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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25화 (125/153)

125화

만약을 가정해봐야 하등 쓸모없는 감정 소모임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아르반 역시 사람인지라 일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리엘리가 이번 납치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녀 본인보다 아르반이 더욱 타격을 심하게 받은 듯도 했다.

“그렇구나. 저 때문에 많이 놀랐죠.”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놀란 게 대수입니까. 납치당했던 건 엘리, 당신인데.”

그렇긴 하지.

리엘리는 내심 그의 이야기에 동의하며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랍게도 제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 이상하다. 진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리엘리는 멍하니 생각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르반이 걱정 가득한 낯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고 미소 지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놀라긴 했던 모양이다.

“저 당신 옆으로 가도 돼요?”

리엘리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르반은 대답 대신 제가 몸을 움직여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칫 그녀가 움직이는 마차에서 이동하다 다칠 수도 있었기에.

리엘리는 제 옆에 앉은 아르반의 한쪽 팔을 끌어당겨 손깍지를 꼈다.

그의 따뜻한 체온에 기대 안정을 찾고자 함이었는데, 문득 아까 아르반을 마주했을 때 그의 심장이 얼마나 거세게 박동했는지를 기억해 냈다.

그녀는 남는 손으로 그의 손목을 짚었다.

여전히 그의 심장이 그리 세차게 뛰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르반은 그녀가 왜 이리 행동하는지 알 수 없어 의아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그 역시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아까까지만 해도 떨리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야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일까.

그는 찬찬히 리엘리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얼굴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낯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리엘리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저를 납치한 마법사랑 마주쳤나요?”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마주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쳤을 터였다.

아르반은 일순 끓어오르는 살의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당신을 납치한 마법사는 어떻게든 추적해 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쉽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 전에 온실 지하에서 마주했던 그 흑마법사였거든요.”

아르반은 뜻밖의 이야기에 잠시 멈칫했다.

“전과 같은 방법으로 마법진을 그려 도주했다면 누가 와도 추적이 어렵겠죠.”

“…그자가 왜 하필이면 당신을 납치한 건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제 몸에 있는 신성력에 흥미가 있나 봐요.”

리엘리는 일레이가 장황하게 늘어놓던 헛소리를 반추하며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좋게 말해 미쳤고 나쁘게 말해 그냥 또라이였다.

“저나 율렌이 검은 마력 특유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놈들도 신성력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았어요.”

그에 아르반은 전에 그녀가 해줬던 설명을 떠올렸다.

“당신의 영혼에 흡수된 신성력이 무의식중에 계속에서 몸에 흘러든다던 이야기 말입니까.”

“네. 그거요. 전에 온실 지하에서 그자와 마주쳤을 때 당신 뒤에 가려졌기 때문인지 율렌을 못 본 것 같았어요. 저한테 거대한 신성력이 존재한다고 하던걸요.”

성녀라나 뭐라나.

아르반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흑마법사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그들의 머릿속에 리엘리의 존재가 떠다닌다는 것만으로도.

그런데 하물며 오해로 인해 그녀를 납치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으니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절로 심박 수가 빨라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의 곁에 바짝 붙어있던 리엘리는 아르반의 변화를 알아채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저 평온하게만 보이는 낯빛이었으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터질 듯 빨랐다.

“그래도 다시 저를 찾아올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단지 그게 궁금했던 것처럼 보였거든요.”

리엘리는 그를 진정시키고자 나지막이 속삭였다.

단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녀를 납치한 것으로 보였다. 그 미친놈은.

‘아.’

그러다 문득, 마지막에 일레이가 도망가기 전 보였던 반응을 떠올린 리엘리는 순간 아차 싶었다.

자신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 굳게 믿고 있는데, 마력까지 운용하는 모습을 봐버렸다.

율렌을 제외하면 존재할 수 없는 마력과 신성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존재로 낙인이 찍혀버렸을 터.

그런데 비단 그녀만이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놈이 마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봤고, 당신이 성녀라 오해하고 있다면 다시 접근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건 비단 흑마법사가 아니라 해도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온 대륙이 뒤집힐 수도 있는 사항이었다.

실상은 단순한 오해라 할지라도 어찌 됐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신성력과 마력, 둘 모두를 다룰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칠 테니까.

아르반은 작게 탄식을 흘리며 고뇌에 빠졌다.

이리된 이상 리엘리의 호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본래도 눈에 차지는 않았지만….’

그는 리엘리의 호위 기사들을 떠올리고는 못마땅함에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가까스로 제어했다.

실력은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죄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지 행동이 굼뜨고 판단력 또한 좋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레 아델을 떠올렸다.

제 기사 중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겸비했다 여기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비록 리엘리가 납치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지는 못했으나 대처는 누구보다 빨랐고 정확했다.

‘차라리 아델을 붙일까.’

그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아니, 나을 것이다.

호위랍시고 끼고 다니는 것들이 죄다 그 모양이니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로베르 공작저로 들어가거나 반대로 리엘리를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로베르 공작의 반대는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공작 하나만 놓고 본다면 밀어붙여도 상관없겠으나 그 뒤에 서 있을 황제와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자신이 온종일 그녀의 옆에 붙어있을 수도 없었다.

역시 아델이 최선이겠군.

결심을 굳힌 아르반은 재차 입술을 뗐다.

“엘리, 솔직하게 말씀드려 너무 불안합니다.”

“네?”

“당신의 얘기대로라면 지금 이 상태로 지내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그자가 당신에 대한 얘기를 떠들고 다닌다면 더욱이. 당신이 또다시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리엘리는 그만큼이나 연약한 존재였으니까.

마법을 배우고 있다지만 아르반의 입장에서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호신용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저 누군가가 흉기를 들고 휘두르는 것만으로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는 못했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통감하게 됐다.

방심하는 순간 그녀를 잃게 되는 것도 한순간일 수 있다고.

‘마치, 어머니처럼….’

아르반은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찰나의 순간 가슴에서 밀려드는 격한 감정을 참아내기가 버거웠다.

그런 아르반의 모습에 리엘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그, 이번 기회에 호위를 대폭 늘릴게요.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응?”

아르반은 격정을 억누르는 와중에도 자신을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내심 마음에 들어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 덕에 쉽게 감정의 늪에서 벗어난 그가 희미한 미소를 걸친 채 대답했다.

“저를 걱정하실 게 아니라 당신이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겁니다.”

“위기감이야 충분히 느꼈어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죠.”

실제로 그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도 고려하던 사항이었다.

아무렴 그렇게 호위를 대동했음에도 손쓸 틈도 없이 납치를 당했는데, 그녀 역시 어느 정도의 위기감은 느끼고 있었다.

한동안 저택 밖으로의 외출 역시 자제할 생각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아델을 데리고 다니시죠. 어중간한 이들보다 아델 한 명이 더 나을 겁니다.”

“네? 세이린을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당신 곁을 지키고 싶지만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차선책이 아델뿐이군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세이린을 어떻게 제 호위로 둬요. 이미 소속된 기사단이 있잖아요.”

“이적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디를 가더라도 아델과 함께하시라는 말이죠.”

이적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무엇보다 가주의 허가가 필요했다. 당연하지만 기다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친구지 않습니까. 다소 이상하게 보는 이가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몇 달만 참아주십시오.”

“…….”

리엘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적이 아니라면 세이린 역시 몇 달 정도는 제 옆을 지키는 데 불만을 표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요. 세이린과 함께 지내는 거로 당신이 안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아델에게는 율렌의 존재를 알리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리엘리가 그의 의견에 수긍하기 무섭게 아르반이 이어 주장했다.

“이번 같은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지만 급하게 붙이기 힘드니만큼 녀석이라도 데리고 다니십시오.”

아델에게 들고 다니게 한다면 괜찮을 것이다.

비록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고 하나 직감과 신성력 만큼은 발군이니 분명 쓸모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까지요?”

“그렇게까지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일단 별수가 없으니 이렇게 하는 거죠.”

리엘리는 정색하는 아르반의 시선을 피했다.

불과 몇십 분 전에 그 사달이 있었으니 그가 저리 과민 반응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적응이 되질 않았다.

“…알겠어요.”

하지만 제가 적응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가 불안하다는데 어쩌랴. 그렇게 해야지.

사실 뒤집어 생각하면 그의 심정이 쉬게 공감이 가는 바였다.

누군가가 아르반을 납치했고, 그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저 역시 더 하면 더했지 덜한 반응을 했을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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