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던 리엘리는 아몬의 몸을 끌어당겼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당연히 괜찮지.”
그녀는 아몬을 제 품에 안고는 작게 몸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많이 진정된 듯, 떨림이 줄어들었다.
“자자, 시간이 너무 늦었어. 누나 어디 안 가고 이렇게 옆에 붙어 있으니까.”
아몬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새벽까지 깨어있었던 여파도 있고 놀랐기 때문인지 그새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다.
아몬은 양팔을 뻗어 리엘리를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잠을 떨쳐내기에도 역부족이니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듯했다.
리엘리는 아몬의 몸을 토닥이며 저도 잠이 쏟아짐을 느꼈다.
‘…오늘 힘들긴 했나 보네.’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그보다 피로감이 더 심했다.
평소 깊은 피로를 느낄 때면 항상 율렌이 회복을 시켜줬기 때문에 이런 탈력감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보니 율렌이 걱정할 텐데….’
쌍둥이가 전달해줬으려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어느 순간 흐려지는 의식을, 리엘리는 애써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서로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다.
*
아몬은 결국 몸살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서 온몸이 불덩이 같은 아몬의 모습에 어찌나 놀랐는지….
주치의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했지만 그런다고 마음이 진정될 턱이 없었다.
‘내가 납치됐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아.’
나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소파에 축 늘어졌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신전에 사람을 보냈으니 신관이 찾아올 때까지 할 일이 있었다.
사실 애가 열 좀 난다고 신관을 부르는 건 과한 일이란 생각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걱정되는데.
‘그리고 그 김에 릭의 발도 같이 치료받으면 되니까….’
나는 호위를 뒤에 매달고 같은 층에 마련된 전속 시종들의 방을 찾았다.
현재 사용하는 방은 둘이었지만 한쪽에만 기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기에 에드가의 방이 어딘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묵례해 오는 기사에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문을 확 열어젖혔다.
“…고, 공녀님?”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에 당황한 모양인지 어제와 같은 차림새의 에드가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내가 안쪽으로 발을 들이기 무섭게 주절주절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녀님, 대체 제게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제 일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
나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걸리는 바가 없어서 그런 말을 하냐는 듯이.
그러자 에드가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변명을 더 했다.
“저, 정말 왜 이러시는지 알 수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제는 왜 도망가려고 했던 거지.”
어제 그가 메고 있던 가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도주를 시도하는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가씨, 어제 저자에게서 빼앗아둔 가방입니다만, 필요하십니까.”
그때 마침 에드가의 방문 앞을 지키던 기사가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내 추궁을 들었는지 불쑥 가방을 건네왔다.
“아, 고마워. 어디 한 번 볼까?”
나는 지체 없이 그가 넘겨준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쏟아냈다.
어디 보자….
“호오, 이러고도 도망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말이 나오나?”
나는 조소하며 옷가지와 몇 가지 생필품, 그리고 돈주머니를 내려다보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이게 다 얼마야.”
빵빵하게 금화로만 채워진 주머니는 대충 살펴도 그의 일 년 치 봉급을 훌쩍 넘기는 거금이었다.
“그… 건 그간 제가 모아둔 봉급으로….”
“어디에 쓰려고.”
“그러니까, 누나가 아픕니다. 그래서… 그 치료비로 모은 돈입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자.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니?”
여기도 은행이 존재한다. 나라에서 운영하고 있으니 어지간히 보안에 자신 있지 않은 이상 목돈은 은행에 저금하는 게 일반적이란 말이었다.
‘더구나 치료비라면 더 말이 안 되지. 여기에서 누나가 수술할 수 있기를 해? 그동안 치료비를 보내지 않았다는 거잖아.’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설마설마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더욱더 그가 일레이에게 정보를 넘겼다는 추측에 힘이 실려 가고 있었다.
“입이 싸다는 얘기는 익히 듣긴 했는데… 돈이 필요했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읊조렸다.
솔직히 그가 원작에서 딱한 처치였고 르미엘을 도와주는 역할로 등장했기에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리네….’
그의 누나가 언제 병으로 세상을 떴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하지만….
나는 돈주머니를 천천히 뒤집어 그의 머리 위로 쏟아내며 말했다.
“정말 돈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내게 부탁하지 그랬니. 그런 이유였다면 빌려줄 수도, 월급을 미리 내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냥 선뜻 치료해 주었겠지.
“네 가족만 중요하고 네가 모시는 도련님의 가족은 어찌 돼도 상관없었겠지.”
“…….”
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금화가 그 정도로 공포감을 선사할만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금화가 빠져나간 주머니의 밑바닥에서 뭔가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주머니 안을 확인하고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 에드가 베르크. 네가 날 아주 물로 봤구나.”
내가 아몬의 것이 분명한 장신구를 꺼내 들며 비소하자 에드가의 무릎이 단숨에 꺾였다.
“아가씨… 제발, 오, 오해십니다.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감히 이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고 이딴 변명을 지껄여?
“아하, 오해. 오해일 수 있지. 그럼 어디 변명 한 번 들어볼까. 나를 납치한 놈에게서 네 입이 저렴하단 소리를 들었는데,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
내가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는 것도 모른 채 에드가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내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숫제 매달리듯 빌었다.
그와 동시에 에드가를 떼어내려는 호위를 손을 들어 저지한 나는 가만히 그가 하는 꼴을 내려다봤다.
언제까지 변명을 지껄일지 두고 보려는 심상이었다.
“정말, 정말로 누나의 치료비가 필요했습니다. 목돈이 필요했고,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자가 감히 아가씨를 납치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가씨와 도련님의 일정만 넘겨주면 앞으로도 섭섭지 않게 챙겨준다는 말에 넘어가서….”
“그래, 그랬구나.”
나는 벌벌 떨리는 손 때문에 내게 비는 건지, 내 다리를 잡고 흔드는 건지 모르겠는 그 손을 발로 툭 쳐서 떨어트렸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에드가의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그의 시선에 맞춰 앉아 우악스레 턱을 부여잡았다.
“그럼 이제 이게 어떻게 된 건지에 대한 변명을 해주셔야지.”
“…아가씨, 다른 뜻은 없… 없었….”
“…….”
솔직히 이렇게 된 이상 그가 정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간에 큰 의미는 없었다.
이건 누명이고 뭐고가 아닌 명확한 도둑질이었다.
또한 처음 정보를 팔아넘긴 의도가 어땠든지 간에 공작저의 사용인인 그가 함부로 입을 놀려 공녀인 내 신변이 위험해졌으니….
“지하 감옥에 가둬.”
“예.”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아, 아가씨…! 아가씨!!”
끝까지 나를 부르는 에드가를 무시한 채.
내가 얼마나 무르게 보였으면 저리 일관되게 결백을 주장할까.
‘물론 죽일 생각이야 없다지만 무른 처사를 보이지도 않을 거야.
이곳에는 이곳의 법이 있다. 법대로 다스리는 편이 좋겠지.
“…로렌스 경, 시녀장에게 일러서 에드가 베르크의 가정사를 조사한 다음 방금 저 입에서 나왔던 말이 거짓이라면 가중 처벌하라고 전해.”
“하지만 아가씨 곁을 비울 수는….”
“난 바로 방으로 돌아가 볼 거야.”
“그럼 들어가시는 모습을 확인하고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호위들이랑은 말을 섞을 일이 별로 없었지만 여우처럼 능청스러운 제롬과는 달리 로렌스는 정말 우직한 기사 같아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책임감도 상당한 것 같고.’
하긴, 내가 납치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기사로서 그런 마음을 갖는 게 당연한 건가.
나는 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복도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신관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있었다.
아몬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괜히 쓸데없이 들락날락해서 아픈 애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조심스레 안쪽의 기색을 살폈다.
쌍둥이들이 내 얘기를 율렌에게 잘 전달했는지 확인하지 않았기에 뒤늦었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다.
“…너!”
아니나 다를까, 내가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율렌이 빽, 소리치며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억!”
이번에는 엄살이 아니고 진짜 타격이 컸다. 어제 아몬이 품으로 뛰어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달까.
이놈 이거 일부러 몸무게를 불려서 몸통 박치기한 것 같은데….
합리적인 의심을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녀석을 받아 안았는데 금세 또 무게를 줄였는지 평소와 별반 차이가 없이 가벼웠다.
“엘리, 너는 내가 걱정할 거 알면서 이 시간까지 코빼기도 안 비쳐!!”
내가 타박할 새도 없이 주둥이를 쩍 벌려가며 호통치는 녀석의 모습에 잘못한 바가 있었던 나는 찍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미안해. 근데 어제 아몬이 너무 불안해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어…”
“나도 걱정했어, 나도!”
“진짜 미안… 많이 걱정했구나.”
“말이라고!! 다치는 거야 얼마든지 회복시켜 줄 수 있지만, 납치라니….”
녀석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팩 돌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녀석의 눈동자가 울망거리는 모습을 다 목도해 버린 뒤였다.
“율렌… 내가 진짜 미안해. 다음번에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할 테니….”
“뭐? 다음에도 납치당하겠다는 거야, 뭐야!!”
녀석은 절절매는 내 말을 중간에 자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눈에 비친 걱정이 너무 역력해서 차마 뭐라 할 수 없던 나는 계속 녀석을 달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잔뜩 삐져버린 율렌의 화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단지 서운하고 걱정되어 그럴 뿐, 정말로 내게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 쌍둥이가 율렌에게 아몬의 불안정한 상태에 대해 잘 전달한 모양이다.
똑똑-
“아가씨! 빨리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다급하게 나를 찾는 에바의 목소리에 신관이 도착했나 싶어 율렌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율렌, 미안해. 미안한데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응?”
“흥, 마음대로 해.”
…그래. 내가 죄인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다만 지금은 아몬의 회복이 우선이었기에 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럴 때는 진짜 율렌의 존재가 비밀인 게 너무 불편하다.’
부탁만 하면 아몬을 낫게 해 주는 건 순식간일 텐데….
그리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아가씨, 도련님께서….”
에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의 설명을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상황을 인지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