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조금만 더 힘내. 어차피 네가 주인이 보고 싶다고 해도 주인도 시간 없어서 널 만나지 못할 텐데 뭐. 이럴 때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게 좋잖아.”
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주는 율렌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르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내가 징징거리면 안 되지.
이 생활을 끝없이 지속할 것도 아니고, 좀만 더 열심히 해보자…. 기운은 나지 않지만.
다시 서류에 코를 박고 집중하던 나는 들려온 노크 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차피 에바 아니면 세바니일 터였다.
간단한 식사를 부탁했으니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차였고.
“엘리, 세바니가 들고 들어간다는 걸 제가 대신 받아왔습니다. 혹시 방해가 됐나요?”
그러다 들려온 익숙하지만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세이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고마워요. 아뇨, 방해라니 그럴 리가요.”
나는 그녀가 들고 온 샌드위치를 집어 들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 깃든 근심은 가시지 않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입으로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이걸 다 끝내지 않으면 오늘 잠은 다 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절로 눈동자가 서류로 향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세이린이 작게 침음을 흘리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엘리, 중요한 문서가 아니라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네? 세이린이요?”
나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자 세이린이 설핏 웃으며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들을 가리켜 말했다.
“각하의 보좌관 노릇을 꽤 오래 했던지라, 서류처리는 익숙합니다. 잠시 봐도 될까요?”
나는 거의 홀린 듯 그녀에게 보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음, 이 정도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정말요…?”
안 그래도 지금 다른 보좌관들까지 전부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간 공작이 정말 중요한 문서 외에는 방치해둔 탓에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이린의 도움은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았다.
그렇게 내 호위로 들어온 세이린은 어쩌다 보니 나와 함께 서류작업에 매몰된 나날을 보내게 됐다.
그러던 중, 공작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전언이 날아들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지?”
눈을 의심하고 두 번을 더 읽었지만, 종이에 적힌 내용이 바뀌지는 않았다.
내 중얼거림에 책상 위로 폴짝 뛰어오른 율렌이 내 손에서 편지를 빼내더니 소리 내에 내용을 읽어내렸다.
“보자, 리리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일 처리 또한 훌륭히… 쓸데없는 내용이군. 본론은… 건국제에 자기랑 같이 참석하자는 거네.”
“양심도 없지.”
머리로는 공작이 아닌 다른 파트너를 동반하는 게 이상한 일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함께 연회에 참석하자는 통보를 들으니, 대체 무슨 염치로 저러는가 싶었다.
‘하긴, 애초에 그런 게 존재했다면 제 딸 앞에서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겠지.’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 또한 아직 아르반에게 건국제 파트너로 참석해달란 부탁을 하지 않았었고.
‘…공작과 참석하지 않으면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고.’
아직 공작이 흑마법에 손대고 있는 걸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 내가 공작이 아닌 아르반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다면 나와 공작의 불화설이 번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데뷔탕트는 가족이 에스코트하는 게 거의 불문율과도 같으니까.
‘그건 곤란하지.’
현재 내가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차기 공작이란 타이틀이 중요했다.
귀족들과 어울리며 이제 데뷔탕트를 치렀으니 곧 차기 가주로 공표할 것이라고 은근히 말을 흘리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그러니 이번 건국제에 참석하는 고위급 인사들에게 내 위치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로베르 공작가의 차기 가주가 나라는 걸.
아르반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내게 건국제에 함께 참석하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아….”
나는 책상 위로 풀썩 상체를 무너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이건 뭐야.”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율렌은 내 팔 아래 깔린 화려한 편지 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제야 미리 빼놓았던 중요한 초대장을 기억해낸 나는 꾸물꾸물 일어나 봉투를 열었다.
* * *
“하… 하하!”
황제, 카슈레인은 에이미 모렌의 기억을 읽고는 눈을 번뜩이며 입가에 만족 어린 미소를 그려냈다.
드래곤이 맞았다.
리엘리 로베르가, 감히 발칙하게도 몰래 드래곤을 숨겨두고 있었다.
‘새끼인 듯하니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한데.’
비늘이 은빛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신수임이 틀림없었다.
분명 드래곤이 존재한다는 건 그로서는 반길만한 일이었다. 다만 드래곤을, 그것도 신수를 리엘리 로베르가 데리고 있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오랫동안 숨겨왔을 수는 없었을 터. 그렇다면….’
에시트 산맥. 카슈레인은 공녀가 답지 않게 걸음 했던 곳을 기억해냈다.
카슈레인은 항시 아르반 카넬로웰을 주시했기에 그가 어딜 향하든 모두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카넬로웰 본 저택에서 날아든 보고 역시도 기억하고 있었다.
신원불명인 금발 자안의 여자와 함께 하루를 머물렀다고 했다.
또한 그 뒤부터 아르반 카넬로웰이 로베르 공작가를 오가기 시작했으니, 그 동행은 분명 공녀였을 터였다.
‘그렇다면 아르반 카넬로웰 역시 드래곤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카슈레인이 찾아 헤매던 성검과, 그 성검에 묶여있다는 초대 황제와 함께한 신수 율렌이 아닌 또 다른 신수가 탄생한 것이다.
‘그곳에 다녀오기 전 전속 시녀들을 미리 갈아치워 둔 건 드래곤의 존재를 은폐하고자 함이었던가.’
만약 자신의 추측이 옳다면 리엘리 로베르는 어떻게 신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고, 또 어떻게 신수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카슈레인은 순식간에 차오르는 의문을 잠시 내리눌렀다.
지금은 궁금증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 아니다.
‘일단, 가장 먼저 공녀를 묶어둘 필요가 있겠어.’
어찌 됐든 리엘리 로베르는 새로이 등장한 신수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다.
정보를 빼내는 것은 차치하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용할 가치는 차고도 넘쳤다.
“나이젤.”
“예, 폐하.”
키슈레인의 부름에 대기하던 중년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래도 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 같군. 라이셀에게 프리실라 블란드와 이혼하고 리엘리 로베르 공녀와의 약혼을 추진할 예정이라 전하게. 그리고 가서 로베르 공작을 불러와.”
나이젤은 다소 뜬금없기까지 한 주인의 명에 동요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예, 폐하.”
그는 황제가 부가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았음에도 의문을 달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바람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 * *
“폐하,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루퍼스 로베르는 평소와 달리 즐거운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황제를 보고도 별다른 감흥 없는 낯으로 말했다.
간소하게라도 인사를 올리지 않는 루퍼스의 태도에도 황제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래, 자네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어 불렀지. 앉게.”
루퍼스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작게 미간을 좁혔다.
황제가 제게 자리를 권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아주 중하거나 얘기가 길어질 것이란 뜻이었다.
“차를 내오지.”
황제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미리 준비해둔 차를 따랐다.
차를 두어 모금 넘긴 황제가 잔을 내림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요즘 정무는 딸에게 넘긴 채 세리나 로베르와 즐겁게 지내고 있다지.”
“…온전히 넘긴 것은 아닙니다.”
어쩐 일로 불러들였나 했더니, 문책하려는 건가.
확실히 아직 후계에 불과한 어린 딸에게 대부분의 정무를 일임한 건 과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세리나와 함께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곁에 없는 나날이 너무나도 끔찍해 시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택했던 게 바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재상으로서의 업무까지 겹치자 그야말로 숨돌릴 틈이 고작이었기에.
결국, 그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기실, 이론 외에는 배운 것이 없는 딸에게 그 많은 업무를 떠넘긴다는 게 얼마나 부담이 되고 또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루퍼스는 끝내 외면했다.
세리나와 평화로운 나날을 영위할 수 있다면 가문도 뭣도 중하지 않았다.
다만 세리나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눈앞에 있는 황제의 덕이 컸다.
흑마법사들을 양성하고 실질적인 그들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이가 바로 눈앞의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고작 일개 공작부인에 불과한 루퍼스의 아내, 세리나의 부활을 도왔던 것은 바로 그의 가문 때문이었다.
세리나의 부활에 대한 대가로 황제가 요구한 것은 로베르 공작가의 절대적인 지지와 자금이었으니까.
그러니 황제가 가문을 나 몰라라 하는 루퍼스의 태만을 질책한다면, 그로서도 곤란한 상황이기는 했다.
“중요한 서류는 제 쪽에서 검토하고 있고 황실과 얽힌 장부는 모두 이쪽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보고 받은 바에 따르면 제 딸아이가 훌륭히 정무를 보고 있다고도 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걱정이라.
키슈레인은 제가 공작가를 걱정하고 있다 착각하는 공작을 바라봤다.
그로서는 리엘리 로베르가 공작을 대신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걱정을 한 적은 없네. 그럴 필요가 없지. 내가 자네를 부른 건 자네의 딸을 새로운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니까. 그녀가 황태자비의 자리에 오른다면 공작, 자네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지금, 폐하 무슨….”
루퍼스는 제가 들은 게 맞는지 의심했다.
황태자비인 프리실라 블란드가 버젓이 살아 있는 데다가, 루퍼스 자신이 후계로 리엘리를 내정했다는 걸 알고 있는 황제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희 리리를….”
루퍼스의 묘하게 일그러진 낯을 보며, 황제는 입매를 비틀었다.
“자네가 그리 아끼는 딸을 황실에 끌어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거든.”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카슈레인은 답하지 않았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딸애 하나가 숨기고 있는 드래곤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고작해야 성룡도 아닌 새끼에 불과하니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어설퍼 공녀가 가까스로 숨기는 게 고작일 텐데.
‘이 정도면 무능하다 보는 게 맞겠지.’
애초에 루퍼스 로베르를 편한 대로 주무르기 위해 이전부터 서서히 망가트린 장본인이 바로 카슈레인이었지만 그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은 채 혀를 찰 뿐이었다.
“그 이유를 내게 묻고 있는 시점에서 자네에게 내가 해줄 말이 없군. 딸아이에 대해 그렇게 몰라서야 되겠나. 뭐… 이제 때가 되면 알게 될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