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리엘리, 너 아냐?”
나는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발코니 아래를 바라보자 상체를 밖으로 내민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무엘이 환히 웃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밖으로 떨어질 듯한 그의 자세에 놀라다가 내 품에 율렌이 안겨있단 사실을 떠올리고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율렌을 놓아주자 녀석도 내 의도를 눈치채고 조용히 날아올라 사무엘이 볼 수 없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다시 고개를 떨궈 사무엘을 내려다봤다.
“리엘리, 내 말 듣고 있어? 더 크게 말해줄까?”
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세임에도 편안한 낯빛을 유지하고 있는 사무엘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듣고 있으니까 그 정도면 됐어요. 그보다 위험하니까 내려와요!”
“누구랑 대화를 나누는 듯해서 내 말이 들리지 않나 했지. 신경 쓸 것 없어. 떨어질 일 없으니까. ”
…보통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말을 걸지 않는 게 예의지 않아?
“알면서도 말을 걸 만큼 중요한 용건이라도?”
“중요하고말고.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계속 대화를 나누기도 그렇고 하니 잠깐 올라가도 될까?”
“…지금요?”
“손님은 아니었을 것 아냐. 그럼 상관없지 않나. 바빠?”
상식적으로 방금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또 다른 손님을 맞이했을 리 없다 여긴 듯했다.
나는 잠시 율렌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상관없을 것 같네요.”
어차피 그가 온다면 응접실에서 마주하면 될 테니.
그리고 저쪽에서 언급한 중요한 일이란 게 무엇일지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전할 말이 있어 처음부터 나를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봤던 건가.’
혹시 사무엘도 리엘리가 타티아나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는 걸까?
그 때문에 내게 전할 말이 있는 거고?
사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내게 전할 말이 따로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는데 사무엘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에 나 역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돌아서는데, 뒤에서 탁- 하고 착지하는 소리가 들려와 순간 몸을 굳혔다.
“추우니까 들어가서 얘기할….”
“…….”
“…….”
나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소리를 지르려다가 가까스로 참아냈다.
경악스러운 건 율렌 역시 마찬가지인지 내 뒤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녀석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무시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미친놈아.’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마주한 사무엘은 생글생글 웃던 낯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음소거 버튼이라도 눌린 양 입만 몇 번 달싹이던 사무엘이 누가 봐도 어색한 손짓으로 율렌을 가리켰다.
“그, 어, 무슨, 아니, 뭐니?”
상대가 너무 당황하니 나는 오히려 조금이나마 먼저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사무엘의 손목을 낚아채 방안으로 이끌었다.
“어….”
당황했기 때문인지 사무엘은 어영부영 내 손에 이끌려왔다.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누가 지나다닐지 모를 밖에서 언성을 높였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안으로 들어서며 율렌에게 눈짓하자 자연스레 나를 따라 들어온 녀석이 꼬리를 발코니 문을 닫았다.
이제 무슨 소리를 내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터였다.
나는 곧장 그의 손목을 뿌리치듯 놓고는 사무엘을 쏘아붙였다.
“상식이라는 게 없어요? 들어오란다고 발코니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화가 나기보다 기가 막혀 머리가 아파져 왔다.
“내가 평소에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선은 지키고 사는 편인데….”
내가 근처의 소파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무엘이 슬쩍 내 맞은편에 앉으며 눈알을 굴렸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율렌이었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내가 소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자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 사무엘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물어봤잖아. 올라가도 되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누가 멀쩡한 계단이랑 문을 놔두고 발코니 벽을 타고 올라오는데요.”
“나?”
“내가 지금 질문하는 것처럼 보여요?”
“음, 아니…. 미안.”
제 나름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은지 새초롬한 눈매가 한껏 누그러졌다.
하지만 내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도 어느새 내 쪽으로 이동한 율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다 내 업보지 누굴 탓하겠어.
이래서 사람이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나 보다.
“드래곤, 맞지?”
“맞다.”
전에 세바니에게 존재를 들켰을 때와 달리 제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인지 율렌은 사뭇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묻는 사무엘이나, 제가 드래곤이 맞다고 시인하는 율렌이나 둘 다 내 골머리를 터지게 했다.
‘…애초에 율렌을 보고 드래곤 외의 다른 생명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
그러니 부정한다 해서 되는 일이 아닌 건 알고 있긴 하지만 저렇게 시원스럽게 인정하는 게 옳은 걸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전해주는 당황스러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또한, 사무엘은 내가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엘리, 네가 어떻게 드래곤을 데리고 있어? 황실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비밀리에 키우고 있는 건가. 보아하니 새끼 같은데 어디서 알이라도 데려다 부화시켰어? 아니지,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무엘은 내게 질문하는가 싶더니 곧장 상체를 수그려 율렌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나는 사무엘 켈레나프라고 하는데. 편하게 사무엘이라고 불러. 우리 작은 드래곤께서는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
“율렌. 그리고 작다고 하지 마라. 원래는 지금 모습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크지만 편의를 위해 이 크기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니까.”
“호오, 그래? 그럼 새끼가 아니란 말이네.”
사무엘의 보랏빛 눈동자가 실내의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사뭇 부담스러운 눈빛이었지만 그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율렌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율렌, 내가 예전부터 드래곤이라면 얼마나 마력이 풍부할지 궁금했거든. 마법을 배우기 전부터. 그래서 말인데 괜찮다면 마력 스캔을 한 번 해볼 수 있을까.”
사무엘은 제법 정중하게 물어왔지만, 질문과 달리 이미 손을 율렌의 코앞까지 뻗고 있었다.
율렌은 제 바로 앞까지 들이 밀어진 그의 커다란 손을 잽싸게 쳐내려다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는 콧방귀를 끼면서 으스댔다.
“한낱 인간인 네가 내 마력을 스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너와 난 격이 달라.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마탑주님의 마력은 스캔한 적이 있었는데.”
“인간이랑 내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할 수 있음 어디 한 번 해보던가.”
율렌이 꼬리를 내밀자 사무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잡아챘다.
그리고는 혼자 진지한 낯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잖아. 아, 드래곤은 얼마나 방대한 마력을 지녔을지 알고 싶었는데….”
“흥.”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싶었다.
‘…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지.’
드래곤을 마주했는데 한다는 소리가 뭐? 마력량이 궁금하니 측정해 보고 싶어?
얼핏 보기야 멀끔하니 잘생겼지만 말하는 걸 듣고 있으니 어딘가 핀트가 이상하다는 게 절감되었다.
“그래도 인생 헛살지는 않았네. 살아생전에 드래곤과 마주하기도 하고.”
“당연하지. 영광으로 알라고. 예전에 내게 말 한마디 붙이고 싶어 안달하던 마법사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나는 제 얼굴에 금칠하는 율렌을 바라봤다.
녀석은 제 발언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지 다소 부루퉁하고 뻔뻔한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아까 뭔가 이야기하려다가 말 잘려서 짜증 난 것 같은데.’
아마 감정이 사그라지면 다시 얘기해올 터였다.
이전 같았으면 바로 빽- 소리 지르고도 남았을 녀석이 저렇게 감정을 삭일 수 있다는 게 마력을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기도 했다.
“그런데 율렌, 리엘리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사무엘은 내게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율렌에게 던졌다.
그러나 기분이 상한 율렌의 입에서 좋은 말이 튀어 나갈 리가.
“알아서 뭐 하게?”
“어, 하하! 딱히? 그냥 궁금하잖아. 드래곤과 우연히 만나서 이렇게 지내고 있을 리도 없고.”
나는 율렌 대신 간략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우리 영토에서 발견된 에시트 산맥의 마정석 광산, 그곳을 시찰하다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고 우연히 잠자던 녀석을 깨워서 어쩌다 보니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아하….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너무 성의 없지 않아?”
그럼 성의 있는 변명을 만들어 낼 시간을 주시던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됐어. 한숨 쉬지 마. 내 앞에서 대놓고 한숨 쉬는 건 우리 아버지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말하기 싫다면 강요 안 해. 장난 좀 친 거니까 너무 정색하지 말고.”
“…….”
“진짜라니까? 왜 다들 내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네…. 물론 내가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름 가정교육을 확실히 받았다 이 말이지.”
아, 그러세요. 그래서 사람 피 말리는 질문을 그렇게 던지셨구나….
“제법 매너 있는 편이라고 자부한다만? 애초에 네가 거절했다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래요. 다 내 잘못이에요.”
나는 영혼 없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일축하는 편이 사무엘의 얘기를 받아주는 것보다 편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 * *
“그래서, 매너 있는 사무엘 님께서는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올라오셨던 거죠?”
리엘리는 단순히 불편한 화제를 벗어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사무엘 역시 그녀가 말을 돌리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애초에 꼬치꼬치 캐물을 의도는 없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 만났냐.’가 아니라 ‘드래곤이 리엘리와 함께한다.’라는 사실 그 자체였을 뿐이니까. 과정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아, 그게-.”
리엘리는 사무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 남자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문제를 다시금 떠올렸다.
약혼자 후보들.
사무엘은 제 나름대로 사촌 동생의 약혼자 후보로 괜찮은 이와 그렇지 못한 이를 구분해 제게 귀띔하려 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하루 이틀 내로 황궁을 방문하실 거야. 그 전에 너를 불러 얘기를 나누실 듯해서 선수를 치려고 벼르고 있었지.”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말했다.
“갸륵하지 않아? 이래 보여도 아무한테나 해주는 서비스가 아닌데.”
“아무한테나 해주는 게 아니면 저한테는 왜 얘기하는 건데요.”
애초에 사무엘과 자신은 사촌이라 할지라도 생판 남이나 다를 바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겨우 오늘 처음 본 저를 위해 내 약혼자 후보군을 조사하고 그 정보를 넘겨주겠다는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를 만나기 전부터 움직여야 했던 일이잖아.’
무슨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리엘리의 눈매가 저절로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