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루퍼스 로베르는 무심한 황제의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똑바로 말하라 소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세리나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오직 흑마법의 힘 때문이지 그 육체가 되살아 난 게 아니란 사실을 루퍼스 역시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세리나 로베르가 존재하는 이상, 루퍼스는 황제에게 철저한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거래라는 명목으로 묶여있지만, 그 실상을 카슈레인과 루퍼스 두 사람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루퍼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리리 역시 그에게 있어 중요한 아이임은 맞았지만, 그 중함이 세리나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게. 나머지는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고, 건국제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생각이야.”
“…예.”
카슈레인은 창백한 얼굴로 마지못해 답하는 공작을 보다 설핏 미소 지었다.
* * *
“라이셀 샤루스.”
“예, 폐하.”
황태자, 라이셀 샤루스는 어쩐 일로 자신을 불러낸 황제로 인해 긴장한 낯을 들키지 않고자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제가 그를 불렀을 때는 대체로 좋지 않은 일이 원인이 된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라도 쳤었나.’
라이셀 역시도 제가 황제의 기준에서 턱없이 부족한 후계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피나게 노력했지만, 재능의 차이에 번번이 좌절해야만 했다. 그렇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계속 분노만이 치밀어 올랐다.
라이셀은 그 분노를 저보다 낯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표출했다. 궁의 사용인들이 주 피해자가 되었고, 그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사사로운 일에 나서는 이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라이셀의 행패가 그 정점에 이르렀던 무렵, 황제는 별안간 그를 불러 흑마법을 배우라 명령했다.
“흑마법을 구사할 줄 안다면 너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겠지. 딱 그 정도겠지만.”
황제의 말마따나, 그때부터 라이셀은 그나마 ‘사람 구실 정도는 할 수 있는 놈.’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황제의 기준에서는 한참 미달인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최근 황제가 라이셀을 개인적으로 호출했을 때는 그가 궁의 사용인 셋의 목을 날렸을 직후였다.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 아닌, 라이셀의 멍청함을 질책하기 위함이었다.
“라이셀 샤루스, 그 자리를 보존하고 싶다면 뒷일을 생각해라. 황태자로서의 체면을 생각해. 처리하려면 요란 떨지 말고 조용히 하라 일렀지 않았던가.”
라이셀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뒤로 황제의 명령처럼 조용히, 은밀한 지하에 자리를 마련해 화를 풀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 황태자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황제였으나, 그가 긴장하는 것은 황제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었기에 그저 무심히 입을 열었다.
“프리실라 블란드와 이혼하고 리엘리 로베르와의 약혼을 추진할 예정이다.”
라이셀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갑자기 프리실라와 이혼이라니, 이게 무슨….
“…로베르 공녀와, 말입니까.”
“그래. 공녀가 아주 쓸만한 패를 들고 있더구나.”
무심코 황제를 바라본 라이셀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대체, 공녀가 어떤 패를 들고 있기에 황제가 저런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황태자인 라이셀의 결혼은 다른 가문과 결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황제에게 협력하지 않은 이들 중 포섭할 수 있는 집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블란드 후작가를 고른 것이었고.
그런데 이런 갑작스러운 이혼이라니, 블란드 후작과 척을 지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대체 그 쓸만한 패가 어느 정도 수준이기에, 블란드를 이렇게 쓰레기처럼 내다 버리는지.
라이셀의 눈동자에 비치는 의문을 바라보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로베르 공녀가 드래곤을 기르고 있더군.”
“…….”
순간, 라이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황제를 바라봤다.
그 멍청한 표정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황제는 순순히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저놈도 알고 있어야 하는 문제였으니까.
“리엘리 로베르 공녀가 공작 몰래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 아직 성룡이 되지 못한 새끼지만 은빛이 찬란한 비늘이 아름답더군.”
카슈레인은 에이미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드래곤의 형상을 떠올리며 꼭 제가 본 것처럼 설명했다.
“신수, 라는 말씀입니까.”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듯, 멍하던 얼굴을 수습한 라이셀이 질문했다.
“그래. 신수란 말이다. 공녀를 끌어드리면 굳이 성검을 찾을 것 없이 신수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
주인을 죽이고 빼앗을 수 있는 존재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신수가 다음 주인으로 누굴 선택할지 알 수 없으니 되도록 안전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리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이셀은 저도 모르게 풀어지려는 표정을 신경 쓰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환호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예전에는 능력 없는 자신의 불행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이제보다 그 누구보다 큰 행운을 얻기 전이었기에 그랬던 모양이다.
흑마법으로 부족한 힘을 메꾸고, 이제는 성검과 초대 황제의 신수를 대신할 드래곤까지 나타나다니.
‘내가 황제가 되었을 때, 황권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되겠지.’
그 생각을 하면 당장이라도 웃음이 튀어 나갈 듯했기에, 라이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여기, 이건 서명만 하면 되겠어.”
“고마워.”
나는 율렌이 쓱 들이미는 서류를 넘겨받으며 빠르게 서명한 뒤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런 내 왼편에는 책상 하나를 더 들여 그곳에서 정무를 보고 있는 세이린이 있었다.
눈을 굴려 내 옆에 쌓인 서류가 대부분 처리된 걸 확인한 나는 작게 숨을 내뱉고는 기지개를 켰다.
율렌은 아직 폴리모프를 오래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이유로 계속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업무 처리는 나보다 아는 게 많아 녀석의 도움으로 더 수월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상식은 묘하게 부족하면서 이런 건 또 의외란 말이지.’
계속 그 워커홀릭 초대 황제 폐하와 함께한 영향일까 싶었다.
‘그리고 보니 내일이던가.’
프리실라 블란드의 티파티 초대일이.
그녀에게서 초대가 온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또한 나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영애이기도 했기에 그만큼 가까워져서 나쁠 것 하나 없겠지.
‘황태자비의 위치를 제외하더라도 가장 영향력 있는 후작가의 딸이니.’
다만 계속 마음이 걸리는 건 그녀가 바로 황태자비이기 때문이다.
프리실라 블란드에게 악감정은커녕 이후 잘 지내고 싶은 생각이 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그녀를 그 위치에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할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황태자 라이셀이 쓰레기니까 빨리 갈라서는 편이 그녀에게도 이롭겠지만,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고.’
인간성까지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시점에서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블란드 후작은 황제 측에 가담하고 있음은 확실하지만, 그들은 흑마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나는 최근에 율렌과 함께 마차를 타고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 저택들을 돌아보며 검은 마력이 느껴지는 곳이 있는지를 살폈었다.
그 결과 우리 가문을 제외한 몇몇 곳에서 기운을 감지했고, 현재 그 가문들을 중심적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그중 블란드 가문은 없었고.’
그렇다는 건 황제가 흑마법과 관련되어 이미 제 세력으로 끌어드린 가문들을 제외하고 가장 세력이 큰 블란드 가를 포섭하기 위해 황태자비의 자리를 걸었다는 말이 된다.
‘유일한 공녀인 리엘리가 곧 몇 년만 있으면 성년이 되는 시점이었는데, 왜 로베르에 청혼을 넣지 않았는지 알겠어.’
이미 잡은 물고기에게 관심 없다는 거겠지.
쓸데없이 세를 넓혀줄 이유도 없고.
‘그럼 블란드 가문이 흑마법과 관련이 없으니 영애도 자기가 어떤 자와 약혼했고, 미래가 파국이란 것도 당연히 모를 테고.’
나는 커피를 후룩 들이켜며 프리실라 블란드를 황태자와 약혼 파기시킬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금 시점에 갈라서면 훗날 황태자를 끌어내릴 때 피해가 가지 않을 텐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헤어질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애쓴다고 하더라도 현시점에서 밝힐 수 없는 정보가 대다수였다.
‘황태자 쪽에서 차주면 금상첨화인데.’
나는 픽 실없이 웃었다.
현실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 딱딱 움직여줄 리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시계로 시선을 옮겨 어느새 훌쩍 흘러간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잘 시간이었기에 세이린에게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을 하려던 차였다.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에바가 총총 걸어들어와 편지를 한 통 내게 내밀었다.
“급보가 와서요. 프리실라 블란드 영애께서 보내셨어요.”
“…이 시간에 급보를?”
이 시간에, 그것도 귀족 영애가 다름 아닌 나에게 급보를 보냈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는 바로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티파티에 변동사항이라도 있습니까.”
내일 프리실라 블란드의 티파티까지 동행할 예정이었던 세이린이었기에, 야심한 시각에 도착한 편지를 보고 그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또한 그게 정답이기도 했다.
“네, 있네요. 변동사항. 내일 티파티는 취소하겠다고 해요.”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하시던가요?”
“아픈 것보다… 다른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나는 편지에 적혀있는 의미심장한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내렸다.
‘…공녀께서는 이미 데뷔탕트 전에 이 사실을 알고 계셨던 거겠죠.
비록 저 스스로 원해서 올라온 위치가 아니라고는 하나, 타인에 의해 물러나게 됨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는 듯합니다.
하여,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송구하오나 속히 편지를 보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내일 티파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이리 편지를 보냄을, 부디 양해해 주시길.
드높은 위치에 서게 될 분께 - 프리실라 블란드로부터’
대체 무슨 소식을 전달받았길래 대뜸 이런 편지를 보내온 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내가 뭘 알고 있었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