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하아….”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티베온은 인상을 구기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복잡해 보이는 그 얼굴에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무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이제 아버지의 관심에 연연할 나이는 지났고, 저나 아몬의 생활을 알아서 할 수 있을 정도는 되거든요.”
“…미안하다. 멀리 있다고 등한시할 게 아니라 좀 더 신경 썼어야 했어. 그때 그렇게 바로 왕국에 돌아갈 게 아니었는데….”
티베온은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있었다.
비록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지만 가주의 권한은 공작에게 있었다.
‘그리고 임시 가주의 권한을 넘겨받지 않는 한, 다른 가문의 일에 간섭할 권리는 없지.’
그게 아무리 피로 이어진 가족이고, 한 나라의 대공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럼에도 티베온은 내게 그때의 일을 사과했다.
“정말 괜찮아요. 외숙부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그냥 조금 힘들어서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그런 시기도 지났고… 무엇보다 아몬과 함께 생활하는 지금이 좋거든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정작 리엘리에게 사과해야 할 인간은 따로 있거늘, 엉뚱한 사람만 내게 미안하단 말을 건네오니….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티베온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무어라 말을 더하려는 순간.
그와 마주 서 있던 나는 온실 가까이 다가오는 사용인을 보고는 슬쩍 눈매를 좁혔다.
“내가 네게는….”
그런 나를 보고 있던 티베온이 말끝을 흐리며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실례하겠습니다. 각하, 가주님께서 준비를 모두 마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네. 곧 가지.”
티베온은 제 말이 중간에 끊겨 불만스러운 눈치였으나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가 사과를 계속해 왔다면 곤란하기만 했으니까.
나는 그가 다른 화제를 꺼내기 전에 냉큼 먼저 입을 열어 그가 다시 사과해올 여지를 잘라냈다.
“생각해 주신 마음만으로 감사해요. 아버지가 기다리신다니 어서 가보셔야죠.”
“…그래. 미안하다.”
얘기하다 말고 자리를 뜨게 돼서 미안하다는 건지, 그 이전의 사과에 대한 연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 얼굴이었다.
* * *
티베온과 공작이 황궁으로 떠나고 나니 어쩐지 저택이 고요해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적어도 내 마음은 한결 편해지긴 했지.’
이래저래 불편한 사람이 둘이나 사라졌으니.
그 덕분에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데뷔탕트를 준비할 수 있었다.
“아니, 근데 그쪽은 왜 황궁으로 안 가고 남은 거죠?”
“그쪽이라니, 사무엘이라고 부르라니까.”
“사무엘. 왜 남은 거죠.”
내가 즉시 정정해 다시 묻자 그제야 어깨를 으쓱인 그가 대답했다.
“아버지만 얼굴 비치면 충분하다니까? 어차피 나나 아드리안은 덤으로 딸려온 거나 다름없어. 건국제에만 참석하면 그만이지.”
실질적으로 사절단을 대표하는 이는 티베온이긴 하지.
“아드리안은 따라갔으니 나 하나쯤이야.”
사무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흠….”
나는 그런 사무엘을 빤히 바라봤다.
‘티베온과 아드리안은 건국제까지 황궁에서 머물 확률이 높겠고, 이후에야 공작저에서 잠시 체류하다 돌아갈 테고.’
그렇다면 여기 남은 사무엘은 건국제가 시작될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을 터였다.
‘내 데뷔탕트 파트너를 부탁하기 좋을지도.’
데뷔탕트는 매년 건국제를 겸해서 열리는 게 보통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 생일이 지났음에도 아직 사교계에 정식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르반의 생일 연회에는 이례적으로 참석하긴 했지만, 나를 제외하더라도 친분 있는 귀족 가문 간에 종종 있는 일이기도 했다. 주로 성인이 되기 전 약혼 관계에서 많이 있는 경우지만… 하여튼 그랬다.
건국제 첫날 데뷔탕트가 이뤄지고 둘째 날부터 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건국 4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에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평소와 비교도 안 될 규모로 초청했다.
그렇다 보니 어리숙한 영애와 영식들을 타국의 여러 인사에게 선보이는 게 불안하다는 여론을 이유로 이번만큼은 데뷔탕트 일정이 앞으로 당겨졌다.
이와 함께 데뷔탕트에서 사교계에 첫발을 디디는 영애들이 가족을 파트너로 삼는 건 당연한 관례였다.
오라비가 없다면 아버지가 에스코트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간혹 사촌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아무래도 공작보다는 사무엘 쪽이 백배는 편하겠지.’
이전의 공작이라면 사무엘을 파트너로 데뷔탕트에 참석하겠다는 내 말에 격분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늘 공작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았다.
세리나 로베르의 시체를 끼고 있기 때문일까.
나를 향한 공작의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사실이 몸소 체감되었다.
솔직히 그 사실 하나만큼은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공작의 눈길은 여러모로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들었으니까.
“사무엘. 건국제까지 뭐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에요.”
“글쎄. 딱히 생각해 둔 계획은 없는데…. 본래는 공작에 대해 조사해 볼 생각이었지만 리엘리 네 덕분에 이미 그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되었으니.”
“크게 할 일 없으면 제 데뷔탕트에 함께 참석해줄래요?”
“…내가?”
사무엘은 뜻밖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다 이내 아, 하며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런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 테지.”
“네.”
“좋아.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쁠 것 없지.”
나는 그가 제안을 받아들이자마자 지체 없이 편지를 작성해 멜라니스 가로 보냈다.
함께할 상대가 바뀌었으니, 얼른 내 담당 디자이너님께 그 소식을 고해야 했다.
* * *
원체 데뷔탕트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도 했고, 그만큼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새 당일이 되어있었다.
‘…피곤하네.’
저택에서만 있었음에도 마법 연습하랴, 공작이 맡긴 업무를 처리하며 배우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바빴냐면, 데뷔탕트 전에 작업을 마치려 했던 초상화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아몬의 것은 완성되었음에도.
‘진짜 원래부터 화가였다고 해도 믿겠다니까.’
나는 머리를 정리해주는 시녀들의 손길을 받으며 힐끔, 눈동자를 굴려 한쪽에 걸린 아몬의 초상화를 보고 히죽 미소 지었다.
너무 잘 그려져서 한동안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기로 했다.
“아가씨, 다 되었어요.”
“응, 고마워.”
나는 마지막으로 전보다는 익숙해진 높은 구두를 발에 끼워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뷔탕트를 위해 로즈니가 제작해준 아이보리 색의 머메이드 라인의 드레스는 이전에 아르반의 생일 때 입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척 보기에도 화려했던 이전의 드레스와 달리 얼핏 차분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보석이 박혀있는, 그야말로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의상.
‘이거 잘못해서 보석 몇 개 없어져도 티도 안 나겠지.’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아몬의 배웅을 받고는 이윽고 나를 기다리던 사무엘의 손을 잡았다.
마차에 몸을 실으며, 작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데뷔탕트로 인한 긴장보다는,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느껴질 그 숨 막히는 검은 마력의 기운이 떠올라 마음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사무엘에게는 그런 내 모습이 영락없이 데뷔를 앞두고 긴장하는 어린 영애의 모습처럼 다가온 모양인지,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덕에 정신이 분산되어 좀 낫기도 했기에 굳이 사무엘의 오해를 풀어주지는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검문을 통과하고 황궁으로 나아가는 와중, 나는 이전과 달리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꼈다.
‘전에는 분명 이쯤에서부터 불쾌한 기색이 느껴져 왔는데….’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마차가 나가는 와중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마치 검은 마력 따위 황궁에는 존재치 않은 양, 고요하기만 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사무엘, 반지 한 번 꺼내 볼래요?”
성물로 확인해 보는 게 빠를 듯해 얘기하니 사무엘이 품에 숨기고 있던 반지를 꺼내 들었다.
“…무슨.”
나는 반지를 확인하고 잠시 말을 잃었다.
성물이, 투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에 놀란 것은 사무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유심히 성물을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상태가 이상하군. 본래는 이런 불투명한 색이 아닌데.”
사무엘의 의아하다는 어조에 나 또한 성물을 유심히 살폈다.
얼핏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보석의 정중앙 부분이 희미하게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한 듯해.”
“…그럴 만하긴 해요.”
이번 데뷔탕트는 아니지만 거의 연달아 진행될 건국제에는 각국의 인사들과 신전의 고위 신관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일 테니.
미리 무언가 준비를 해두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사무엘과 같이 성물을 지니고 들어올 수 있는 자들이 꽤 존재했으니까.
나는 어느새 다다른 본궁을 지그시 노려봤다.
다른 마력의 기운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황궁 내에 마력을 사용하는 아티팩트가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마력의 흐름이 읽히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대규모의 마력 차단 마법이 존재할 턱이 없었고, 있다 해도 사람이 펼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그렇다는 건 역시 금술을 사용했다는 거겠지.’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몸 상태는 좋았지만, 황제가 금술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사무엘은 내부로 향하는 동안 내게 다른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나 역시 궁 안의 분위기를 살피기 바빴기에 그와 대화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덧 연회장 문 앞까지 도착하였기에 나는 사무엘과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로베르 공작가의 리엘리 로베르 님과 솔렘 왕국의 사무엘 켈레나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는 우리를 호명하는 시종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리며 연회장을 훑어봤다.
일찍 도착한 편은 아닌지라, 어지간한 이들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이전 아르반의 탄신 연회에서처럼 경악 어린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때 못지않게 상당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전보다는 익숙하게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적당히 말을 붙이기 좋은 사람을 물색하는데, 그런 내 시야에 가장 먼저 공작이 들어왔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도 아닌데 한눈에 보이는군.’
눈에 거슬리는 게 먼저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공작은 의식적으로 내게 미소 지어 보였으나 심드렁한 태도가 한눈에도 잘 드러나 보였다.
이런 데뷔탕트 따위 대충 얼굴만 비치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함이 역력했다.
‘내 파트너 자리를 사무엘이 대신한다 했을 때도 별다른 소리가 없던 건 역시 나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어.’
홀가분하지만 동시에 기분 나쁜 일이기도 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우선 공작만 시야 범위에 들어오지 않으면 이 불쾌감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았다.
아르반은… 아, 저기 있네.
그간 아르반과도 따로 만난 새가 없었기에 유독 반갑게 느껴졌다.
‘오늘도 아르반이랑 길게 얘기할 시간은 안 되겠지.’
그도, 나도 서로 인맥 쌓기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시간이 곧 금이었다.
아르반은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옅은 웃음에 아르반의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흠칫 몸을 떠는 모습이 제법 재밌어서 기분이 조금 풀어지려던 찰나였다.
“로베르 공녀.”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니, 처음 마주함에도 누구인지 모를 수 없는 이들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