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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29화 (129/153)

129화.

‘제정신인가?’

리엘리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공작에게 일말의 긍정적인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저건 또 뭔가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의 곁을 십여 년간 지킨 자의 입에서 저런 제안이 흘러나오다니….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을 짚어드렸을 뿐입니다만.”

레이먼드는 표정 변화 없이 리엘리를 바라봤다.

앞으로 신경 써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슬슬 사절단이 도착할 때가 되었다.

이후 건국제까지 무사 형통해야 하거늘, 기껏 다잡아둔 공작의 정신이 흐트러지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불만과 황당이 공존하는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볼 뿐인 리엘리 로베르의 모습에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도 그편이 좋으실 겁니다. 납치되셨던 사실이 각하의 귀에 들어가면 이전과 같이 저택에서만 갇혀 지내셔야 할 텐데, 그렇다면 많이 답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리엘리 역시도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전 같았다면 보호라는 명목하에 저택에서 감금당하기 전에 당장 아몬의 손을 잡고 이곳을 뛰쳐나갈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자신은 로베르 공작가를 버릴 수 없었다.

적어도 아르반이 온전한 제 세력을 거느릴 때까지만이라도.

솔직히 말해 그의 제안이 썩 마음에 들었지만 즉각 받아들이기에는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리엘리는 흔쾌히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못마땅했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자못 사납던 그녀의 기색이 한풀 꺾인 것을 눈치채고는 제가 먼저 그녀의 답을 유도했다.

“아가씨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듯하니, 다른 의견이 없으시다면 납득하신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나도 되겠습니다.”

“…물론 나 역시 귀찮아지는 건 원하지 않아. 다만 네가 뭐라고 아버지의 대리인을 자청하는지 모르겠군.”

동의하고 수긍하는 한편 이쪽이 마음에 걸리는 바였다.

그는 말 그대로 공작을 보조하는 보좌관일 뿐이다.

그런데 감히 함부로 모시는 이가 중요시하는 여식의 납치 사건을 은폐하려 들다니.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네.’

이미 제 눈 밖에 난 레이먼드가 저리 행동하니 더욱 아니꼬웠다.

“솔직하게 말해 이번 일은 나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넘어가 주겠지만 두 번은 없어.”

리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올려다보는 레이먼드와 시선을 마주하며 경고했다.

“앞으로 이런 주제넘은 제안을 하려 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가슴 깊이 새겨두도록 하죠.”

제 할 말을 마친 리엘리가 그를 지나쳐 가는 와중, 레이먼드가 그녀를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리엘리 로베르는 제 예상보다 더 귀찮은 아이가 된 듯했다.

* * *

근 몇 달 치 쏟아낼 화를 어제오늘 다 소모한 듯한 기분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직 툴툴거리는 율렌이었으나 그래도 제 회복이 우선인지 슬그머니 옆구리를 파고들어 오길래 피하지 않고 안아주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때로는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세이린의 존재를 떠올린 나는 율렌에게 두서없이 말을 걸었다.

“아르반이 어제 세이린에게는 네 존재를 드러내는 게 좋을 것 같다더라.”

“…뭐? 왜?”

음, 그래도 역시 앞뒤 설명을 너무 잘라먹었다 싶어서 천천히 이유를 말했다.

가만히 내 설명을 듣던 율렌은 그제야 납득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런 이유라면 주인의 의지를 따라야지.”

율렌은 작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도 답답하다, 진짜…. 그래도 급격하게 마력이 돌아오긴 했는데 부족한 건 부족한 거니….”

“너 마력이 돌아왔어?”

갑작스러운 녀석의 발언에 놀란 내가 묻자 율렌이 나를 힐끔 올려다보며 대답 대신 마법을 사용해 보였다.

나는 갑작스러운 마력 파동과 동시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녀석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오…! 와…!”

이제 내가 마력을 다루기 때문에 율렌이 눈앞에서 펼친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너 진짜 대단하긴 했구나….”

바로 내 몸 위에서 펼쳐진 마법임에도 이 정도로 마력 파동이 적고 완벽하게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인식 장애 마법과 투명화를 같이 쓴 거야. 음… 지금 마력으로는 몇십 분 유지도 못 하겠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끼손톱만 한 불꽃이나 겨우 만들어 냈으면서.”

“그때도 그것보다는 나아졌었어. 네 앞에서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 그래….”

지금 녀석이 펼친 마법이 내 입장에서는 대단하다 해도 율렌에게는 역시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엘리, 세이린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나는 반사적으로 율렌을 내려다봤다.

녀석 역시 나를 올려다봤고, 그대로 녀석을 침대에 올려둔 나는 방문을 열기에 앞서 율렌을 다시 한번 살폈다.

녀석은 제법 점잖은 척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율렌을 보여주는 건 처음이네.’

그렇기 때문인지 율렌의 꼬리 역시 진중해 보이고 싶어 하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한 듯 기쁘게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회복이 더뎌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상황을 한탄했으면서… 어이없는 한편 귀엽게도 느껴졌다.

* * *

“…안녕하십니까. 카넬로웰 기사단의 세이린 아델입니다.”

“그래, 율렌이다.”

깍듯하게 인사는 하고 있었지만 세이린의 표정과 눈빛에서는 신기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이전 그녀와 함께했던 에시트 산맥에서 율렌을 만나게 된 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세이린은 내가 어떻게 성검과 율렌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따로 다른 질문을 해오지는 않았다.

눈치 빠른 그녀이니 내가 언급하지 않는 부분에 관해서는 설명하기 곤란할 것이란 걸 예측했겠지.

“그러니까, 전에 제가 가져다드린 바구니에 들어있던 게 다름 아닌 율렌 님이었단 거군요.”

세이린은 가볍게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율렌의 존재를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간 나 혼자 속 터졌던 것도 많고….

그렇게 세이린은 자연스레 내 일상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세이린과 마주하게 된 아몬은 다소 당황스러운 눈치였지만 그래도 내심 그녀를 반기는 듯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이 나를 찾아왔다.

“…엘리!”

나는 그간 잠을 설쳤는지 평소보다 안색이 창백한 로즈니의 뺨을 보고 눈썹을 팔자로 휘며 말했다.

“로즈니, 세상에…. 얼굴 상한 것 좀 봐.”

속상하게 정말….

나를 걱정해서 이리되었다는 게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니, 제 걱정을 하실 게 아니지요. 엘리, 괜찮아요? 몸은 성한 건가요? 많이 놀랐을 텐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너무 걱정돼서….”

로즈니는 정신없이 나를 살피며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심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여기서 오랜 기간을 살아온 것이 아님에도 이렇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다니.

“전 정말로 괜찮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자, 따뜻한 차라도 좀 마셔요.”

“감사합니다.”

로즈니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니 비로소 마음이 조금 놓인 듯, 미약한 숨을 토해내며 차를 들었다.

“그런데 범인은 잡힌 건가요?”

“아, 네. 법대로 처리할 예정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어요. 그래도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인 자가 대체 누구였는지….”

로즈니는 내심 궁금한지 나를 힐끗거렸지만 차마 캐묻지는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납치 사건 피해자의 앞에서 계속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괜찮다고,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속 시원히 로즈니에게 전말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걱정해 주는데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말을 지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고 하면 로즈니가 얼마나 불안해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범인을 잡았는데 정체는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래도 바로 범인을 잡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죠. 음, 우리 이제 좀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내가 난감해하는 것을 알고 세이린이 로즈니에게 제안했다.

로즈니 역시 이런 이야기가 지속하는 건 좋지 못하다 여겼는지 궁금한 기색임에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참, 오라버니께서 언제 한 번 엘리를 찾아뵙고 싶다고 하셨어요.”

“멜라니스 경이요?”

잠시 의아했으나 곧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현장에 함께 있었으니.

본의는 아니지만 돌아가며 모든 사람의 걱정을 받게 생겼다.

“네. 사실 제가 오늘 함께 오자고 제안했는데, 부득불 초대받지 않은 채 방문할 수는 없다고 해서요.”

물론 그게 정론이긴 하지만….

로즈니가 작게 투덜거렸다.

하긴, 로즈니의 입장에서야 어차피 자신이 가는데 꼽사리를 끼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터였다.

“음, 한동안 저택에서만 지낼 예정이라 편하실 때 찾아달라 전해주시겠어요?”

“네, 그럼요.”

그 뒤로 르미엘이 많이 놀라지는 않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어제의 소동은 우리의 대화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미리 편지를 보내온 루페르가 정확히 예고한 시간에 맞춰 공작저를 찾았다.

“공녀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그는 로즈니에게 내 안부를 전해 들었기 때문인지 꽤 여상스러운 낯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그와 상투적인 인사말을 나누며 루페르의 낯을 살피다가 문득 그의 얼굴이 묘하게 그늘져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 이미 내 안부도 물었고,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확인했으니 비단 나 때문에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럼 다른 근심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날 저 때문에 정신없어 쉬지도 못하셨겠어요. 업무에 지장이 가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럴 리가요. 평소 체력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하루 잠을 설쳤다고 업무에 영향이 가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아아, 업무 문제가 아니라면 하나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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