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건 누구의 잘잘못인가를 따지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율렌의 존재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
그 사실 자체가 문제이니까.
“하아…. 일단 최악의 가정으로 황실에 네 존재가 탄로 날 수 있다고 생각해두는 편이 좋겠지.”
“…사실 지금 시점에서 내 정체가 탄로 난다고 해도 주인에게 문제는 없을 거야. 오히려 네가 문제지.”
그렇다. 내가 율렌의 주인이 아니라지만 일단 율렌이 로베르 공작저, 그것도 내 방에서 발견되었으니 당연한 순서였다.
“그래도 나보다는 아르반이 위험하지 않겠어? 황제도 알고 있을 거 아냐.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게 성검의 주인이고, 성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황실의 핏줄을 이은 자들뿐이란 거.”
“저쪽에서는 생각이 다를걸. 주인이 성검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발각된 게 아니라 내 존재만 노출된 것뿐이니까.”
율렌은 작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성검이 황실의 핏줄을 타고난 이에게만 계승된다는 건 알고 있을 테지만 내가 초대 황제의 드래곤이라는 건 알 길이 없지.”
“너 같이 생긴 드래곤이 둘이나 있다고 생각하겠어?”
애초에 드래곤들이 인간들과 섞여 사는 세계도 아닐뿐더러, 율렌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드래곤이었다.
그 증거로 오직 녀석만이 은빛 비늘을 타고났으니,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한 일이다.
“저쪽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울 거라고 보는데. 생각해봐. 성검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건 네가 유일하지. 아무리 엘리 네가 주인과 산맥에 동행했었다고 하지만 그쪽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일 거야.”
듣다 보니 나도 내심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만에 하나 그곳에서 성검을 찾았다고 치자. 황제도 알고 있어. 성검의 주인이 드래곤의 수호를 받게 된다는 걸. 그럼 우리 주인의 입장에서는 굳이 날 너한테 맡길 이유가 없단 말이지.”
그래, 율렌이 마력을 잃지 않았다면 녀석이 나와 이렇게 붙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리 있네. 그쪽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하겠어.”
설마 드래곤이 마력을 몽땅 잃어버리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 나와 붙어있으리란 발상을 할 수 있을 리가.
“그래. 그러니까 한번 기다려 보자고.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달리 방법이 없긴 하네.”
율렌의 존재가 황제에게 알려지는 건 사실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율렌이 회복하고 아르반이 충분한 세력을 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 * *
“폐하, 시어스 남작가의 카렌입니다.”
샤루스 제국의 황제, 카슈레인 샤루스는 고개도 까딱이지 않은 채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눈짓했다.
그에 시종이 대신 대답하자 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선 카렌은 긴장감에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며 허리를 숙였다.
“카렌 시어스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의 눈동자가 숙인 카렌의 머리에 가서 박혔다.
로베르 공작가에 심어둔 세작 중 하나.
그나마도 공녀의 곁에서 쫓겨나 더는 쓸모없는 패 중 하나였다.
그리고 카렌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면담을 요청했다는 건 긴밀히 전달할 사항이 매우 중하다는 뜻이었다.
“…그래, 얼마나 중대한 문제이기에 직접 알현 요청을 했는지 들어볼까.”
한참 말이 없던 황제가 느릿하게 입을 열자 그제야 허리를 편 카렌이 즉각 제가 전해 들었던 바를 고했다.
“예, 사실-.”
카렌은 에이미에게 전해 들었던 바를 제가 직접 보고 온 양 꾸며 설명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갈수록 처음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하던 황제의 눈이 커지더니, 이야기를 마쳤을 무렵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급박한 움직임에 주변에 기립해 있던 기사 몇과 시종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황제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모두 그의 진정한 수족으로 즉, 흑마법과 관련된 기밀까지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어지간한 사항으로는 놀라지 않는 자들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이들조차 놀랐을 만큼 황제의 행동이 의외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렌에게 다가간 황제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턱을 잡아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카렌이 저도 모르게 황제를 바라보다 흠칫 몸을 굳혔다.
황제의 얼굴에 비친 희열은, 일반적인 기쁨을 넘어 섬찟한 무언가가 있었다.
카렌은 범 앞에 선 사슴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바르르 떨었지만, 그녀의 사정 따위는 카슈레인이 알 바가 아니었다.
“감히 내 앞에서 거짓을 논하면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 예… 폐하.”
카렌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목격한 바는 아니었지만, 거짓을 고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황제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카렌은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아주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기에, 카렌은 황제를 마주한 두려움에 생겨난 긴장감 탓이라 여겼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황제가 턱을 잡았던 손을 내려 매끈한 목을 감쌌을 때, 카렌은 비로소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거짓을 고했구나. 이를 어찌할까.”
카슈레인의 손끝을 타고 안개와도 같은 희미한 기운이 카렌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금술을 사용할 때 필연적으로 발산되는 영혼의 찌꺼기와 같은 것이었기에, 그곳에 있던 모든 황제의 수족들은 감히 주제도 모르고 혀를 놀린 시녀의 말로를 짐작했다.
금술을 사용해 카렌의 기억을 들여다본 황제의 입술이 희미한 곡선을 그렸다.
“끅! 폐… 하…!”
카슈레인은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는 카렌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으며 제 수족에게 명했다.
“에이미 모렌을 데려와라.”
“예, 폐하.”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카렌의 사체를 손에서 놓은 카슈레인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술잔을 기울였다.
드래곤.
성검과 함께 그토록 찾아다녔던 존재.
‘진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겠지.’
수백 년 동안 역사 속에 등장한 적 없는 드래곤이었으나, 황제는 카렌 시어스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에이미 모렌의 낯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드래곤, 혹은 드래곤이라 착각할만한 무언가를 목격했음이 분명했다.
“하하!!”
그는 입술 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드래곤이든, 그 비슷한 무언가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제국민들을 속일 수 있을 만큼 드래곤에 근접한 무언가라면 그것으로 족했으니까.
‘이미 금술을 통해 충분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부족한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 표방할 만한 무언가였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공작의 딸인 리엘리 로베르도, 죽은 형제인 유젠의 아들 아르반 카넬로웰도 이렇게 제 쓸모를 다하는데….
‘황태자랍시고 하나 있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지 않아.’
황태자라고는 하나 덜떨어진 팔푼이에 불과했지만 카슈레인 본인을 위협할만한 외척 세력이 존재치 않았으니, 아들의 가치는 그만하면 족했다.
그에게 있어 아들이란 단지 명목상의 후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비록 친아들 또한 아니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저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면 그만이었다.
‘그나마 흑마법을 통해 제법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두었으니.’
쯧. 그는 작게 혀를 찼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는 놈을 아들이랍시고 후계로서 모자라지 않게 키우기란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었다.
금술에 손을 댄 이상 카슈레인은 자식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황후가 남몰래 아이를 뱄음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적당히 후계를 하나 만들어야 하던 참에 일이 더 편해졌으니까.
물론 그 뒤에 황후는 카슈레인의 손에 명을 달리하게 됐지만.
‘저리 무능할 줄 알았다면 아르반 카넬로웰을 데려다 놓았을 테지만.’
후계의 무능은 곧 카슈레인 자신의 명예에 손상을 입힌다.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젠.
모든 면에서 카슈레인에게 뒤처졌던 그의 형제였지만 그 자식 하나만큼은 상당히 쓸만하다 못해 비범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황태자가 된 라이셀이나 대공인 아르반 모두 그의 권력의 양분이 되었지만, 이전에는 답지 않게 후회했던 적도 있었다.
아르반 카넬로웰을 제 자식으로 키우지 않은 것에.
상념에 잠겨있던 카슈레인이 빈 잔을 채우는 시종에게 손짓하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그는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요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아르반에게 대해 생각했다.
제 권력과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카슈레인이 반란을 꾀했던 유젠 카넬로웰의 아들을 살려둔 동시에 견제한 이유.
바로 일신이 지닌 강력한 무력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죽이려 했다. 반란 분자의 아들이었으니.
그러나 제가 가진 것을 이용해 권력을 넓히기는커녕 영지에 처박혀 얌전히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에 생각을 바꿨다.
편하게 이용하는 쪽으로.
‘여태 조용하기에 제 주제 파악은 되는 놈이라 여겼거늘.’
요즘 들어 부쩍 눈에 걸리는 행보가 늘었다.
로베르 공작가의 공자, 공녀와 교류하며 친분을 쌓는 것으로 모자라, 사교계와 정계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기까지.
‘슬슬 처리할 때가 된 건가.’
카슈레인의 눈빛이 탁해졌다.
그러나 놈을 처리하려면 카슈레인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터였다.
아르반 카넬로웰의 어미처럼 독살이 불가하고, 그 일신의 무력을 넘어설 자가 없을 테니까.
다만, 즉시 움직일 수는 없으니 때를 살펴야 했다.
* * *
“건국제가 얼마나 남았더라.”
“일주일.”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에 율렌이 대답했다.
나는 눈동자만 도록 굴려 녀석을 바라봤다.
“일주일… 진짜 코앞이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한 세 개쯤 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으니까.
황궁에서 세리나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공작을 대신해 공무를 수행하며, 더 나아가 공부까지 병행하고 있다.
거기다 중요한 몇몇 귀족들의 티파티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마법도 익혀야 하고… 이러다 아르반 얼굴 까먹겠다, 까먹었어.”
작게 한탄하며 다 식어버린 커피를 후룩 들이켰다.
이거라도 마셔야지 남은 서류작업을 제정신으로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 보고 있는 건 단순 검토만 하면 되기 때문에 방에서 편하게 이러고 있지만, 낮에 처리하는 업무는 죄다 머리를 싸매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 다반사였다.
“아… 진짜 너 없었으면 나 벌써 쓰러졌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쓰러지지 않아.”
“…반대로 생각보다 쉽게 쓰러지기도 해.”
“내가 있는데 그럴 리가.”
그렇지…. 최고힐링팩터가 있는데 내가 쓰러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얌전히 수면 쪼개가며 공부하고 일하고 움직일 수밖에.
어쩐지 눈물이 앞을 가릴 것 같다가도 곧장 메말라 사라져 버렸다.
일에 치이니 사람이 피폐해진 모양이다.
‘아, 이래서 초대 황제가 그렇게 잠을 안 잤던 건가 봐.’
이쯤 되니 초대 황제가 워커홀릭이 아니라 단순히 정말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