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사실 얼마 전에 세리나의 시체를 드디어 움직일 수 있게 됐거든. 내가.”
“…무슨 뜻이야.”
그녀는 기어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레이는 그런 리엘리에게 눈웃음 지으며 속삭였다.
“멍청한 공작의 바람대로 시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것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 낼 수는 있었거든. 그 덕에 내가 빙의할 수 있게 됐고, 결론적으로 내가 세리나의 몸을 조종하며 그 자식의 인형 놀이에 어울려주고 있다는 거지.”
리엘리는 일레이가 실실 쪼개며 지껄이자 일순 헛웃음 지었다.
“하하! 재밌어? 근데 나는 이제 재미가 없어졌거든. 공작의 인형 놀이에 장단 맞춰주는 거.”
일레이는 여태 히죽히죽 웃어대던 낯이 무색하게 정색하며 읊조렸다.
“하지만 우리 성녀님께는 관심이 가.”
그는 손을 뻗어 리엘리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니, 넘기려다 급히 손을 거두고는 슬쩍 미간을 좁히며 제 손을 내려다봤다.
잠깐 닿았을 뿐인데 손끝이 화상을 입은 듯 불그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손만 가져다 대도 이 모양이지.’
이 때문에 그녀를 데려올 당시에도 꽤 애를 먹었다.
그녀의 몸에서 지속적으로 발산되는 극미량의 신성력 때문에 몸에 손을 대기만 하면 제 안의 검은 마력이 들끓었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품을 뒤적여 하얀 장갑을 꺼내 꼈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양, 그녀의 머리를 헤집었다.
“손 치워!”
갑작스러운 접촉에 표정을 이지러트린 리엘리를 보고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면서 재미있고 흥미가 동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난 지금 성녀님이 아주 마음에 들어.”
기르는 개를 쓰다듬듯 그녀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쓸어넘긴 그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러니까 친히 내 본체까지 끌고 이렇게 얼굴 비치러 온 거 아냐. 내 얼굴이 얼마나 비싼지 알아?”
그딴 거 내 알 바냐.
리엘리는 속으로 그리 비아냥거리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 속만 태우고 있었다.
“두 번 볼일은 없을 테니 지금 많이 봐둬. 만약 다음번에 마주하게 되면 저 얼굴일 테니.”
일레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턱짓한 방향을 바라보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축 처져 있는 금발의 남자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여태까지 그 존재를 몰랐던 게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지만 그만큼 실내가 어둡기도 했고, 이 흑마법사가 그녀의 정신을 빼놓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엘리가 남자를 존재를 인식하는 사이, 일레이가 어딘가를 힐긋 바라보곤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리엘리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
몸을 구속하던 마법이 풀렸다.
그녀는 저릿한 팔다리를 꾸물거리며 땅을 짚었다.
일레이는 그런 그녀를 아쉽다는 듯 내려다보며 작별을 고했다.
“뭐, 성녀님 입으로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진상을 확인했으니 됐어.”
오늘 그녀를 찾아온 이유는 해소되었으니 이만 물러가도 미련은 없었다.
그는 단지 리엘리가 지니고 있던 신성이 무엇인지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앞으로의 일이 재미있어질 것 같았기에.
“왕자님이 데리러 오셨으니 마법사는 이만 물러가야 할 시간인지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가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있던 금발의 남자가 눈을 떴다.
벌떡 몸을 일으킨 남자는 리엘리를 향해 눈웃음 지었다.
“또 보자고, 성녀님. 참, 사용인 관리 좀 하는 게 좋겠던데. 입이 참 저렴했어.”
남자, 일레이는 엄지와 검지를 붙여 가볍게 몇 번 까딱이고는 벽에 기대놓은 제 본래 몸을 챙겨 들었다.
마치 몸을 바꾸는 듯한 광경에 리엘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자가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뒤통수를 때리고 싶었다.
이에 리엘리는 황급히 마력을 운용했다.
집중해서, 제게 피해가 오지 않을 정도의 위력만 내야 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항상 약하게, 폭발이 일어나지 않게 조절하려 했는데 이번은 정반대였으니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유동에 일레이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다급하게 느껴지는 몸짓만큼이나 경악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찢어질 듯 크게 뜨여있었다.
“어떻게 신성력과 마력을…!”
함께 가지고 있냐고?
그야 이 신성력은 몸에 저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엘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마력을 터트렸다.
콰과과광-!!
“으윽!”
예상보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녀는 폭발의 여파를 피하고자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가 이윽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문밖으로 날아가 처박힌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범위만 넓었지 위력이 약했다.
‘어디 한 군데 정도는 부러트릴 심상이었는데.’
리엘리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마력을 사용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말이야….”
일레이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여신의 종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러니 같은 맥락으로 당연하게도 리엘 리가 마력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다.
‘진작 마력 스캔부터 해볼 것을… 아니야.’
단순 접촉만으로도 제 안에 존재하는 검은 마력의 파동이 범상치 않은데, 만약 그랬다면 멀쩡히 걸어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일레이는 눈살을 찌푸린 채 리엘리에게로 향하려다 별안간 멈칫하며 혀를 찼다.
“쯧!”
그리고 잽싸게 제 본래 몸을 챙긴 그는 미리 준비해둔 마법진 위에 서서 마법을 발동시켰다.
일레이는 흐려지는 시야로 스치는 푸른 빛 안광을 확인했다. 간발의 차였다.
리엘리는 급히 자리를 뜬 일레이를 바라보다 거의 그와 동시에 부서진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어….”
뭐지, 왜 당신이…?
“아르반.”
그녀가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무엇이든 다 베어버릴 듯이 날이 섰던 아르반의 표정이 단번에 무너져내렸다.
리엘리는 그런 아르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불과 수 분 전까지만 해도 폐기물처리장을 나뒹군 것 같던 기분이 순식간에 고양됐다.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 짓는 표정. 다급한 발길. 뻗어오는 손.
그리고,
“…엘리.”
오직,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급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일으켜 제 품에 넣었다.
빈틈없이 그의 가슴에 밀착하게 된 리엘리는 그제야 밀물처럼 밀려오는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순간 숨이 막혀 살짝 그를 밀어냈다.
그러자 아르반이 벼락이라도 맞은 양, 제 몸을 떼어냈다.
마치 더러운 병균이 몸에 붙었기라도 한 듯이 다급히 떨어지는 모양새에 리엘리가 다소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봤다.
아르반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엉만인 그녀의 상태를 알고서도 힘 조절을 하지 못한 제 행동이 마음의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리엘리는 아르반의 팔을 다시 끌어당겨 제 허리께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이마를 톡, 그의 가슴팍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르반은 그런 리엘리의 행동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쿵-쿵- 쿵-
아르반의 심장 박동이 맞닿은 피부로 전해져왔다.
리엘리는 무심코 좀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조금 전보다 명확하게 울리는 심박 수가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켰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어떻게 당신이 왔어요.”
그 한마디에 굳게 다물려 열릴 줄 몰랐던 아르반의 입술이 놀랍도록 쉽게 떨어졌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타박하면서도 그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그는 언뜻 태연해 보이는 리엘리를 보고 안도하는 한편,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눈매를 좁혔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리엘리는 어디까지나 납치에 휘말린 피해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제가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아르반은 조용히 리엘리의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살짝 눈을 뜬 리엘리가 그를 쳐다봤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궁금해서요.”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아르반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와 함께 에시트 산맥에 다녀왔던 게 문제였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곳에서 몬스터 떼와의 습격을 겪으며 리엘리는 생각보다 위기감에 많이 둔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르반은 제법 그럴듯한 제 가설에 미약한 한숨을 토해냈다.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물론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불시에 닥쳤을 때는 보다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점일지도 몰랐다.
다만 불시가 아닌, 그녀 자신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해 위험에 뛰어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아르반은 내심 걱정되었다.
지금 리엘리가 제가 던진 질문만 해도 그녀가 현재 상황을 얼마나 안일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르반이 내심 우려하고 있는 문제를 짚어주려는 그때.
“엘리!!”
뒤늦게 아르반을 쫓아온 세이린이 안으로 들어섰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네, 저 괜찮아요.”
“왜 이렇게 먼지투성이가 되신 겁니까.”
세이린이 속상하다는 듯이 눈썹을 늘어트리자 리엘리가 아르반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문이 부서지는 바람에 그 파편들이 날려서….”
세이린은 그제야 제가 밟고 들어온 문이 산산조각이 나 있음을 인식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들어서면서는 주군이 때려 부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 다시 살펴보니 마력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납치한 놈이 위협적인 마법을 사용한 건가요.”
세이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질문했다.
그에 파편뿐이 남지 않은 문 조각을 발로 툭 치며 리엘리가 멋쩍게 설명했다.
“아뇨. 요즘 마법을 배우고 있는데….”
아르반은 재잘재잘 세이린에게 제가 마법을 배우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라 신신당부하는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그녀가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율렌이 스승인 만큼 어디서 누구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다 떳떳하게 말하기 힘들다는 것도.
다만 이 정도로 파괴력을 지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내심 놀랍긴 했다.
아르반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여상스럽게 세이린과 떠들고 있는 리엘리를 불렀다.
“엘리.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세이린 역시 아르반의 의견에 동의해왔다.
“예,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아, 그리고 보니 아몬은요? 저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먼저 저택으로 돌려보내 드렸습니다. 얼른 들어가서 안심시켜주셔야죠.”
리엘리는 세이린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니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가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경.”
“별말씀을.”
세이린이 먼저 멜라니스 저택으로 향한다며 자리를 뜨고, 리엘리는 아르반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서서히 출발하는 가운데 리엘리가 그에게 재차 물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알고 왔어요? 내가 오랫동안 기절해있었나….”
체감상은 잠시였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리엘리를 보고 아르반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약속보다 빨리 도착했는데 그때 당신이….”
막 납치를 당한 차였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그리될 일도 없었을 텐데.’
만약 리엘리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겠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입 안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