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홉뜬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가 그득 고인 눈물로 인해 일렁였다.
“…르미엘 멜라니스.”
그런 르미엘의 모습에 루페르 역시 제 잘못을 깨달았는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죄, 죄송해요. 오라버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르미엘의 기죽은 목소리에 루페르의 굳어진 낯이 일순 무너졌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입을 열었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거라.”
“훌쩍, 네에…. 죄송해요.”
“…애초에 네 잘못만은 아니니 사과할 건 없다.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내 과실도 배제할 수 없으니.”
르미엘의 눈높이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은 루페르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미안하구나.”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루페르가 르미엘을 좋게 보지 않는다 여겼는데, 그래도 내 예상보다 그녀를 미워하는 건 아닌 듯했다.
‘싫어하고 미워한다기보다는 어색하고 껄끄러워하는 눈치인데.’
어쩌면 르미엘의 어머니인 계모를 싫어하는 것과 달리 르미엘에게는 다른 악감정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다만 이런 내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루페르가 손수건과 함께 건네 사과가 기폭제가 되었는지, 작은 손에 손수건을 꼭 움켜쥔 르미엘이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흐어엉…! 오라버니…!”
르미엘이 그가 무얼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제 오빠의 품에 와락 안겨드는 탓에 루페르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 목덜미에 매달려 엉엉 우는 르미엘이 당황스러운지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했다.
그러다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절박한 표정으로 입을 뻐금거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주십시오, 공녀님.’
나는 쯧쯧 속으로 혀를 차며 입 모양으로 조언했다.
‘토닥여줘야죠.’
벙긋거리는 입 모양새를 통해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루페르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해졌다.
그는 어색하게 르미엘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로즈니를 바라봤다.
그러자 로즈니는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마치 오라버니가 울렸으니 오라버니가 달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루페르는 약간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나지막이 입을 열어 재차 사과했다.
“…미안하다. 화를 낼 생각도, 너를 놀라게 할 생각도 없었어.”
사방이 시끄럽고, 정신없이 울고 있는 와중에도 그 한마디를 들은 모양인지 르미엘의 울음이 일순 멎었다.
그러나 곧 더욱더 서럽게 엉엉 울어대며 르미엘을 보고 나는 쓰게 웃었다.
그녀가 지금 토해내는 울음은 루페르가 소리를 질러 놀란 것보다 다른 이유가 더 커 보였다.
‘마음에 쌓인 설움이 많았나 보네.’
*
정신없이 울던 르미엘이 가까스로 진정했을 무렵, 어느새 퍼레이드는 끝이나 있었다.
로즈니는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르미엘의 머리를 편하게 제 무릎에 기대게 하고 눕혀주었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나는 아몬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깨어있기에는 야심한 시간인지라 피곤해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몬은 말똥한 눈으로 나와 시선을 교환하며 맑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이 시간에 이렇게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아몬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던 나는 그냥 작게 마주 웃어 주었다.
뭐, 오늘 같은 날은 깨어 있는 게 이득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그대로 잠이 든 르미엘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축제에 관한 화제를 중심으로 일상적인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루페르의 시선이 드문드문 르미엘에게로 향하는 게 시야에 비쳤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내심 르미엘에 관한 이야기를 그와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을 했다.
“아, 이제 시작되려나 보네요.”
그때 문득 세이린이 입을 열었다.
나는 주어 없는 그녀의 이야기에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불꽃놀이 말입니다.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지네요.”
세이린의 설명과 동시에 나 또한 주변에서 대량의 마력이 한순간 폭발적으로 끓어오름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고막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아름다운 불꽃이 어두운 밤하늘에 수놓아졌다.
“아.”
이런,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잔이 가득 차 있단 사실을 망각하고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움직여버렸다.
그 바람에 내용물의 반절 정도가 손과 옷자락에 스며들었다.
“이런, 괜찮으신가요?”
세이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불꽃놀이에 집중하고 있는 일행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살짝 일어나며 답했다.
“네, 괜찮아요. 잠시 손만 좀 씻고 올게요.”
“같이 가시죠.”
“아뇨, 괜찮아요. 호위들이 있는데요.”
내가 살짝 웃으며 거절하자 내 뒤쪽에 시립한 기사들을 확인한 세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사들을 대동한 채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아르반과 한 번 더 보기로 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불꽃놀이를 더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호위 둘을 매단 채 손을 씻고 숨을 돌리는데, 불현듯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익숙하지만 불쾌한 기운에 재빨리 고개를 돌린 나는 일순 몸을 굳혔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그대로 입이 막혀버렸다.
“읍, 으읍!!”
머지않아 시야가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세이린은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와중, 건물 내부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의 파동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세이린?”
“남작?”
그녀가 갑작스레 자리서 일어나자 로즈니와 루페르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세이린은 한가로이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당신,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녀는 옥상에 남아 있던 기사 한 명에게 소리치며 거의 반사적으로 뛰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잠… 세이린! 어디 가시는 거예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다.
어떤 마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여파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너무도 강력했다.
주변에 포진해 있던 기사들 역시도 그 마력을 감지하고는 그녀와 함께 진원지로 뛰어나갔다.
제발 아니기를 바랐건만… 하필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마력의 진원지는 다름이 아닌 리엘리가 손을 닦고자 들어간 화장실이었고….
화장실 앞 바닥에는 리엘리의 호위를 서던 기사들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하….”
세이린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엘리….’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군지 모를 마법사에 의해 리엘리가 납치당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자 세이린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황하거나 식겁하여 넋을 놓지 않았다.
전쟁터를 몇 년 전전하며 이런 위급 상황에 익숙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공녀님께서 마법사에 의해 납치되셨습니다. 지금 당장 일대를 통제하고 수색에 들어갑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과 눈이 마주친 기사에게 지시했다.
“경비대로 가서 상황 전달하고 최대한 빨리 마법사를 보내라 이르십시오. 그리고 일대 통제에 들어갑니다.”
“예!”
그가 사라지자 세이린은 남아있는 마력이 흩어지지 않게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마법사가 와서 순간 이동된 장소의 좌표를 알아내기까지 장소를 보존해야 했다.
그녀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하.”
역시 혼자 보내지 말고 함께 왔어야 했는데….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었다.
그렇게 자책하던 세이린은 문득 주군의 일정과 함께 리엘리가 재잘거렸던 이야기에 대해 떠올렸다.
‘두 번째 불꽃놀이는 주군과 함께한다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지금부터 두어 시간 이내로 주군이 이곳에 도착한단 소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군.’
주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리엘리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 분노를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세이린은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억지로 삼켰다.
그 전에 리엘리를 찾아내면 된다.
두 시간이라면 추적하고 현장을 덮치기 충분했다.
아마 리엘리는 무사할 것이다.
그녀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번거롭게 납치하지도 않았겠지.
‘…고문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다.
군사 기밀을 빼낼 것도 아니고, 일개 공녀에 불가한 그녀에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터.
다만 그녀가 많이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부디 무사하셔야 할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세이린은 리엘리의 안위에 대해서만 염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리엘리가 돌아오지 않음을 깨달아 자신을 찾은 일행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리엘리를 찾을 때까지 남아있겠다는 로즈니와 아몬을 반강제로 마차에 태워 우선 돌려보냈다.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 남아서 기다린다 한들 변하는 건 없었다.
나중에 돌아온 리엘리의 마음만 더 불편해질 뿐.
그렇게 마법사가 도착하길 홀로 기다리던 세이린은 뜻밖에도 마법사보다 먼저 나타난 한 사람을 바라보고 몸을 뻣뻣이 굳혔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신음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각하.”
“아델, 주변이 소란스럽더군. 무슨 일이지. 그리고 엘리와 함께 있던 게 아니었나.”
그녀는 어둠 속에서 시리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난감함에 한숨을 삼켰다.
“그게….”
이어지는 세이린의 설명을 들으며 안 그래도 딱딱하던 아르반의 얼굴은 말도 못 할 만큼 굳어져 갔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주군의 모습에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녀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르반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는.”
공간이동 마법을 추적할 마법사가 언제 도착하냐는 물음이었지만 그 눈빛과 음성이 어찌나 서슬 퍼런지, 왜 여태 마법사를 잡아 죽이지 못했냐 힐난하는 듯했다.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되었습….”
그때.
타이밍이 좋다고 할지, 나쁘다고 할지 모를 마법사가 도착했다.
“헉, 허억…! 고, 고고고공녀님께서 나, 납치되셨다는, 마, 말을 듣고 왔습니다만….”
그는 살얼음판보다 더 아찔한 분위기에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심각하게 말을 더듬어댔지만 안타깝게도 마법사를 신경 써줄 사람은 존재치 않았다.
“이쪽입니다.”
그녀는 재빨리 마법사를 인도했다.
아르반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
“-녀님. 공녀님.”
나는 귓가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에 미간을 좁히며 신음했다.
“으….”
“아, 일어났네. 안녕, 공녀님? 오랜만. 아니, 오랜만은 아닌가. 얼마 전에 봤었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어디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의 남자가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