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나도 좀 알자. 내가 알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하아….”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나도 모르겠다.”
이걸 별거라고 해야 할지, 별것 아니라고 해야 할지조차 아리송했다.
너무 의미심장한 편지였다.
특히나 프리실라가 갑자기 내게 존대를 사용했거니와, 나를 지칭한 ‘드높은 위치에 서게 될 분.’이란 호칭이 유독 신경 쓰였다.
‘…뭘 알고 있는 건가.’
혹시 아르반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걸까.
그래서 공공연하게 아르반의 애인인 나에게 저런 말을 한 건가.
‘어찌 됐든 아르반이 황제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내가 황후가 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르반이 데뷔탕트 이후 블란드 후작 가문과 접점을 만들면서 후작이 몸을 사리고자 딸에게 우선 귀띔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계획에 대해 프리실라가 알게 된 게 옳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내 힘이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르반의 반역에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할 터였다.
더구나 나는 그와 연인 사이.
그러니 프리실라의 입장에서는 내가 ‘드높은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이상한 건 가정이 아니라 확신을 갖고 말했다는 거야.’
그 누구도 아르반의 반역이 성공한다 확신할 수 없었다.
심지어 율렌과 성검의 존재를 알고 있는 나조차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 이리 아등바등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런 확정적인 단어를 썼다고?
‘…다른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어.’
그게 대체 뭘까.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프리실라에게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순순히 대답해주리란 보장이 없었다.
당장 내일 있던 티파티 마저 충격 때문에 취소하겠다는데, 나를 만나주기나 할까.
“이거 읽어봐도 돼?”
내가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자 답답했는지, 율렌이 편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녀석에게 편지를 건넸다.
짧은 발을 들어 편지를 받으려던 율렌은 재차 헛발질하자 이내 표정을 와락 구기며 입을 벌려 편지를 낚아채더니 세이린에게로 날아갔다.
그새 친해진 모양인지 그 모양새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바라보자, 세이린이 난감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냥 맥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딱히 비밀로 할 만한 내용이 담긴 편지도 아니었다.
둘은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고, 율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주어가 없잖아, 주어가.”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고 했잖아.”
내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율렌에게 답을 하는 사이 세이린이 편지를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건 나중에 블란드 영애를 만나 여쭐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조사를 하고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내가 너무 바빴다.
어차피 또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면 편지에 대해서는 잠시 잊게 되겠지.
건국제가 되면 프리실라 블란드를 만날 기회가 생길 테니, 그때까지만 참자.
‘물어본다 한들 답을 들을 수 있을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지만.’
* * *
현재의 일상이 바쁘지만, 꼭 그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워낙 바쁘다 보니 시간은 정말 잘 흘러갔다.
그래도 일 때문에 바쁜 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기분 상할 상황은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공작의 귀환으로 리엘리의 기분은 순식간에 땅바닥에 처박혀버렸다.
그녀는 아직 공작을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괜히 머리가 아파져 오는 듯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적어도 건국제까지는 평화로울 줄 알았지.’
공작이 이렇게 뜬금없이 저택에 돌아올 줄도, 그리고 곧장 자신을 호출할 줄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전에 건국제 파트너 제의도 편지로 전달해온 공작이었으니까.
리엘리는 그의 집무실로 발을 옮기며 치솟는 짜증을 애써 눌러 참았다.
집무실 앞의 하인이 공작에게 제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도, 공작의 허락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황궁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던 분이 무슨 일로 예까지 행차하셨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리엘리는 집무실로 들어서며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검은 마력의 기운을 무시하고 가볍게 인사했다.
“앉거라.”
공작의 맞은편에 앉으며 곧장 무슨 일이냐고 질문하려 했는데, 이번만큼은 공작이 그녀보다 빨랐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다. 리리, 아빠한테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말해.”
처음 입을 뗐을 때까지만 해도 예전과 같이 차분한 듯했던 음성이 그 짧은 사이 급변하여 마지막에는 예리하게 날이 섰다.
그로 인해 리엘리의 표정이 어그러진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비밀? 숨기고 있는 거라면 너무 많아 뭘 묻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 공작에게 말할 생각은 전무했다.
‘무릎 꿇고 부탁해도 모자란 마당에, 명령하면 내가 그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하나.’
리엘리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작은 어지간히 애가 타는지, 표정을 굳히며 언성을 높여왔다.
“중요한 일을 숨기고 있다면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루퍼스는 상당히 초조했다.
건국제까지 며칠 남지도 않았다. 황제는 제가 한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듯이 발 빠르게 프리실라 블란드를 황궁에서 내쳤다.
상당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는 블란드 가문을 그리 헌신짝처럼 내쳐버릴 만큼, 제 딸이 가진 가치가 무엇일지 궁리해 보았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택으로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숨기고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 건 없죠.”
루퍼스는 제 추궁에도 심드렁히 대답하는 리엘리를 보고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너를 위해 묻는 말이다. 네가 제대로 대답을 해야 내가 황제에게 다른 제안이라도 해볼 수 있겠지!”
“…황제가 저에 대해 무슨 말을 했던 모양이네요.”
루퍼스는 그제야 제가 쓸데없는 말까지 리엘리에게 알렸음을 인지했다.
“무슨 제안을 했죠?”
그는 문득 제 딸을 바라봤다.
세리나가 살아 있을 적에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딸이었다.
그녀가 죽고 얼마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여겼지만 세리나와 똑 닮은 리엘리를 보며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리나를 되살리기 위한 실험을 진행하면서부터는 보다 중요한 존재로 여겨왔다.
그녀가 살아났을 때, 딸이 없으면 슬퍼할 것이라 여겼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걸 리리에게 묻고 있는 거지.’
불현듯 스친 의문은 곧 루퍼스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렇지 않은가.
불만 가득해 보이는 딸. 딸을 원한다는 황제. 딸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리나.
‘어차피 리리에게서 답을 얻는다 한들 황제가 원하는 게 리리인 이상 내어줄 수밖에 없는데.’
루퍼스는 미간을 좁혔다.
초조했던 마음은 가시고, 리엘리와 대치하고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지 않는 딸이다. 한때 좀 아꼈을 뿐인.
또한 현재로서는 세리나의 기억이 돌아올 것은 요원해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리엘리가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아몬 로베르, 떠올리는 것만으로 불쾌해지는 그 작은 기생충이 있으니, 완벽하지는 않아도 리엘리의 빈자리를 채울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 그냥 리리를 내어주자. 죽는 것도 아니고 황궁으로 보낼 뿐이니, 혹여 세리나의 기억이 돌아온다 해도 상관없겠지.’
기억을 찾은 세리나 또한 처음에는 슬퍼할지 모르나 곧 안정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둘만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터.
따지고 보니 리엘리가 없을 때 더욱더 이로운 일들이 많은 것도 같았다.
저 혼자 결론을 내린 공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 인해 놀란 리엘리가 눈을 홉뜨고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그런 리엘리를 바라보며 일어났다.
“네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을 하셨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묻지 않으마.”
“…….”
리엘리는 공작을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흥분해서 캐물을 때는 언제고 또 저런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회 때 보자꾸나.”
그 한마디를 남긴 공작은 리엘리가 뭐라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 뭐 하자는 거야.”
홀로 남겨진 그녀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바쁜 사람을 불러다 하는 말이기에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가 했다.
그리고 실제로 뭔가 일이 있긴 있었던 듯, 그의 호통은 꽤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황제, 황제가 나를 두고 공작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떤 조건을 요구해 왔기에 공작이 저리 흥분해 제게 추궁해 온 거고, 또 어떤 이유로 쌩하니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지….
리엘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넘겼다.
프리실라나 공작이나, 어중간한 말들로 신경만 쓰이게 만들고 있었다.
* * *
“누나, 괜찮으세요?”
“…응? 아, 당연히 괜찮지. 걱정해 줬구나?”
착하기도 하지.
리엘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아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눈이 전과 달리 퀭한 것이 못내 신경 쓰인 아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요즘 누님께서 바쁘신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저 중요한 행사인 건국제 연회 당일인 오늘이기에 좀 더 마음이 쓰일 뿐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누나 정말 괜찮으니까. 다녀올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리엘리는 아몬의 작은 머리를 두어 번 더 쓰다듬고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이는 제 어깨로 손을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아무것도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제 어깨를 이상하단 듯이 몇 번 쓸던 리엘리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당연하지. 마력도 얼추 다 회복됐고, 나보다 실력 좋은 마법사가 존재할 리도 없으니 문제없어.”
“…네가 큰소리쳐서 믿고 데려온 건데, 혹시라도 황궁 안의 다른 마도구에 걸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한 말이야.”
“은신 마법을 사용하는 이상 그럴 리 없어. 다만 다른 마법을 사용하면 은신이 풀려버리니까, 난 그냥 같이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못 해.”
“알겠어. 안에서는 말 걸기 어려우니까 어디 가지 말고 꼭 내 어깨에만 붙어있고.”
“그래.”
리엘리는 후, 하고 작게 숨을 토해냈다.
불안한 마음에 은신이 가능해진 율렌과 동행한 것이었지만 동행하니 그 나름대로 또 마음에 걸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