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그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사무엘은 너무하다는 듯이 과장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되지도 않는 우는 시늉을 했다.
“흑흑… 리엘리, 우리가 아무나는 아니잖니.”
“장난치지 마시고요.”
리엘리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핀잔을 놓자 다시 어깨를 편 사무엘이 턱을 쓸며 답했다.
“장난은 맞지만, 빈말은 아니었어. 예전부터 여동생이 갖고 싶었거든. 봐서 알겠지만,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성격이 그래서 영 대화할 맛이 나질 않아.”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고요?”
“그럼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만….”
“어차피 약혼하게 되면 늦든 빠르든 솔렘으로 올 생각이잖아. 앞으로 두고두고 볼 사이에 이 정도야.”
‘비단 그뿐만은 아니지만.’
뒷말을 삼키며, 사무엘은 순진한 척 웃어 보였다.
사무엘이 리엘리에게 전달한 이야기는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다.
사실 그가 리엘리의 약혼 상대에 대해 조사한 것은 그녀와 좀 더 쉽게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
공녀인 리엘리와 가까워져 공작이 벌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떠보기 위해서.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매일 같이 저와 비밀리에 진행되는 연구를 함께할 생각이 없는지 제안하는 서신을 보내던 양반이 하루아침에 무소식이 되었으니, 궁금하지 않고 배길 턱이 없었다.
‘내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한 미끼였다면 훌륭하다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지.’
로베르 공작이 사무엘의 아버지인 켈레나프 대공의 눈을 피해 보내온 서신에는 늘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비밀리에 진행하는 시험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사무엘은 처음 그 서신을 받았을 때 코웃음 치며 곧장 활활 타고 있는 난로에 종이를 구겨 던져버렸다.
마력이란 타인이 늘려주겠다고 용을 써도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라 하면 그건 정도가 아닌 사도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흑마법이고.’
사무엘은 제 손에 끼워진 핏빛 보석이 박힌 반지를 바라봤다.
성물을 본떠 시시각각 색이 변하도록 만든 인조 보석이 아닌, 진품이었다.
본래는 투명한 빛을 띠지만 단 하나, 오직 검은 마력에는 반응하는 물건.
만에 하나를 위해 어렵게 공수해온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야 하고 저의 넘겨짚기에 불과했으면 좋았겠지만,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부터 성물이 꺼림칙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사무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 실력이 탐나 제안한 거겠지만 사람을 잘못 봤어.’
비록 왕국과 집안에서 망나니 취급을 받고 있고, 그에 대해 개의치도 않았지만 단 하나.
마법에 한해서는 실력만큼이나 높은 프라이드를 지닌 이가 사무엘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때와는 생각이 달려져서, 이곳에 남을 거예요. 물론 결혼할 생각도 접었고요.”
“결혼 안 할 거라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사무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근 몇 년 동안 꾸준히 이어진 공작의 서신을 무시하고 살아왔건만, 몇 달 전 아버지인 켈레나프 대공과의 대화에서 로베르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리엘리 로베르의 약혼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로베르 공작의 딸인 그녀가 공작에게 비밀리에 타국 국왕께 결혼 상대를 구해달란 편지를 전달했다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지.’
호기심이 동했고, 사무엘은 제 궁금증을 충족시킴에 있어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베르 공작이 어떤 짓을 벌이고 있기에 그 집안의 장녀가 이 먼 타국까지 시집을 오겠다는 소리가 나왔을까.
그런데 이제 와서 저리 태도를 바꾼다니.
분명, 리엘리가 생각을 바꿨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을 터였다.
리엘리가 도움을 청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솔렘의 왕이었다.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저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탄을 했다기에는 상대가 부적절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는 사무엘을 보고 그가 어처구니없어 말문이 막혔다 여긴 리엘리가 살짝 눈길을 피하며 변명을 더 했다.
돌이켜보니 너무 충동적이었던 것 같다, 아직 동생이 어리고 공작도 아몬이 아닌 리엘리 자신을 후계자로 여기고 있는 만큼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고.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줄줄이 튀어나오는 이야기에 사무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리엘리가 약혼에 거절 의사를 밝힌 이상 드래곤 이외의 화젯거리가 없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비밀에 부치던 드래곤이 제게 들통난 시점에 잔뜩 경계하고 있을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건 여러모로 좋을 것이 없었다.
“…네 의사가 그렇다면야. 아버지께 잘 설명하고.”
사무엘이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듯한 기색을 취하자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성물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율렌이 입을 열었다.
“너, 그게 뭔지는 알고 있는 거겠지.”
사무엘은 대뜸 제게 질문해오는 율렌으로 인해 일순 당황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드래곤인지라,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고 착용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물건은 아닌지라.”
“그래, 세베스 님의 성물이 대신관도 아니고 일개 귀족일 뿐인 네 손에 끼워져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아, 하하! 이게 세베스 님의 성물이란 것까지 알 수 있나?”
사무엘은 묘한 표정으로 성물을 내려다봤다.
“내가 너무 조심성이 없긴 했지. 아무리 성물을 본뜬 모조가 판을 친다지만 진짜를 알아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못 했어. 하지만 설마 정말 흑마법과 관련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말이야.”
그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성물을 빼내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중얼거렸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훔친 건 아냐. 정식 허가를 받고 잠시 빌린 거지.”
“안 물어봤다.”
“흠, 그런데 드래곤, 너는 이게 세베스 님의 성물이란 걸 알았지?”
“…모르길 바랐으면 애초에 보이질 말았어야지 않나? 대놓고 보이는데 그걸 모르겠어?”
율렌이 어이없다는 듯이 질문하자 사무엘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이라 해도 신성력을 느낄 수 있다는 문헌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잠깐. 그리고 보니 샤루스의 초대 황제와 함께했다는 드래곤의 이름이….”
곧이어 그는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입을 벌렸다.
그리고 리엘리는 옆에서 이마를 짚었다.
* * *
율렌의 정체를 알게 된 사무엘은 순순히 공작을 의심하게 된 정황과 성물을 빌려오게 된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나는 공작이 그에게까지 연락을 취했었다는 사실에 진저리쳤다.
공작은 세리나의 부활 실험을 위해 유능한 마법사 필요했을 터였고, 사무엘은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었겠지.
공작이 그를 포섭하려 했던 것도 이해는 갔다.
‘쉽게 넘어올 줄 알았는데 예상처럼 되지 않았던 거지.’
그러는 와중 실험은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었고, 더는 충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해 연락을 끊은 것일 터였다.
나는 사무엘이 의문을 품고 있는 사항을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해주었다.
이미 흑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고, 늦든 빠르든 황궁에 발을 들인다면 성물을 들고 있는 그가 진실에 닿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판단했다.
사안이 심각하기 때문인지 사무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렇게 보니 정말 리엘리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다른 얘기를 이어가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자 희미하게 웃어 보인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궁금한 부분은 덕분에 해결했으니까 드래곤에 대한 건 비밀 지켜줄게. 신경 쓰지 마, 입은 무거우니까.”
* * *
사무엘이 돌아가고 그의 입을 보다 확실하게 막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말하지 않을 거야.’
율렌에 관한 정보를 누군가에게 넘겨 이득을 챙길 요량이었다면 내게 먼저 원하는 바를 제시했을 터였다.
그렇게 이득을 챙기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넘긴다 해도 내가 그를 막을 길은 살인 멸구뿐인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냉정하게 생각하려 노력하며 발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을 떨쳐냈다.
그리고 언제쯤 나를 찾을까 싶던 티베온은 다음 날 점심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나를 불렀다.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부름이었기에 즉각 몸을 움직였다.
“찾으셨어요.”
“그래, 앉아라.”
내가 자리에 앉아 티베온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하니 본론부터 말하는 게 좋겠지만,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고 싶구나.”
“말씀하세요.”
“공작이 너희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서 그러니.”
“네?”
“그게 아니라면 네가 굳이 먼 솔렘까지 오겠다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나는 의외의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리리였다면 무어라 대답했을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약혼자를 구해 다른 곳으로 도피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나 혼자 내렸다는 사실을.
“실은, 그에 대해 사과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번복해서 죄송하지만, 약혼에 관해서는 없던 일로 하고 싶어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려주겠니.”
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도 티베온은 동요하는 대신 차분히 이유를 물어왔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변명을 늘어놓았다.
변명이라고 해야 할까, 지극히 사실만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때는 제가 심리적으로 힘들어서 투정을 부린 것 같아요.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이제는 로베르 공작가를 짊어지겠다 마음을 굳혔다는 확신은 있고?”
“예, 물론.”
공작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을 책임지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물으마. 거절하면 돌이킬 수 없어. 정말 이곳에 남을 테냐?”
“예.”
“…그래, 네 의지가 그렇다면 존중해야지. 폐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마.”
“감사합니다.”
의사를 번복한 것에 대한 문책을 피할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티베온은 내 생각보다 더 리엘리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게 고마운 한편, 리리가 왜 그에게 기대고 싶어 했는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작은 노크 소리가 울리며 시녀장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방 안의 온기를 떨어트렸다.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 각하, 아가씨. 가주님께서 귀환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