 귀족들도 점차 눈치를 살피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데뷔 이후 처음 참석하는 큰 연회였으나 공작은 이런 연회에 자주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다 보니 주변에서 몰려드는 이들이 상당했다.
나와 공작은 서로에게 쏟아지는 관심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찢어져 각각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꺼림칙하지만 내가 먼저 공작을 내칠 수는 없으니 이렇게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멀어진 상황이 내심 흡족했다.
“그나저나 공녀님께서도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셨으니… 곧 로베르 공작님께서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시겠군요.”
그때 한 영애가 언급한 이야기에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순 입을 다물었다. 내 대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성대한 연회’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를 공표하는 자리는 최대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많은 인원을 초대해서 연회를 열기 때문에 사용하게 된 일종의 은어였다.
‘결국 내가 정말 후계자가 되는 게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지.’
그렇지 않다면 황금 같은 시간을 내 주변에서 허비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내가 로베르 공작가를 물려받으리란 것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물론이죠. 그때가 되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초대하도록 할게요.”
“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가식적이기 짝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 황태자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 쪽을 쓱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그는 파트너도 없이 홀로 연회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프리실라는 왜 동행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그녀가 아프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동반하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왜 혼자 입장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엘리, 저쪽에서 주인이 다가온다.”
그때 갑작스럽게 귓가에서 들려오는 율렌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획 돌릴뻔하다가 간신히 참아냈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보니 아르반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 또한 그에게 살짝 웃어주고는 재빨리 주변에 포진해 있는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와인을 가지러 가는 척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가 잔을 집어 들기 무섭게 최근 너무도 그리웠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엘리.”
가까이서 속삭였기에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을 애칭.
나는 또한 환히 미소 지으며 작게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르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지난 데뷔탕트에서였다.
그마저도 서로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란 마당이었으니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최근 들어서는 아몬의 수업마저 어쩔 수 없이 줄였다. 그러니 지난번에 마주했다지만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이렇게 마주할 수 있어 너무 반가웠다.
“저야 잘 지냈죠. 당신은요. 잠은 제대로 자고 있어요?”
그에게 안부를 묻는 와중,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꽂혀왔다. 인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우리 둘을 보고 웅성거렸다.
그 덕에 반가움에 젖어 필요 이상으로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는 아르반의 시선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당신 생각보다는 훨씬 잘 지내고 있을 테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은지 모르겠다.
“크흠….”
모처럼 마주하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데, 아르반의 뒤쪽에 자리한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헛기침하며 아르반에게 눈짓하고 있었다.
뭐지 싶어 시선을 돌리다 그 남자의 갈색 눈동자와 그대로 마주쳤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속으로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아, 이 남자인가.’
최상위 귀족들만 자리한 이 회장에서도 눈에 띄게 고급스러운 차림과 훤칠한 체구.
그러나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에 눈동자인지라 잠시 맞는지 아닌지 헷갈렸다.
내가 속으로 아리송해하고 있을 때, 아르반이 남자를 슬쩍 바라보며 내게 아주 간략히 그를 소개해 왔다.
“리엘리, 이쪽은 펜델 세이오넬 공작입니다.”
역시, 맞구나.
아르반이 정계에 나서기 전까지 귀족들을 대표해 황제와 대립해 해왔다던 세이오넬 공작.
나는 잽싸게 비즈니스용 미소를 베어 물고는 그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관입니다, 각하. 로베르 공작가의 리엘리라 합니다.”
“이쪽이야말로 공녀를 마주할 수 있어 영광이로군. 과연, 로베르 공작이 애지중지할 만큼 총명해 보이네.”
사십 대 초반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치 동안인 공작이 시원스럽게 웃어 보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불쑥 내민 그의 손을 보고 있노라니 어딘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르반의 서신을 통해 그가 세이오넬 공작과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미리 접했었다.
당연하게도 세이오넬 공작 역시 나에 대한 정보를 미리 건네받았을 것이었다.
내가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리자 그가 조심스레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아주 깔끔한 태도로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며 속삭였다.
“공작이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가 참 기대되는군.”
나는 그저 미소 지어 보였다.
그도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이내 물러나 아르반에게 말을 걸었다.
세이오넬 공작이 내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걸지 않은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친황제 파의 대표주자인 로베르 공작의 딸과 반황제파의 세이오넬 공작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어찌 비칠지를 알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사실 그래서 말을 걸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좀 의외의 행동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종의 우렁찬 외침이 홀을 가득 메웠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왔구나.
곧이어 입구 앞에 나란히 서 있던 시종 두 명이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어젖혔고, 황제가 반으로 갈라진 인파를 가로지르며 옥좌로 걸어갔다.
나는 차갑게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들라.”
그리고 황제의 명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뭐, 뭐야….’
황제의 푸른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차라리 착각이면 좋겠다 싶을 만큼이나 집요하게.
솔직히 당황한 티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황제가 아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던 것도 같지만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가 축사를 읊었다.
나는 곧 당황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3억 번은 죽어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하겠어.”
“…뭐?”
나는 뜬금없이 들려온 속삭임에 무심코 되묻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연설하고 있었기에 일대가 너무 조용했다.
작게라도 입을 열면 가까이 있는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율렌은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금술을 사용한 저놈의 죄가 그만큼 깊다는 말이야.”
율렌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나 목소리만 들어도 녀석이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금세 느낄 수 있을 만큼 살기가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본체로 변해 저놈이랑 저 후계 놈까지 찢어 죽이고 싶어.”
“…절대 안 돼.”
입을 열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진심으로 황제와 황태자를 죽이고 싶어 하는 율렌의 마음이 절실히 와닿아서, 그러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진짜 실행에 옮길까 불안한 마음에.
“누가 진짜 한대?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런 건 그냥 생각으로나 해.’
나까지 불안하게 만들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단상을 쳐다봤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황제가 그런 나를 보고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던 것도 같았다.
묘하게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어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피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단상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놈이 나를 향해 노골적인 눈웃음을 쳐왔기 때문에 도통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주고는 황제의 연설에 경청하겠다는 듯 고개를 깊게 숙였다.
빨리 황제가 연설을 마쳤으면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드레스 끝자락만 바라보고 있는데, 황제의 입에서 불쑥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또한 황태자비 프리실라 블란드의 행실이 온당하지 않고 황실에 누를 끼쳤기에 폐위했음을 알리는 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