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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34화 (134/153)

134화.

* * *

“각하, 급보입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전령으로 인해 루퍼스 로베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세리나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세리나에게 정신이 팔렸다 하더라도 분별력을 상실하지는 않는지라, 루퍼스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겨 표정을 갈무리하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말해 보게.”

그러자 전령은 곧장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솔렘의 사절단이 공작저에 당도했다 합니다. 아무래도 즉시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솔렘.”

루퍼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티베온 켈레나프. 솔렘의 사절단이라고 하면 분명 그가 당도했을 터.

그는 작게 미간을 좁혔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다.

비록 마주한 적은 몇 없다지만 세리나가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가장 거슬리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그 남자였으니까.

제 딸, 리리가 솔렘의 왕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도 묵인한 일이었으니까.

리리가 제 품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유일하게 외부에 도움을 청한 일이었다.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기에 아이의 행동에 좀 더 제약을 둘 생각이었다.

그때, 보좌관인 레이먼드가 했던 조언이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각하, 여기서 더 공녀님을 옥죄게 된다면 공녀님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재고해 주시죠.”

레이먼드의 조언을 들은 루퍼스는 고민하다 그의 판단을 따르기로 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였으니까.

그렇게 루퍼스는 딸의 행동을 모른 척 넘겼다.

어차피 리리의 바람처럼 정말 그 아이를 솔렘으로 가게 놔둘 생각은 없으니,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티베온 켈레나프와 얘기를 나눠도 늦지 않았다.

아무리 본인이 결혼을 바라더라도 가주의 허락이 없는 한 성사될 수는 없었으니까.

루퍼스는 세리나를 두고 저택으로 향하며 잠시 잊고 있던 리엘리의 결혼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그간은 세리나가 리리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할 것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막상 되살아난 세리나는 리엘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일까, 기억이 온전치 못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떨까. 세리나가 되살아났다는 것만으로 루퍼스는 일단 만족했다.

세리나와 함께 지내는 와중, 그녀가 리리에 대한 말을 먼저 꺼낸 적이 없기에 루퍼스는 딸의 존재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다.

‘…솔렘으로 리리의 대체품을 하나 보낼까.’

흑마법을 사용해 리엘리와 흡사한 외형을 만들어 보내고, 진짜는 세리나와 함께 숨겨두면 좋을 것 같았다.

비록 세리나가 리엘리를 기억하지 못한다지만 같이 지내다 보면 분명 옛 기억이 돌아올 터였다.

‘만약 리리가 정말 내 손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리하고, 그러지 않는다면 조금 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레이먼드가 보고해올 것이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렇기에 그는 세리나와 둘만의 시간을 즐기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 * *

공작이 돌아왔으니 켈레나프 가문 사람들과 마주하는 자리를 가질 터였기에 중요한 얘기는 대략 마쳤겠다,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공작과 아몬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는 처음인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공작이 아몬을 무시할 것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니….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 거겠지.’

나는 오찬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곧장 아몬의 방으로 향했다.

아몬 역시 시녀장에게 미리 언질을 들었던지, 말쑥하게 잘 차려입고 머리를 깔끔히 정리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이는 나를 환영하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공작과 함께하는 자리인지라 아몬의 반응이 걱정스러웠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듯해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나는 아몬과 함께 정찬장으로 들어섰다.

‘이런.’

우리가 늦은 건지, 다른 사람들이 부지런했던 건지 공작과 켈레나프 가문 사람들이 모두 착석해 있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려던 나는 입구에서 잠시 못 박힌 듯 우두커니 멈춰 섰다.

정찬장으로 향하면서부터 흑마법의 기운을 쭉 느끼고는 있었지만 막상 들어서니 더할 나위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타고 올라와 내 신경을 자극했다.

“…누나?”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내가 이상했는지, 아몬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왔다.

그에 괜찮다는 듯이 작게 웃어 보인 나는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아몬과 내가 고개를 숙이자 티베온과 공작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신경 쓸 것 없다.”

“그래, 리리. 자리에 앉거라.”

나와 아몬, 두 사람을 다독인 티베온과 달리 공작은 오직 내게만 답을 했다.

애초에 공작이 다른 사람들 앞이라고 어설프게 아몬을 예뻐하는 척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티베온과 대공자들의 눈동자가 일순 아몬에게 모였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아마 모두 느낀 것일 테지. 공작이 아몬의 말을 무시했다는 걸.

나는 자리에 앉으며 한동안 얼굴 볼 일 없었던 공작을 곁눈질로 살폈다.

혈색 없는 낯은 이전과 동일했지만, 그 위에 그려진 표정이 확연히 달랐다.

‘황궁에서 일은 안 하고 세리나 로베르의 시체만 끼고 있다 돌아왔나.’

사뭇 온유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과 대비되게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검은 마력의 기운이 어찌나 진득한지, 이전에 율렌이 나를 보고 질색하던 게 떠오를 정도였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율렌.

괜스레 율렌에게 미안한 마음이 피어났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역겨움을 참아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공작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에게 더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공작에게 관심을 끄고 싶어 하는 것과 별개로 공작이 말을 붙여오리라 여겼는데, 그는 예상과는 달리 그저 웃는 낯으로 티베온과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애피타이저가 서빙되기까지 드넓은 정찬장을 울리는 소리라고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공작과 티베온의 대화가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식사를 시작하게 된 이후에는 오직 식기가 부딪치는 작은 소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때, 공작이 티베온에게 질문했다.

“황궁에는 언제쯤 방문하실 생각이십니까.”

“식사를 마치고 바로 길을 나설까 합니다.”

“마침 저도 황궁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으니 동행하면 어떨까요.”

공작의 제안에 티베온의 시선이 잠시 나와 아몬에게 머물렀다.

“…꽤 오랫동안 공작저를 비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궁에서의 일이 제법 골머리를 썩이는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한동안은 황궁에 머물러야 할 일이 많은지라… 리리.”

“네.”

“앞으로 급히 처리해야 하거나 굳이 내 손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우리 리리가 아빠를 대신해 처리해 줬으면 좋겠구나.”

“…네?”

나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공작을 바라보다 애써 구겨지려는 인상을 폈다.

그의 뜬금없는 요청에 황당한 건 나뿐이 아닌지 켈레나프 가문 사람 모두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티베온이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고는 턱을 굳혔다.

필시 공작에게 한 소리 하고 싶지만, 가문의 일이니만큼 참은 것일 터였다.

‘애당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아니니까.’

실제로 후계자 교육은 받은 귀족의 자제 중 성인이 되기도 전에 가주의 일을 어느 정도 인계받고 성인이 된 후에 곧장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도 존재하긴 했으니까.

“아빠가 일이 좀 많구나. 모르는 게 있다면 보좌들이 도움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그럴게요.”

“고맙구나. 우리 리리가 아빠를 도와준다니 걱정이 덜었어.”

걱정은 무슨, 보나 마나 황궁 어딘가에 숨겨둔 세리나 로베르에게 정신이 팔린 것뿐이면서.

나는 빈정거리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남몰래 조소했다.

나로서는 거절할 바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이제부터 내가 차기 공작으로서 본격적으로 저택과 영지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

‘과연 공작의 보좌관도 이번 일을 알고 있을지 궁금하네.’

내 앞에서 뻔뻔스레 공작의 눈을 가리겠으니 협조하라 지껄이던 레이먼드의 낯이 구겨질 것을 생각하니 불쾌한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듯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티베온이 돌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리엘리, 이대로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면 사용인들이 짐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할 듯한데 잠시 정원을 구경시켜 줄 수 있겠니.”

“물론이죠.”

나는 흔쾌히 답하며 반사적으로 공작을 힐끗거렸다.

공작이라면 내가 티베온과 단둘이 다른 얘기를 하려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을 분명 탐탁지 않아 할 터였다.

그러나 그는 티베온의 제안에 신경 쓰지 않는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온화한 아버지라도 되는 양 살짝 웃으며 ‘즐거운 시간 되셨으면 좋겠군요.’라고 티베온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어느 때보다 내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 * *

나는 정찬장을 나서기 무섭게 아몬의 안색을 우선 살폈다.

그러나 아몬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느 때처럼 예쁘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어른스러운 아이니 괜찮지 않음에도 일부러 티 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괜찮은지 물었다.

“아몬, 혹시 체하지는 않았니? 미안해. 누나가 신경 써줘야 했는데….”

검은 마력이 가져오는 소름 끼치는 감각과 더불어 별안간 판이해진 공작의 태도를 파악하느라 본의 아니게 아몬에게 소홀히 했다.

“아니에요. 편하지 않은 자리에서 눈에 띄는 것보다 조용히 나올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는 아몬의 작은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으로 공작과 함께하는 식사였는데 좀 더 신경 써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몬과 느긋하게 얘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일단 미안함을 뒤로 한 채 자리를 옮겼다.

외투를 걸치고 곧장 정원으로 향하니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티베온이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오너라.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고 싶지만, 여유가 없으니 조용한 곳에서 잠시 머물렀으면 하는데.”

“그러시다면 온실로 가죠.”

좀 찝찝해지긴 했지만,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그보다 적격인 곳이 없었다.

온실로 향하며 잠시 찬바람을 맞으니 공작에게서 느꼈던 검은 마력의 기운이 조금이나마 잊히는 듯도 했다.

“리엘리,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공작이 너희에게 신경 써주지 않는 눈치더구나. 특히나 아몬에게.”

그는 사용인들과 완전히 분리된 온실로 들어서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내게 용건을 전달해 왔다.

“혹시 그 때문에 솔렘으로 올 생각을 하게 된 거니?”

정확히는 내가 아닌 리엘리가 그런 심정으로 타티아나에게 편지를 보냈더랬다.

제 나름대로 공작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다지만 그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또 모르겠어.’

알고 있다면 이렇게 순순히 티베온과 내가 둘이서 얘기할 자리를 깔아줬을까?

하다못해 사용인들이라도 주변에 배치해 대화를 엿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의아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네, 맞아요. 그런데 아몬이 너무 걸리더라고요. 제가 떠나면 그 애 혼자 남게 되니까요.”

원작의 리엘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렘으로 떠나버리지만.

그런데, 과연 원작에서 리엘리가 무사히 솔렘에 도착해 잘 살았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이후의 얘기는 소설에 언급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공작이 순순히 리리를 보내주었을 것 같지 않았다.

‘…찜찜한 생각은 하지 말자. 어차피 이제 일어나지 않을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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