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는 눈을 둥글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릭이 마음을 굳힌 듯, 딱딱해진 얼굴로 설명했다.
“예…. 실은 며칠 전에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며칠 전 릭은 우연히 에드가가 낯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고 한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에드가의 목소리만큼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고.
“에드가가 그 사람에게 도련님과 아가씨께서 새벽 축제의 둘째 날에 참여하신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팔짱을 끼고 팔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딱히 비밀에 부쳤던 사항도 아니고, 그 정도는 사용인 간에 오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릭이 그걸 모르지도 않을 테고….’
달리 마음에 걸리는 사항이 있었던 걸까.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아가씨와 도련님을 모시는 사용인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래.”
“그런데… 그날 이후로 에드가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합니다.”
그는 미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묘하게 안절부절못하기도 하고 저를 볼 때마다 흠칫흠칫 떨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반복되니 마음에 걸리더군요.”
“음.”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동을 하면 당연히 그렇겠지. 나 같아도 그리 생각했을 듯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방금 있던 일 때문에 아가씨께 찾아오게 됐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머뭇거렸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자 작게 한숨을 토해낸 그가 어렵사리 다시 입을 뗐다.
“…에드가가 고의로 저를 계단에서 밀쳤습니다.”
“…뭐?!”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릭이 대답하는 대신 제 바짓단을 걷어 보였다.
여태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어처구니없을 만큼 퉁퉁 부어있는 발목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은 실수였다고 했지만, 눈이 마주쳤었습니다. 절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그래, 네 말이 맞다면 그럴 것 같네.”
나는 붕대가 감겨있는 릭의 다리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러고 멀쩡히 걸어들어온 게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치료는 제대로 받았고?”
“예. 치료를 마치고 곧장 올라왔습니다.”
“그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 축제에 호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동반할 사용인이 릭이었다.
에바와 세바니는 이전부터 축제 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을 들어왔기에 둘이 놀 수 있게 일행에 넣지 않았고 아몬이 에드가보다 릭을 더 편해하는 것 같아 그만 데려갈 심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에드가가 동행하게 될 테고….’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릭의 말을 전부 신용할 수는 없다지만 그가 내게 거짓을 고할 이유도 없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어. 이만 가서 쉬도록 해.”
“그럼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그래, 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신전에 가서 발부터 치료받고 오도록 해.”
“…예?”
“아몬의 전속 시종이라고 해봐야 너랑 에드가 둘 뿐인데 네 다리가 이래서 어떡하겠어. 빨리 나아야지.”
“아, 아닙니다. 접질린 것뿐이라 그럴 필요까진….”
이런 가벼운 부상 정도는 신전에 들러 기부하는 것으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비용이 저렴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네가 행동이 굼뜨면 불편한 건 아몬이야. 말은 전달해 둘 테니 꼭 들러. 사양하지 말고.”
재차 거절할 요량이었던지, 내 사양치 말라는 명에 멈칫했던 릭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부축해줄 사람을 불러줄 테니 잠시만 있어.”
“거동에 무리가 되는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기는, 무리하고 있을 게 뻔한데.
속으로 혀를 차며 적당히 부축해줄 하인을 하나 붙여주었다.
릭이 물러가자 잽싸게 튀어나와 내 옆에 자리 잡은 율렌이 말했다.
“흐음,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내 생각에도.”
나는 에드가를 불러 직접 추궁할까, 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도 증거 없는 추궁에 입을 열지는 않는다.
또한 릭의 증언만 믿고 속단해 그를 의심하기는 일렀다.
‘그래도 찝찝하긴 하니 데리고 나가지는 말아야겠어.’
*
“엘리, 이쪽이에요!”
“안녕하셨습니까, 공녀님.”
축제로 인해 몰려든 인파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환하게 미소 짓고는 로즈니와 루페르가 있었다.
‘응?’
분명 함께 온다고 했던 르미엘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아이를 찾아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로즈니가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아무래도 축제다 보니 많이 복잡하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로즈니. 르미엘은요?”
“아아, 아래가 워낙 복잡해서 위쪽에 자리 잡은 곳에 세이린과 함께 기다리고 있답니다.”
아하, 미리 자리를 잡아뒀구나.
“사실 이런 축제는 처음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호위를 대동한 마당에 뒤섞일 수가 있어야지요.”
“아.”
그건 그랬다.
나 또한 인근까지는 마차를 타고 왔지만, 축제 장소로 다가갈수록 늘어나는 인파에 길목이 점점 좁아져 결국 걸어오느라 조금 늦어버렸으니까.
나는 로즈니에게 끌려가는 와중에 아몬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주변에 호위들이 포진해 있다 한들 순식간에 아이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몬은 내가 저를 돌아보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그에 반사적으로 따라 웃던 나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로즈니를 따라갔다.
그녀가 우리를 이끌고 향한 곳은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그래 봐야 4층이지만.’
그럼에도 이 근처에 더 높은 건물이 없었기에 이 정도면 굉장히 높은 축에 속했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셨나요, 공녀님.”
나는 세이린과 르미엘에게 마주 인사하며 아몬을 내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올려다본 아몬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델 경.”
“예, 공자님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저야 물론이죠. 그런데 이쪽은….”
아몬이 르미엘을 바라보자 어쩐지 뚱해 보이는 표정의 르미엘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로베르 공자님. 멜라니스 가의 르미엘 멜라니스라 합니다.”
“로베르 공작가의 아몬 로베르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예의를 다 지켜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인사말만 보면 애인지 어른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지만 둘이 진지하게 저리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르미엘은 아몬과 인사를 마치고는 입을 꾹 다물고 로즈니를 올려다봤다.
마치 잘했냐고 묻는 듯한 모양새라 로즈니 역시 이러한 시선을 느낀 듯 옅게 웃으며 르미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다른 칭찬 없이 그저 두어 번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길에도 르미엘은 밝게 미소 지었다.
그런 르미엘의 표정 변화를 보고 로즈니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낯으로 르미엘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몇 번 더 쓰다듬고는 손을 내렸다.
르미엘이 생각보다 아몬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아몬을 힐긋 바라봤다.
아몬 역시 나를 보고 있던 모양인지 시선이 마주쳤다.
‘음, 멜라니스 남매의 사이가 돈독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함께 외출하자고 한 게 크지만….’
그래도 아몬이랑 르미엘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도 작지 않았기에 내심 아쉽긴 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억지로 등 떠밀어 친하게 지내라 종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세이린의 동생을 소개받거나 다른 아이를 사귈 수도 있는 거니까.’
로즈니가 건물 옥상을 통째로 빌린 덕에 우리는 편하게 축제를 관람할 수 있었다.
직접 내려가서 거리 음식도 사 먹으며 이리저리 활보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아이들이 있으니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리셀과 클레어가 축제 때 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고 변을 당했다고 했으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게 마음은 더 편했다.
새벽 축제라는 이름답게 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행사인지라 주변을 장식한 번쩍번쩍한 불빛들이 꽤 볼만했다.
고층 건물들이 없어서일까, 아래에서 빛나는 수놓는 등불들이 더욱 돋보여 굉장히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와… 저런 것도 마법으로 구현하는구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환상 마법으로 구현해낸 동물들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중 내 시선을 빼앗는 커다란 코끼리가 앞발을 들고 사람들을 덮칠 듯한 동작을 취했다.
생생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마법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코끼리였기에 사람들은 비명 대신 함성을 질러댔다.
“와아아!!”
나도 내심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감탄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우와!”
“……!”
르미엘이 턱을 밟고 난간에 매달린 채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자세에 순간 너무 놀라 앉아 있던 의자가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식겁한 나는 곧장 르미엘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그녀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르미엘!”
루페르였다.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긴 그가 버럭 소리치자 퍼레이드를 바라보던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몰렸다.
나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위를 많이 데려왔다고 한들, 바로 옆에 포진시켜 둔 게 아닌 데다 다들 퍼레이드에 신경이 팔려있었기에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애들은 한순간도 눈을 떼면 안 되는 법인데, 우리 아몬이 워낙 얌전하고 어른스러워서 그 사실을 종종 잊고는 했다.
나는 급히 아몬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
천만다행으로 언제나처럼 얌전히 내 옆에서 나를 걱정스러운 낯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나… 많이 놀라신 듯한데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래.”
아이를 안심시킨 나는 다시 르미엘과 루페르 쪽을 살폈다.
잔뜩 풀이 죽은 르미엘이 울먹이는 눈으로 루페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