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짙은 남빛 머리카락과 연한 하늘빛 눈동자. 그리고 이 연회장의 누구보다 화려하고 값비싼 보석과 의상을 두르고 있는 남자.
‘황태자, 라이셀 샤루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내가 먼저 그에게 고개를 숙이자 사무엘 역시 나를 따라 예를 갖췄다.
‘그럼 저쪽이 황태자비, 프리실라 블란드겠군.’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프리실라의 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그 내실이 단단한 눈빛이 미약한 호의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귓가로 흘러내리는 탐스러운 크림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로베르 공녀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는데, 이리 마주하니 좋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비 전하.”
프리실라와 내가 가벼운 인사를 나누자, 황태자가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곧바로 말을 붙여왔다.
“로베르 공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오늘을 상당히 고대했지. 과연, 타계한 공작부인이 그토록 아름다웠다더니 그 미모를 빼닮았군.”
고대? 고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황태자비가 보는 앞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이건 또 뭔가 싶었다.
‘생긴 대로 노는 건가.’
분명 잘생겼지만 묘하게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다른 이 같았으면 억지로라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황태자에게는 아니었다.
‘아직 황태자가 황제와 같이 흑마법 실험에 가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황상으로는 그 역시 황제와 같은 족속임이 틀림없었다.
10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법에 아무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황태자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재능을 드러내며 승승장구했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하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아직은 그랬다.
본래라면 내가 검은 마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그에 대해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이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니 알 길이 없었다.
…크게 상관은 없겠지. 황태자가 직접적으로 흑마법에 관여를 했든 안 했든,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다.
나는 화려한 공작새 같은 황태자에게서 눈을 떼고 프리실라 블란드를 살폈다.
원작의 아몬은 차기 황제에 대해서는 멍청하고 오만하다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그에 반해 황후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은 평을 내렸었다.
물론 짧은 두어줄 정도의 대사였을 뿐이라 그 ‘황후’가 지금 내 앞에 있는 프리실라 블란드인지는 확신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현재 원작의 황후에 가장 근접한 사람임은 분명하지.’
황태자와 황제를 끌어내린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우리 쪽으로 포섭하면 좋을 텐데.
물론 그녀가 흑마법과 관련이 없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프리실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무슨 용건이라도 있느냐는 듯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냥 살짝 웃어 보이며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는 말을 끝으로 사무엘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 뒤로 진득한 시선이 느껴져 힐끗 고개를 돌리니 황태자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미간을 좁히며 둘에게서 더욱 멀어진 나는 가까운 곳에 있던 인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아,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라티에 백작가의 장남, 폴린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식은 내가 제게 먼저 말을 붙일 줄 몰랐는지,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폴린 라티에 백작 영식.
연회에 참석하기 전, 미리 사전 조사했던 권세가 집안의 자제 중 하나였다.
남들에게는 설레는 사교계 데뷔일지 몰라도 내게는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없는 기회였다.
가능한 많이, 영향력 있는 가문의 가주 혹은 자제들을 만나봐야 했다.
* * *
“후우….”
본래 리엘리의 시녀였던 에이미는 조용한 복도를 가로지르며 작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미친 듯이 쿵쿵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데뷔탕트를 참석하는 리엘리 공녀의 시중을 들고자 전속 시녀 중 하나인 에바가 자리를 비웠고, 세바니 또한 막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올라왔다.
그녀는 익숙하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마주하는 리엘리 로베르 공녀의 방문 앞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괜찮아, 이번 일만 잘하면….’
그녀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전, 리엘리 공녀의 전속 시녀로 일하던 당시 혹시 모른다며 카렌이 몰래 복사해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굳이 이런 것까지 있어야 할까, 싶었지만 지금 와 돌이켜보니 카렌이 옳았다.
‘…이번만 잘 넘기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겠지.’
지금 시간이면 공녀의 방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침실로 들어가서 값나가는 보석을 아무거나 하나 가지고 나와 튜나 쌍둥이의 방에 몰래 넣어두기만 하면 된다.
그럼 그 꼴 보기 싫은 쌍둥이들은 매질 당해 쫓겨날 테고, 자신과 카렌은 다시 본래 자리로 복직할 수 있겠지.
에이미는 결심을 굳히고 입술을 꾹 다문 채 방문을 조심히 열었다.
“……!”
그리고 조심스레 안쪽으로 발을 들이기도 전에, 에이미는 그 안에 자리한 눈을 의심케 하는 한 생물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새된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잠시간 뻣뻣하게 굳어있던 에이미는 그대로 문을 닫고 미친 듯이 뛰어 카렌에게 향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금품을 훔쳐 쌍둥이를 쫓아내겠다는 생각 따위는 잊힌 지 오래였다.
“카, 카렌! 카렌!”
“에이미, 왜 그래. 들키기라도 했어?”
카렌은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에이미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혹시나 일을 그르쳐 들키게 되는 경우까지 염려해 자신이 아닌 에이미를 보낸 것이었는데, 그 만약이 현실이 된 건가 싶었다.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에이미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목도한 존재를 카렌에게 털어놓았다.
카렌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눈을 부릅뜨고 되물었다.
“…드래곤이 있었다고? 아가씨 방에?”
이게 뭘 잘못 먹었나.
놀란 것도 잠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심과 불신이었다.
하지만 그런 카렌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에이미가 어울리지 않게 큰소리를 치며 부정했다.
“아냐! 정말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드래곤이 맞아. 예전에 그림으로만 봤었지만 분명해.”
카렌은 드물게 열변을 토하는 에이미를 지그시 바라봤다.
…거짓말 같지 않은데.
하긴,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을 헛것으로 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약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럼 더 좋은 쪽으로 이용할 수 있겠는데.’
카렌은 씩, 미소 지었다.
“믿어. 있잖아, 에이미.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이 정보, 황실에 넘기는 거야.”
“…뭐?!”
“드래곤을 봤다면서. 확실하다며. 그럼 확실에 이 사실을 얘기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무려 드래곤인 걸.”
초대 황제와 함께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오는 신수.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분명 엄청난 포상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거짓일 경우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카렌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때는 꼬리를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 * *
“하….”
사교계는 정말 기 빨리는 곳이었다.
앞으로는 사교계에 더 자주 발을 들여야 할 텐데… 그 생각을 하니 좀 아득해졌다.
이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바빠질 것이고, 그래야만 했다.
연회에서 돌아온 지금도 벌써 내 앞으로 도착한 초대장이 여럿 있었다. 물론 그 모든 초대에 응하겠다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최대한 많이 참석하는 쪽이 좋을 터였다.
‘아르반이랑도 얼마 얘기하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앞으로는 더 보기 힘들겠지.’
제국에 단 하나뿐인 공녀인 내 데뷔탕트였을 뿐만 아니라 황태자는 물론 정계의 중요 인사까지 대거 참석하다 보니, 아르반과 서로 한가히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르반과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 바삐 움직이고 사람들을 포섭해야 나중에 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
‘그렇다고 해도 진짜 적성에는 안 맞는다.’
연회장에서야 하하 호호 쉴 새 없이 떠드느라 이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지만 저택으로 돌아와 마음이 풀어지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
“…응, 왜?”
나른하게 누워 휴식을 취하다가 나를 부르는 율렌에게 반사적으로 답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 같으면 내가 돌아오자마자 신나게 떠들었을 녀석이 오늘따라 유독 조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가 네 방에 다녀갔어. 아마도… 아니, 내 존재도 분명 탄로 났을 거고.”
“…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단번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초 뒤,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율렌에게 물었다.
“아니, 세바니가 다녀갔던 거 아니고? 문을 잠가뒀는데 누가 다녀갔을 리가.”
“열쇠로 열고 들어왔어.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곧장 밖으로 나가더라고.”
“세바니가 잠깐 들어왔다가 나갔을 수도….”
“확인했어. 들어온 적 없다고 했고.”
“…….”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천장을 바라봤다. 눈앞이 아득했다.
‘망했구나.’
오직 그 생각만이 뇌리를 가득 채웠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히 용의자를 추려보았다.
공작과 집사는 모두 저택을 비웠었다. 에바와 세바니도 아니고, 그렇다면 시녀장인데… 아까 들어오며 마주했던 미라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미라가 딱히 연기에 소질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이전에 리엘리 앞에서 여실히 드러내 보였던 당황한 낯을 돌이켜봤을 때, 만약 침입자가 그녀라면 조금이라도 티가 났을 것이다.
“…열쇠를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이 없어.”
“복사했을 가능성은?”
“없… 지 않네.”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열쇠를 복제했을 만한 유력한 용의자를 떠올렸다.
에이미, 카렌.
이전 리엘리의 전속 시녀였던 그녀들.
물론 시녀장이 나 다른 이가 가지고 있던 열쇠를 누군가가 남몰래 복사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 단번에 떠오르는 사람은 그녀들이었다.
“율렌, 만약에 네 정체가 탄로 난다면 이번에는 에바나 세바니 때처럼 조용히 넘어갈 수 없을 거야. 회복은 어때.”
“나쁘지 않아. 어지간한 마법은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고.”
마력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약간 풀이 죽었던 기색은 어디 갔는지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대로 내 존재가 드러나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어. 미안하다.”
“미안하기는. 내 방 단속은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녀석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람 마법이나 결계를 쳐뒀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그럴 만한 마력이 회복됐음에도 내가 방심한 탓이야.”
나는 율렌의 침착한 자기반성에 묘한 기분이 되었다.
마력이 회복됨에 따라 정신 연령이 유아기를 넘어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사건을 겪고 나니 확 실감이 났다.
아, 이 녀석이 정말 전과는 달라졌구나.
그게 든든하게 느껴지는 한편 조금 낯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