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나저나 르미엘이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로즈니에게 듣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가 많이 놀랐을 터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
그는 내 입에서 르미엘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눈에 띄게 심란해 보이는 표정이 되었다.
“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놀란 게 사실이지만 금방 괜찮아진 듯했습니다.”
“직접 확인하신 게 아닌가 보네요.”
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묻자 루페르는 잠시 입을 다물다가 이내 슬쩍 근심을 털어놨다.
“…저도 그 아이가 걱정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다만?
“제대로 대면해 본 적이 없어 따로 찾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어렵다니요. 말 몇 마디 붙여주면 금방 좋아할 게 뻔히 보이던데.”
아, 이렇게 따지려 들었던 게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에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루페르는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고, 한 번 생각하고 대답했다 한들 조금 덜 직설적이었겠지만 결국 비슷한 지적을 했을 터였다.
“…면목 없습니다.”
“저한테 사과하실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놀랐을 어린 동생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셨다니, 반성하셔야죠.”
내가 훈계할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아무도 그에게 지적하지 않은 듯하니 나라도 말을 해줘야지 싶었다.
“르미엘은 누가 돌봐준 건가요? 로즈니? 아니면 백작 부인?”
“로즈니가 두어 번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여자는 제 아이라고 한들 돌볼만한 위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백작 부인을 언급만 했을 뿐임에도 루페르의 기색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어서 질문했다.
“백작께서는?”
“아버지나 클로레반 부인이나 똑같은 족속입니다.”
…그렇군. 로즈니에게 듣긴 했었지만 역시 루페르가 멜라니스 백작 부부에게 보이는 반감은 가히 최고조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럼 르미엘이 의지하는 어른은 대체 누구죠?”
루페르, 로즈니, 백작 부인, 백작.
멜라니스 백작가의 모든 사람이 르미엘을 돌보지 않았다면 그동안 그녀는 누구의 보살핌을 받고 살아왔는가.
“…유모와 집사가 돌봐왔습니다.”
“경께서도 어린 시절 그렇게 자라오셨나요.”
“아무래도 유모의 손에 키워지는 게 보통이지요.”
“아뇨. 제가 여쭤본 건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오직 사용인들의 손에서 자라오셨냐는 거였어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 경께서는 르미엘을 싫어하시나요?”
단순한 언급만으로도 그토록 혐오감이 치민다는 듯한 얼굴을 짓게 만드는 클로레반 백작 부인처럼?
나지막한 내 질문에 루페르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질문에는 답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단호하게 내 물음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루페르의 고개가 서서히 들리며, 쓰게 미소 짓는 그의 낯이 드러났다.
“사실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돌봐주는 이가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 여자와 르미엘이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도.”
“원망할 대상이 필요하셨나요.”
“필요치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게 르미엘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만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요.”
“…….”
그는 잠시 허공을 올려다봤다. 항상 선명하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가 흐려졌다.
“처음에는, 그저 치기 어린 다짐으로 기억합니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를 동생으로 인정할 수 없노라고.”
르미엘이 아몬과 나이가 비슷하니 그녀가 태어났을 무렵이면 벌써 10년은 지난 이야기였다.
루페르 역시 한창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었을 테지.
“그때는 마주할 때마다 그 여자를 떠올리게 하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전부 거슬리기만 했는데…. 르미엘은 이상하리만치 저와 로즈니를 따랐죠.”
부모인 백작과 백작 부인보다 더욱.
“계속 저희의 눈에 띄기 위해 주변을 기웃거리고, 눈이라도 마주쳤다 싶으면 그리 행복하게 미소 지어 주었습니다.”
나는 한 소리 하려다 간신히 참아냈다.
그래, 그때는 당신도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이었겠지.
‘더구나 그런 가정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실상 내 코가 석 자일 수 있어.’
이해는 하지만 르미엘이 측은해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저도 이제 머리가 크고 나니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클로레반 부인에 대한 원망 역시 이전보다는 많이 수그러들더군요.”
루페르는 내게 이야기를 토해내며 조금이나마 심리적 안정을 찾은 듯, 흥분한 기색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니 뒤늦게 르미엘이 눈에 밟혔습니다.”
“근데 왜 다가가지 않으세요. 누구보다 경께서 손을 내밀길 기다리는 아이에게.”
“…염치가 없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와서 제 마음의 짐을 덜고자 그 아이를 돌아보는 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 역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기에 희미하게 흔들리는 루페르의 눈동자가 여실히 드러났다.
“만약 단순히 부채감을 갚고자 했다면 예전부터 르미엘이 경의 눈길을 사로잡았을까요. 그 아이를 보고 경께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생각해봐요.”
“…….”
“조금이라도 귀엽다 여기고, 예쁘다 여기고, 안아주고 싶다고 여기지 않았어요? 축젯날에는 단순한 사명감 때문에 르미엘을 구했고, 거슬리는 행동을 해서 윽박질렀나요? 아니잖아요.”
살짝 벌어져 있던 그의 입술에 힘이 들어가 꾹 다물려졌다.
나는 그 침묵에서 답을 읽어냈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잘해줘요. 더 늦어서 정말 후회하기 전에.”
“…예.”
나는 심란하게만 보이는 그의 얼굴에 한 마디를 덧붙여주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도 경이랑 별반 다르지 않게 지내왔어요.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낸 건 최근의 일이고 이전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죠. 그러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에서 더 늦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바라봐줘요.”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돌아가는 루페르를 배웅하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쩌면 루페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리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네.’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 *
세이린이 공작저에 머물기 시작하며 자연스레 로즈니 역시 저택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나야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그녀의 바쁜 일정을 생각하면 저래도 괜찮은가 싶어 걱정이긴 했다.
‘뭐, 본인이 괜찮다는데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로즈니야 본인 앞가림은 잘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슬쩍 미소 지었다.
며칠 전 일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평화로운 나날이다.
흑마법사들만 아니라면 정말 마음 편히,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며 여유를 즐겼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하얀 눈송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눈….”
해가 바뀐 지금에서야 첫눈이 내린다.
이곳은 눈이 많이 오는 곳이 아니다 보니 눈을 보는 경우 자체가 흔치 않았다.
내 혼잣말에 세이린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제야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로즈니 역시 눈을 바라보며 비명처럼 높은 목소리를 내었다.
“어머, 눈이네요!”
그게 정말 좋아하는 듯도, 질색하는 듯도 한 애매한 톤인지라, 나는 어느 쪽인가 싶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좋아하는 거였구나.’
눈, 예쁘지. 미관상으로.
다만 돌아다닐 때를 생각하면 걱정부터 되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눈을 반기지 않았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저택에서 밖을 바라보며 풍경을 즐길 수 있으니 제법 달갑게 느껴지긴 했다.
“흠?”
그렇게 다 같이 눈을 구경하고 있는데, 세이린이 갑작스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에 무심코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낯선 디자인의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솔렘의 마차로 보입니다만, 아무래도 사절단이 도착한 모양이군요. 황궁에 머물지 않고 공작저에서 머물기로 하셨나요?“
“네. 아무래도 어머니의 친가이다 보니….”
“아아, 그랬었죠.”
그녀의 사망 이후 십 년은 족히 흘렀음에도 세이린은 그녀의 출신을 알고 있는 듯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힐끗 로즈니를 보니 그녀 역시 덤덤한 표정이다.
세리나 로베르가 솔렘의 왕녀였다는 사실이 꽤 유명했던 모양이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지.’
며칠 사이 집안의 사용인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부산스러웠고 귀띔을 받았기에 예상은 했다.
다만, 날씨 등 여러 불가피한 상황으로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었을 뿐.
그런데 하필 오늘이라니….
‘아직 공작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공작의 머리털도 며칠이고 보지 못했다.
레이먼드가 내 납치 건을 숨겼다 한들, 이전에 온실 지하 실험실에 들어갔던 사실은 알렸을 것이라 여겨 조만간 돌아와 나를 호출하리란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일레이라는 놈이 비밀리에 붙였을 수도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기억의 한편으로 쑤셔 넣어봤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되니 여태 돌아오지 않고 뭐 하고 있나 싶었다.
“세이린, 로즈니, 미안하지만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다녀오시죠.”
“그럼요. 안 그래도 눈이 쌓일 것 같아서 돌아가는 게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오늘 즐거웠어요.”
나는 작게 감사를 표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응접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답을 하니 시녀장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가씨, 티베온 켈레나프 대공 각하와 대공자님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주인님께서 부재중이신지라,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하는 대로 내려가지. 아몬에게도 준비하라 일러.”
“예.”
나는 적당한 외투를 걸치고 머리를 정돈하곤 아몬과 함께 곧장 아래로 향했다.
말은 준비한다 했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있을 리가.
저 멀리서부터 오신 귀한 손님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니 미운털 박히기 싫은 것뿐인지만….’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으니 이 짧은 거리가 더욱 순식간으로 느껴졌다.
“리엘리 공녀님과 아몬 공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각하.”
내가 응접실 앞에 서자 낯선 시종이 안쪽에 말을 전했다.
아마도 대공이 데려온 시종인 성싶었다.
“모시게.”
나직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응접실로 들어서며 재빨리 안쪽의 사람들을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