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도련님.”
내가 밖으로 나오자 눈에 띄게 안도한 듯한 기색의 릭이 아몬을 부르며 부축하기 위해 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몬은 그의 손을 쳐내고는 제가 홀로 서고자 했다.
“아몬!”
나는 비틀거리다가 문을 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아몬에게 다가갔다.
내가 제 시야에 비치자 미약한 한숨을 토해낸 아몬이 내 품에서 무너져내렸다.
“왜 나와 있어.”
“누님이, 안 보여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몬의 한마디에 가슴에서 울컥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랬구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속상한 마음에 말문이 막혀 잠시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누나 왔으니까 다시 들어갈까?”
담담하게 말하려 했는데 그새 목소리가 잠겨버렸다.
하지만 열이 올라 제정신이 아닌 아몬은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왔다.
나는 신관이 방문할 때까지 아이를 끌어안고 자리를 지켰다.
*
“레이먼드.”
“…무슨 일이지.”
이런 야심한 시간에.
레이먼드는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사고를 좀 쳐서, 잔소리 듣기 전에 미리 보고하러.”
어깨를 으쓱이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얘기하는 일레이의 작태가 어처구니없다.
하지만 이놈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지라, 레이먼드는 화를 내는 대신 나지막이 대답했다.
“…들어나 보지.”
“이실직고하면 참작해줘야 하는 거 알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용건이만 간략히 말해.”
가뜩이나 피곤한 와중에 이런 새벽에 찾아와서 잡소리나 늘어놓는 일레이를 보고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뭐, 어차피 너도 아침이면 알게 될 얘기겠지만. 내가 공녀를 잠시 데려다가 면담 시간을 가졌거든.”
일레이는 마치 지인과 만나 식사를 하고 왔다는 얘기를 하듯, 태연하게 고백했다.
그런 일레이의 이야기에 레이먼드는 제 귀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전에 내가 급하기 이동 마법을 사용했을 때, 사실 내 몸을 이전 연구실에 두고 왔었거든. 그때 우연히 공녀와 마주쳤었는데 반응이 아주 깜찍하지 뭐야.”
“…설마.”
“음, 그 설마가 맞을걸? 예전이랑 달라진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찔러봤지. 그렇다고 걱정하진 말고. 잘 돌아가셨을 테니.”
레이먼드는 순식간에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공녀와 강제로 면담을 가졌다,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따지자면 그렇지. 너무 화내지는 마. 나도 예의 있게 모셔오고 싶었지만 공녀님이 거절할 게 눈에 선해서 어쩔 수 없었어.”
“신변에 이상은. 공녀가 멀쩡한 게 맞나?”
“아아, 그건 걱정하지마. 아주, 너무 멀쩡하셔서 문제였으니까. 어찌나 팔팔하던지….”
내게 한 방 먹였을 정도니, 말 다 한 거 아닌가.
일레이는 그리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레이먼드는 공녀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력을 다룰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태여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만약 그가 모르고 있다면 제가 어렵사리 얻어낸 귀한 정보를 그에게 그냥 넘기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지.’
“공녀가 무사하다면 됐어. 알겠으니 나가봐. 단, 한 번 더 이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면 나도 더는 봐줄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둬.”
일레이를 바라보는 레이먼드의 뱀 같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이크, 무서워라. 네네. 이만 물러가 보죠.”
그런 레이먼드의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일레이가 능청스러운 대답과 함께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일레이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레이먼드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더 쉬기는 그른 듯했다.
*
신관이 다녀간 이후 아몬은 금세 이전과 같이 멀쩡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금방 나으리라 알고는 있었지만 괜히 걱정되어 오늘은 편히 쉬라고 일렀는데, 아몬은 고집스레 오후 일정을 수행하러 나섰다.
어딘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이었는데, 책임감 넘치고 의젓한 모습이 뿌듯한 한편 속이 상했다.
이럴 때는 그냥 좀 쉬어도 될 텐데….
이런 이중적인 감상이 들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세이린이 도착했다.
홀로 말을 몰고 온 세이린은 가벼운 짐가방을 내리며 내 안부를 물어왔다.
“엘리, 좀 어떠십니까. 잠은 좀 잤나요?”
“네, 저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실제로 어디 다친 곳도 없고, 납치에 대한 충격이 크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분노가 더 커서 충격을 모두 잡아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느 때와 같이 방긋 웃어 보이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세이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약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녀를 이끌고 올라가 비어있는 방을 내어주었다.
“저는 항상 아몬이랑 식사를 하는 편인데, 앞으로는 세이린도 함께 하면 되겠네요.”
“엘리, 저는 비공식적이지만 그래도 호위로 왔습니다만….”
그녀는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원, 언제부터 그렇게 원칙을 고수했다고….
‘물론 세이린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제 친구로서 저택에 머무는데 식사를 따로 하는 건 여러모로 이상하게 보일 거예요.”
“하아… 그렇긴 하죠.”
나는 진지하게 걱정 가득한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부채감을 덜어주고자 덧붙였다.
“저택 내부에서는 안전하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공작이 흑마법사 측에 가담하고 있다지만 그 자신은 내게 해를 끼칠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이번 경우는 아주 예외였겠지.’
그 일레이라는 흑마법사 놈이 독단으로 벌인 돌발행동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일 터였다.
그와 별개로 공작과 요즘 들어 이상할 정도로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게 리엘리를 향한 애정이 식어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럼 우선 짐 풀고 쉬어요. 저도 방에서 좀 쉬려고요.”
“예, 있다 찾아가겠습니다.”
나는 가벼이 발걸음을 뗐다.
비록 공작저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한들,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옆을 지킨다는 건 아주 마음이 든든한 일이었다.
그렇게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어쩐지 이유를 알 수 없이 거슬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건 사용인들이 신는 신발에서 날 수 없는 소리였다.
남성의 구둣발 소리.
무심코 고개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온 인물은,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이었다.
“…레이먼드?”
당연히 공작이나 집사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마주하기는 처음이었지만 리엘리의 기억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제 이름을 부르자 남자, 레이먼드 펄슨은 어딘가 피곤한 낯으로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그래요.”
세이린 덕에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자가 아몬을 그리 방치하라 지시했다는 사람이었지.’
나는 입술에 힘을 줬다.
왜 그랬냐고 윽박지르며 묻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 참기가 힘들었다.
‘어제부터 누가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건가.’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 나를 돌아가며 열 받게 만드네.
그러나 앞선 둘과 달리 이자에게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내가 그에게 따지려 드는 문제는 너무도 먼 옛날이었기에.
분명 저자와 공작의 의심을 살 터였다.
나는 레이먼드로 인해 멈췄던 걸음을 떼려 했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죠.”
레이먼드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의 부름에 무슨 일이냐는 듯이 바라보자 레이먼드가 말을 이었다.
“어제의 일 때문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길게 말을 늘이는 그의 눈이 관찰하듯 내 전신을 훑어내렸다.
“이곳에서 얘기하는 건 피차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불쾌감에 구겨지는 인상을 애써 펴지 않았다.
아까 에드가에게 잔뜩 노기를 쏟아냈기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의 역치를 뛰어넘은 것인지, 내 기분과 별개로 머리는 제법 냉정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응접실로 가지.”
레이먼드와 나는 이동하는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또한 응접실로 들어선 나는 호위인 제롬을 내보내는 대신 뒤쪽에 대기시켰다.
레이먼드의 시선이 흘끗, 제롬에게 향했다 내게로 닿았다.
*
“한 가지 제안드릴 일이 있습니다.”
“들어는 보죠.”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리 대답한 리엘리가 작게 턱을 까딱였다.
상당히 까칠한 리엘리의 대답에도 레이먼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그녀의 변화를 살피는 건 제법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미 보고받은 바가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 같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군.’
당당하다 못해 오만한 말투.
불만에 가득 차 이글거리는 눈빛.
저와 시선을 마주하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행동거지까지.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이 이전의 리엘리 로베르 공녀를 떠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가 이 로베르 공작가를 이을 차기 후계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후계 구도라면 그랬겠지.’
레이먼드의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그녀를 비췄다.
“피차 시간이 아까울 터이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제 있었던 납치 사건에 대해서는 각하께 함구할 생각입니다. 협조해주시죠.”
“…뭐?”
리엘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리엘리의 반응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레이먼드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납치될 뻔한 일에 대해서는 아직 각하께 보고드리지 않았습니다. 밀린 업무가 많으신데, 다른 일에 신경이 분산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딸의 납치 소식을 은폐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