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상석에 앉은 중년의 남자와 그 양옆을 지키는 남자 둘.
‘대공의 자식들이겠지.’
비록 인사를 건네느라 곧장 고개를 숙여야 했지만, 이미 그들의 외모는 내 머릿속에 확실히 박혀 들어왔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외숙부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몬 로베르라 합니다.”
리엘리의 외숙부, 티베온 켈레나프는 아몬과는 초면이지만 리엘리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리엘리가 기억하는 과거에는 한 번뿐이지만 이전에는 몇 차례 있었어.’
가장 최근에 마주한 건 세리나 로베르의 추모를 위해서였다.
비록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가는 못 했지만 솔렘의 왕을 대신해 그녀의 묘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보니 그때도 공작 대신 리리가 이 사람과 함께 했었지.’
당시의 루퍼스 로베르는 거의 반쯤 실성 상태였기에 달리 함께할 사람이 없었다.
리리는 이미 잊었을지도 모를 과거였지만 내게는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로베르 공작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의 표정 역시도 선연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간 잘 지냈는지 모르겠군.”
“염려해주신 덕에 무탈했습니다.”
“다행이구나.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아직 나머지 둘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지만, 대공이 먼저 권하니 이쪽에서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나와 아몬이 착석하자 티베온은 그제야 제 아들들에게 눈짓했다.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 인사들 나누거라.”
“리엘리 로베르라 합니다.”
내가 형식적으로 고개를 까딱이자 앞서 자신을 소개한 아몬 또한 다시 한번 인사했다.
그러자 입이 근질거리는 표정을 앉아 있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뗐다.
“사무엘 켈레나프. 사무엘이라고 불러.”
티베온과 쏙 빼닮은 백금발의 청년이 자색 눈을 빛내며 씩 웃어 보였다.
마치 대공의 분신이라 해도 믿을 만큼 한 틀에 넣고 찍은 양 똑같은 외모였으나 둘의 분위기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세리나 로베르가 제 오라비와 흡사한 외형을 지녔었다지만….’
저 두 사람이 로베르 공작보다 더 나와 닮았단 건 솔직히 좀 당황스럽긴 했다.
특히나 저 사무엘이라는 남자는 리엘리의 사촌이 아니라 친오빠라 해도 믿을 정도였기에.
“켈레나프 대공가의 삼남, 아드리안 켈레나프라고 합니다.”
반면 이쪽은 앞선 두 사람과는 전혀 상반되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와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다소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까지.
더구나 적당히 체격이 다부져 보이는 사무엘과 달리 단단한 바위처럼 강인해 보이는 신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시선을 끌었다.
‘이 날씨에 저렇게 얇은 복장이란 것도 그렇고.’
뭐, 본인이 저게 편하다면 편한 대로 사는 거지.
대공의 아들이라기보다 사막의 전사라 말하는 쪽이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드리안 님께서는 추위를 많이 타지 않으시는 듯한데, 난방 조절이 필요하시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이런, 리엘리. 아드리안이 너보다 나이가 적단다. 편하게 부르렴.”
어…? 진짜?
티베온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둥글게 뜨자 아드리안은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사무엘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역력했다.
아니, 사람이 나이 좀 착각할 수도 있지.
‘더구나 액면가가 저러면….’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어리게 봐도 이십 대 중후반 이하로는 보이지 않았다.
“예, 누님보다 한 살이 적으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그나마 한 살 어리다는 게 좀 덜 충격적이긴 하네.
‘진짜 한 서너 살 어리다고 했으면 체면 다 버리고 기겁했을 텐데.’
그래도 조금 머쓱한 건 어쩔 수가 없어서 괜히 헛기침을 내뱉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그래, 아드리안. 미리 담당 시종에게 전달하면 신경 써줄 거야.”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누님.”
아, 기분 이상해.
목소리도 셋 중 가장 중저음이라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봐도 저쪽이 연상인 느낌인데….
나는 애써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연스레 사무엘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나랑 똑같이 생겼단 말이야.’
리엘리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아마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일었다.
“리엘리, 네가 왔다는 건 루퍼스 로베르가 부재중이란 뜻이겠지. 무슨 일로 저택을 비웠는지 알고 있느냐.”
“황궁에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정말 일 때문인지, 흑마법에 관한 일 문제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내 생각에 분명 후자 같단 말이지.’
그 일레이라는 흑마법사의 얘기를 전부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내심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있었다.
리리가 삼 년 전 목도한 세리나의 모습으로 유추해 보아,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면 그게 더 웃긴 일이기도 했고.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로베르 공이 정신을 좀 차렸는지 모르겠구나.”
티베온은 미미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로베르 공작의 모습을 반추하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지금도 업무는 잘 처리하는 듯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죄다 죽 쑤고 있고.’
죽은 사람에게 집착하느라 정작 살아있는 제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아끼던 딸이 세리나의 인체 실험을 목격하고 망가짐에도 한결같은 태도를 고수한다.
‘애당초 로베르 공작 역시 우리 아빠와 같았던 거야.’
리엘리를 사랑했던 게 아니라 세리나를 사랑했고, 그 외모를 닮은 리엘리에게 집착했을 뿐인 것이다.
아몬에게는 완벽한 무관심을 고수해 학대했다면, 리엘리에게는 애정이 아닌 집착을 보여 그녀의 숨통을 졸랐다.
그리고 그 집착은 결국 그녀를 망쳐버렸지.
“그건 직접 만나보시면 알 수 있으시리라 생각해요.”
나는 공작을 떠올리며 티베온의 질문에 답했다.
아마 내 표정 역시 티베온과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네 말이 맞다. 무릇, 남의 말을 오롯이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눈으로 살피고 판단함이 옳지.”
티베온은 한치의 흐트러지고 없는 꼿꼿한 자세로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섣부른 의심 역시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리엘리, 네 태도로 미루어 보아 로베르 공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할 것 같구나.”
“그편이 외숙부님께서 마음이 편하시리라 여겨지네요.”
십여 년 전에도 티베온은 지금과 같은 태도를 고수하곤 했다.
나를, 아니, 그 당시의 리리를 가엽고 안타깝게 여기며 공작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
나는 더 이야기를 이어갈 기색이 없는 티베온을 힐끗 바라보곤 공작가 시종에게 그들이 머물 곳으로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있다 보자, 리엘리.”
티베온과 아드리안이 응접실을 나섰고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난 사무엘이 나를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그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지만, 사무엘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있다가 나를 찾아오겠다는 말인가.’
조금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따로 할 말이라도 있나 보지.
나는 남은 수업이 있는 아몬을 먼저 올려보내고 사용인들까지 모두 자리를 비워 텅 빈 응접실을 둘러보다 티베온이 앉았던 자리를 눈에 담았다.
티베온 켈레나프는 내게 다소 불편한 존재였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리엘리가 어린 시절 보았던 그는 진심으로 자신과 아몬을 걱정해 주었던 이였으니까.
‘다만 그 친절로 인해 리리가 저 사람에게 연락을 못 한 것이었지만….’
동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공작가가 삐걱거리던 시기에 마주한 티베온은 어린 리리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할 만큼 상냥한 어른이었다.
일순 그를 따라 어머니의 나라로 떠나버리고 싶단 충동이 뒤따랐을 정도로.
그렇기에 리리는 티베온이 솔렘으로 돌아간 이후 그에게 재차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그에게 기대게 될 자신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지금보다 더 아버지와 동생을 원망하게 될까 봐.
궁지에 몰렸을 당시에도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티베온 켈레나프였으나 리리는 그에게 연락하는 대신 타티아나 솔렘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릴 적에는 단순히 그에게 기대게 될 자신을 두려워했다면 크고 나서는 이상적인 아버지와 같던 티베온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단 한 순간의 친절이었을 뿐, 티베온에게 리리는 그저 일순 동정을 베푼 조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에게는 이미 잊힌 기억일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그녀 자신 역시도 어린 날의 기억에 연연하지 않고자 했다.
‘원작에서는 분명 티베온이 리리에게 찾아와 약혼자 명단을 건넸겠지.’
아직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오늘내일 내로 나를 불러 따로 얘기를 나눌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원작의 리엘리, 리리는 그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이 감옥과도 같은 공작저를 벗어난다는 홀가분함?
아니, 아마도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겠지.
그러나 살기 위해 도망갔을 것이다.
‘그런데 공작이 이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리리의 딴에는 몰래 편지를 했다지만 그녀의 수족들은 모두 공작의 사람이었다.
정말로 공작은 그녀가 이곳을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음을 몰랐던 걸까.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옆에서 ‘솔렘의 인장이 박힌 마차를 봤는데, 만나고 왔어?’라고 질문하는 율렌에게 대강 대답하며 발코니로 향했다.
리리와 관련된 원작의 내용은 앞으로도 알 수 없는 영역인지라 내가 떠올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리란 생각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막상 나가자니 아직 좀 어수선하고, 손님들이 막 들어선 참인지라 모양새가 이상했다.
아쉬운 대로 방에서 바람이라도 쐬는 수밖에.
“하아….”
옆에서 알짱거리는 율렌을 품에 안고 의자에 앉아 얕은 숨을 토해냈다.
“나한테도 솔렘에서 온 애들 얘기 좀 해줘. 계속 방에서만 있는데 이런 소소한 재미라도 있어야지.”
율렌의 부탁에 나는 자연스레 조금 전 마주했던 얼굴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녀석은 나와 외적으로 닮았다는 티베온과 사무엘이 퍽 궁금한지 꼬리를 살랑이며 제 흥미를 드러냈다.
“궁금한데 사절단이 돌아가기 전에 완전히 힘을 회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아쉽네.”
여기서는 직접 만나지 않는 한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우니까.
“기회가 되면 볼 수 있는 날이 있겠지.”
“글쎄. 나중이 되면 내 흥미도 식어버리지 않을까.”
오, 자기 객관화가 제법 훌륭하잖아?
나는 녀석의 의견에 내심 동의했다.
흥미를 갖는 것도 잃는 것도 빠른 녀석이니 시간이 지나면 금세 시큰둥해질 가능성이 컸다.
“춥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느릿하고 고요하게 쏟아지는 함박눈이 더욱 시야에 선명히 들어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을 붙잡고 밖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 잠깐 사이 얼었는지 붉어진 손가락 사이로 눈송이가 스미며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춥다며.”
“춥지. 추운데 머리를 비우고 싶어서.”
“이러고 있으면 생각이 비워져?”
“어느 정도는.”
나는 난간에 쌓인 눈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잠깐 사이에 제법 많이 쌓였다. 당장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어쩌면 마차로 이동하기 어려울 만큼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
“리엘리, 거기 있어?”
그때 불현듯,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