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리엘리의 대답에 아르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당장은 아델이 없으니 내일은 어디 외출하지 마시고 저택에서만 계십시오. 오전 내에 공작저로 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럼 세이린도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바로 외출할 예정도 없고….”
더구나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일정이 있더라도 죄다 취소시킬 판국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르반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외출할 일이 없단 사실이 그에게 퍽 안도를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
나는 아르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 볼게요. 당신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쉬어요.”
가뜩이나 바쁘고 쉴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잖습니까. 당신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아르반이 얕은 한숨과 함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나는 낯을 드러냈다.
음, 이런 상황이라 해도 내가 아르반이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그래도 신경 쓰이니까 그러죠.”
내가 작게 웃어 보이자 아르반이 거의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요즘 들어 생긴 이런 그의 변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가 먼저 안 들어가면 당신도 계속 이대로 있을 것 같으니까, 먼저 들어가 볼게요. 다음에 봐요.”
“…알겠습니다. 들어가 쉬십시오.”
뒤돌아서서 걷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여실히 느껴져 그럴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아르반과 멀어지자 내게로 급히 다가서는 시녀장과 집사를 발견하고 나는 표정을 굳혔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새벽이라 정원을 밝히고 있는 빛이 어스름했지만 미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는 것은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자리한 집사에게 흘끔 눈길을 줬다.
입으로는 무사해서 다행이다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비치지 않았다.
‘…사뭇 섬뜩해 보일 정도야.’
집사 필과는 사실 자주 마주할 일이 없었기에 아직까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필은 늘 바쁜 사람이었고, 대체로 공작의 옆에 붙어있곤 했으니까.
미라의 아들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얼굴도, 성격도 닮은 구석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괜찮아. 그보다….”
나는 덤덤하게 대답하다 다급하게 울리는 발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저택에서 한껏 울상이 된 쌍둥이가 튀어나오는가 싶었는데 곧장 그들을 제치고 무서운 속도로 달음박질하는 작은 인영에 멈칫했다.
“……!”
그 작은 몸으로 어찌나 재빠른지,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다다른 아몬이 그대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에 나는 잠시 휘청이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가 사이좋게 다칠 뻔했지만 나는 차마 아이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놀랐을지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이를 꽉 끌어안고 갑작스레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조금 전 불과 몇 초간 마주한 아이의 얼굴은 내 심장을 땅에 떨어트리다 못해 짓이겨버렸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안 그래도 하얗던 낯빛이 곧 뒤로 넘어가도 이상치 않을 만큼 창백하게 질린 채로 달려오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나는 품 안에서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리는 아몬의 몸을 끌어안고 아이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이는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와중에도 그런 걱정이 들었다.
실내에서 곧장 뛰쳐나왔기에 외투를 걸치고 있지 않은 아몬이 너무 신경 쓰였다.
아까 외투 안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실종되고 집으로 보내진 뒤 좌불안석으로 나를 기다렸음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던 나는 슬쩍 아몬의 엉덩이를 받쳐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몇 번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제는 제법 안정적으로 아이를 안아 들 수 있었다.
아몬은 내가 저를 들어 올림에도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내 목덜미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있을 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그런 내 옆을 울상이 된 쌍둥이가 뒤따랐다.
쟤들도 상당히 놀란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아몬을 달래주는 게 더 중요했기에 길게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다친 곳도 없고 몸 성히 돌아왔으니까 너희들은 이만 들어가서 쉬어. 그리고 시녀장.”
내가 복도로 들어서며 쌍둥이에게 말을 하고 뒤이어 시녀장을 부르자 그녀가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에드가 베르크는 내일 내가 찾을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말고 대기하라고 해. 앞에 기사 하나 배치하고.”
잠시 멈칫하던 시녀장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복도를 타고 울리는 소음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으윽…!”
“뭐 하는 거야!”
어둑한 복도 끝에서 엎치락뒤치락하던 이들 중 하나가 내 새된 노성에 눈에 띄게 동요했다.
동시에 내 품에 안긴 아몬 또한 움츠러들었다.
“…누님.”
“미안해, 갑자기 큰소리 내서 놀랐지?”
나는 크게 몸을 떨며 나를 찾는 아몬을 얼렀다.
그러는 사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자와 몸싸움을 하던 남자가 재빨리 들고 있던 목발로 목을 졸랐다.
동시에 내 호위를 서고 있던 기사가 달려가 둘을 말리려 했지만 내가 그를 만류했다.
“잠깐, 발을 다친 남자는 건드리지 말고 나머지만 제압해.”
“예, 아가씨.”
내 명에 쏜살같이 튀어 나간 기사가 순식간에 에드가를 제압했다.
“아, 아가씨…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는 잔뜩 겁에 질려 나를 부르는 에드가를 무시한 채 릭에게 짧게 말했다.
“내가 지금 당장 사정을 듣고 있을 여건이 안 돼서, 내일 얘기해야겠는데.”
릭은 내 품에 안겨있는 아몬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예, 물론. 다만 에드가는….”
“저쪽일랑 걱정하지 말고. 시녀장, 아까 말해둔 대로 처리해.”
“…알겠습니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한 박자 늦게 대답한 그녀와 아까부터 조용히 뒤를 따를 뿐이었지만 유독 존재가 거슬리는 필을 뒤로 한 채, 나는 아몬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몬의 방문 앞에 선 내가 문을 혼자 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눈을 깜빡이는데,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에 깜짝 놀라 돌아보자 필이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묵례했다.
인기척을 내지 않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잘못한 건 없었지만 떨떠름한 기분에 그저 고개만 까딱여 보이고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러자 제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느낀 건지 아몬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나는 가까운 의자에 앉으며 그런 아이의 얼굴에 내 볼을 가져다 댔다.
어쩐지 평소보다 체온이 높은 게, 그 잠깐 사이 볼이 얼었었나 보다.
“많이 놀랐지. 누나 괜찮아. 다친 곳도 없고, 멀쩡하게 돌아왔어.”
그리 속삭이며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아몬의 눈동자에는 여전한 불안이 드리워져 쉬이 걷힐 듯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잠시 나와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이내 내 무릎에서 내려가 바로 섰다. 그리고는 바쁘게 눈동자를 굴려 내 몸을 살폈다.
나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 내 차림새를 훑었다.
‘아, 이런….’
사실 멀쩡하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문이 부서지는 파편에 의해 찢긴 옷자락이 눈에 거슬렸다.
그리고 아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이건 뭔데요.”
잔뜩 날이 선, 처음 드는 낯선 어조가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원망하는 듯, 투정 부리는 것처럼 들리는 음성이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울음기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몬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나머지 급하게 몸을 일으켜 과장되게 양팔을 벌려 보였다.
“그냥 옷만 조금 찢어진 거야. 여기 봐봐, 응?”
내가 찢긴 옷자락을 벌리며 멀쩡한 피부를 보여줬지만, 아몬의 표정은 도통 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으면서도 울지 않는다.
차라리 소리 내서 울면 나을 것을, 미련하게 참고만 있는 게 역력한 표정이었다.
또한, 그게 더 내 속을 태우는 요소기도 했다.
나는 아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아몬이 작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제 표정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는 듯이.
애가 타는 한편으로 이가 갈렸다.
‘그놈이 쓸데없는 짓만 안 했어도 우리 애가 놀랄 일이 없었을 텐데.’
이게 다 일레이인가 뭔가 하는 놈이 원흉이었다.
*
아몬은 눈썹을 축 늘어트린 채 제 눈치를 살피는 누님의 행동에도 쉽사리 표정을 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로베르 공작저 내에서 아까와 같은 불미스러운 상황은 발생하지 않으리란 걸.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몸은 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비 맞은 짐승 새끼처럼 벌벌 떨리고 있다.
리엘리 역시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조심스레 아몬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왔다.
그리고 아이가 놀랄 수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세상에…! 손이 왜 이렇게 얼음장이야!”
리엘리는 그대로 이불 속에 아몬을 눕히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줬다.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잠시만 이렇게 있어 물수건 가져와서 닦아줄게.”
씻긴 다음 재우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기도 하고, 아몬의 컨디션이 너무 나빠 보여 차라리 푹 재우고 내일 씻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렇게 물수건을 가지러 가려는데, 아몬이 리엘리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긴장이 풀린 탓일까,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일어나지 못한 만큼은 아니었다.
“괜찮기는. 빨리 다시 누워.”
리엘리는 몸을 일으키려는 아몬의 어깨를 눌렀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 같아서는 같이 눕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몬은 마치 그런 리엘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웅얼거렸다.
“…오늘 하루만, 저랑 같이 주무시면… 안될까요.”
몸은 오한에 떨리고 있었지만, 이번은 누님과 처음 말을 섞었던 그때처럼 정신이 혼미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아몬은 제가 잠이 들면 혹시라도 그녀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스러운 마음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감히 누가 로베르 공작가 저택에 침입해 그녀를 해할 수 있겠냐마는, 사람의 마음이란 늘 냉철한 이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검이 아니라 마법을 배울 것을….’
그랬다면 마력의 흐름을 미리 읽고 누님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후회들이 아몬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싸여만 갔다. 어쩐지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간절한 아몬의 눈빛과 더러운 제 몰골 사이에서 고민하던 리엘리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겉에 입고 있던 가장 먼지투성이가 된 옷을 한 겹 벗고는 아몬의 침대에 몸을 누였다.
바로 몇 발짝만 걸어가면 욕실에서 편안하게 세수를 할 수 있겠지만 아몬의 시선이 계속 뒤따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올 심상임이 분명해 보였다.
‘하여간에 몸도 좋지 않으면서 고집은 세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