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바로 코앞에 있는 검은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 무겁게 전신을 가득 채우는 불쾌한 공기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아,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대놓고 싫어하면 상처받는다고.”
그런 내 표정을 제 마음대로 해석한 금발의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일어났다.
이윽고 이 끔찍하리만치 불쾌한 기운의 근원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밝은 웃음을 머금은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뭐라 말 좀 해보지? 몸을 구속해 둔 거지 입을 막아둔 게 아닌데 아무 말도 없으면 내가 서운해지잖아.”
“…당신이랑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기절했다 깨어났기 때문일까, 목소리가 심각하게 잠기다 못해 쇳소리가 섞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내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러실까. 공녀님도 궁금한 게 많으니까 온실 지하까지 기어 내려왔던 게 아니신지.”
흑마법사는 얄밉게 눈매를 접어 미소 지었다.
“나도 우리 공녀님께 궁금한 점이 아주 많아서 말이야. 이렇게 친히 자리를 마련했지.”
나는 놈의 말에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불빛이라고는 작은 촛불이 전부였기에 시야 확보가 여의치 못했다.
남자와 나밖에 없는 듯한 작은 방은 창문 하나 없어 내가 정신을 잃은 후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리네. 아, 역시 네 눈을 가져가는 게 제격인데 아쉽다.”
그는 입맛을 쩝 다시며 혀를 끌끌 차더니 때아닌 한탄을 늘어놓았다.
“공녀님은 공작이 얼마나 진상인지 모르지? 말도 말아. 맨날 네 눈동자랑 비교하면서 이 색은 이래서 다르고 저 색은 저래서 다르다고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나는 쿵쿵 세차게 뛰어내는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도 두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확하게는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세리나의 눈동자는 비어있다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얼마나 불편하지 그 인간이 알아야 하는데….”
한탄조로 이야기를 늘어놓은 남자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바닥에 묶여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이전의 같았다면 이런 상황에 두려워 벌벌 떨었을까.
하지만 그 혐오스러운 몬스터에 비하면 눈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생김새라도 그나마 봐줄 만한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한 확신이 있었다.
‘저 남자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에.’
“나는 왜 납치한 거야.”
솔직히 화가 나는 한편 어처구니도 없었다.
“공작은 네가 이런 짓 하고 다니는 거 알아?”
“그럴 리가. 당연히 독단이지. 그나저나 공녀님, 공작이랑은 여전히 사이가 별로인가 봐. 흠, 그전보다 안 좋아진 건가. 그래도 예전에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그런 건 네 알 바가 아니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하, 배짱 좋네. 납치돼서 묶여있는 건 그쪽이라고.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놈은 언뜻 나를 협박하듯 말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즐겁기 짝이 없어 보였다.
내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하자 남자는 재미없다는 듯이 코를 찡긋거렸다.
“이래서 데려온 거야. 엄밀히 따지자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 줄 생각이니 납치라기보다는 잠시 모셔왔다고 하는 편이 맞지 않겠어?”
“개소리하지 마.”
“왈왈. 하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마. 상처받는다고.”
이쯤 되니 짜증이 치솟았다.
나랑 이딴 말장난이나 하자고 이 사달을 내?
‘내가 사라져서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텐데….’
가장 먼저 아몬과 아르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뒤로 세이린, 로즈니, 그리고 루페르와 르미엘까지도.
내가 부주의했다고 속으로 한탄하고 있는데 이상한 포인트에서 웃음을 터트린 놈이 뜬금없이 제 소개를 해왔다.
“그리고 보니 공녀님은 내 이름도 모르겠네. 일레이라고 불리고 있어. 일단은.”
일단이란 건 가명이란 뜻이겠지.
나는 남자, 일레이에게 낮게 읊조렸다.
“시답잖은 말 상대가 필요해서 데려온 건 아닐 테고, 슬슬 본론이나 꺼내는 게 어때.”
인내심이 타버리다 못해 잿가루가 돼서 날아가 버릴 지경이니까.
“오, 무서워라. 그래, 왜 공녀님을 데려왔냐고 물어봤었지. 근데 나는 대답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물어볼 차례 아닐까?”
“…그게 대답이었다고?”
“그래. 공녀님이 이리 재미있어졌는데, 어떻게 관심이 가지 않겠어. 그래서 데려왔지. 3년 전이란 완전 다른 사람이 됐잖아. 원래 이렇게 소신껏 말할 수 있는 강단 있는 성격이 아니었지, 아마.”
*
일레이는 제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입을 꾹 다물고 저를 노려보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상당히 유쾌해졌다.
항상 실험체로 잡혀 온 인간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모습만을 봐왔기 때문일까, 생생하다 못해 사납기까지 한 공녀의 눈빛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뭐,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똑바로 말해. 원하는 게 뭐야.”
“목적, 그런 게 있기야 하지. 근데 또 급한 건 없거든.”
“…….”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급할 게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공녀를 데려올 당시 추적 방지 마법진을 그릴 여유가 없었기에 장소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곳을 떠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런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지.’
일레이는 히죽 미소 지었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이 나오는지라 오랜만에 아주 즐거웠다.
“화내지 마, 그래 봐야 공녀님만 기운 빠질 뿐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뇌가 과열돼 쉽사리 냉정을 찾기가 어려웠다.
리엘리는 일레이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마구 얽혀들어 작게 호흡을 골았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일레이가 제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본론을 꺼냈다.
“사실 공녀님과 마주쳤던 날 좀 이상한 걸 봐버려서 말이야. 그걸 물어보고 싶었어.”
“뭐가 궁금한데.”
“카넬로웰 대공에게 가려져서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그때 공녀님한테 분명 굉장한 신성력을 느꼈었거든.”
일레이는 잠시 그때를 곱씹듯 입을 다물고는 리엘리를 빤히 내려다봤다.
지금의 그녀에게서도 느껴져 왔다. 신물에서나 느껴지는 거대한 신성력.
그러나 그날 일레이가 감지했던 것은 이보다 더 막대하고 어마어마한 신성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근데 왜 오늘은 이렇게 느낌이 다른지 모르겠네….”
분명 신물 따위가 아닌, 공녀 본인에게서 발산되는 신성력이 맞았다.
애초에 인간은 신성을 몸에 담을 수 없었지만, 문헌에나 전해지던 성녀라는 존재라면 또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3년 전에 마주했을 때는 신성력은커녕 그 비스름한 기운도 느끼지 못해서 내심 신수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뭐, 신수나 성녀나 일레이의 입장에서 흥미롭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신수라고 해도 제국 건국 당시 초대 황제와 함께했다는 드래곤이 전부였고 성녀라는 존재는 그보다 더 오랜 기록에서나 서술될 뿐이었다.
다만 그가 의아한 건 하나였다.
왜 며칠 전 마주했을 때보다 신성력이 줄어들었는가.
그는 의문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뱉어냈다.
“분명 우리 성녀님을 마주쳤을 때 느꼈거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신성. 근데 지금은….”
그는 리엘리를 빤히 내려다봤다.
어두운 조명이 더해져 그의 눈동자는 마치 동공과 홍채가 하나가 된 양 새카맣게만 보였다.
“왜 이렇게 초라해졌지.”
솔직히 초라하다고 말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전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어진 신성은 일레이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아! 아니면 어디서 다 죽어가는 양반이라도 치료해줬나?”
일레이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이 리엘리를 바라봤다.
리엘리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일레이를 노려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흑마법사 놈들은 신성력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이군.’
단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신성력을 몸에 지닌 자가 검은 마력을 느낄 수 있듯이 반대로 저들 또한 신성력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일레이가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일레이를 위해 자신은 성녀가 아니고 사실 우연히 신성력을 지니게 된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레이로서는 입을 열지 않는 리엘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녀님, 나 혼자 떠들자고 그쪽을 납치해 온 게 아냐. 아, 그래. 그럼 입을 열 수밖에 없는 얘기를 꺼내 볼까.”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성녀님도 분명 좋아할 거야. 아주 재미있는 얘기거든.”
리엘리는 자꾸만 저를 성녀라 칭하는 일레이가 말도 못 하게 거슬렸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열고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게 저쪽에서 원하는 바임을 알았기에, 순순히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정신을 잃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도 이대로 시간을 끌면 반드시 구하러 올 거야.’
검은 마력 특유의 혐오감을 감지할 수 없다고는 하나 마력을 크게 소모하는 마법을 사용하면 자연스레 그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나를 납치한 게 흑마법사라는 건 모를지언정 마법사라는 건 알 수 있다는 말이지.’
대처가 얼마나 빠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난번 일레이를 추적하지 못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히 마법진이 준비된 상태로 시도한 이동이 아니었으니까.
“공작이 세리나의 부활을 위해 우리와 손잡고 있다는 건 성녀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일 거야.”
리엘리는 순간적으로 움찔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미묘한 기색을 기민하게 눈치챈 일레이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거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
“…….”
“공작이 세리나 로베르의 시체로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는 거.”
어때, 이제 좀 흥미가 생기나?
일레이가 히죽 미소 지으며 던진 한마디에 리엘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작이 세리나의 사체를 꺼내다 되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런 놈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어지는 일레이의 이야기는 그녀의 내면을 급격하게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