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나는 방으로 돌아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율렌에게 털어놓았다.
“호오… 그 화가가 알고 보니 마탑주의 수제자였단 말이야?”
“응, 진짜 놀랐다니까.”
놀랐다 뿐일까, 실상을 알고 보니 더욱더 리셀이 안타까워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전도유망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유일한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게,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오는 듯했다.
“유감이긴 하네…. 흠, 이름이 뭐라고 했지? 리… 뭐?”
“리셀.”
기억력도 좋은 애가 되물어오는 것으로 봐서는 그간 내가 말할 때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리셀. 그래, 그 리셀이라는 자. 유망한 마법사가 허망하게 져버리는 건 아까운 일이지. 흑마법에 의해 마력을 잃었다면 내가 좀 봐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율렌이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하는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설마 네가 고쳐줄 수 있어?”
“그건 장담할 순 없어.”
나는 일순 희망에 가득 차 물었다가 녀석의 불확실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 내 모습에 설명을 덧붙일 필요를 느꼈는지 녀석이 재차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에 의해 마력을 잃고 회로가 망가졌다면 십중팔구 마력을 강탈당한 거야. 전에 네가 리리의 기억에서 봤던 리셀과 함께 쌓여있었다는 시체들. 그들이 그랬겠지.”
나는 다시금 뇌리에 생생히 떠오르는 그 장면에 표정을 굳혔다.
“그 사람들이 다 마력을 강탈당했다는 거야?”
“내가 직접 보지 않았으니 확답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럴 거야. 마력이 사라지는 건 둘째치고 그 고통 탓에 백이면 백 죄다 죽어 나간다고 알고 있어.”
“…….”
기억 속의 시체들의 입술과 손끝이 죄다 뭉그러져 있던 건 역시 고통을 참기 위함이 맞았던 모양이다.
“검은 마력은 결국 다른 인간의 마력을 강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과 마력이 혼합돼서 발생하는 거야. 그 때문에 마력을 강탈할 인간에게 극한의 고통을 느끼도록 유도하지.”
“…….”
“내가 어느 정도 마력을 되찾는다면 인간의 마력 회로를 복구해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통증이 수반될 거야. 아마 마력을 강탈당할 당시보다 더.”
녀석은 제가 말하고도 확신이 없는지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제 의견을 정정했다.
“아니다, 더는 아닌가. 흐음…. 나도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아무튼 쇼크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아냐?”
“어어, 맞아. 강탈당할 때 아무렇게나 찢겨나갔을 마력 회로를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찢었다가 회복시켜야 해서.”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어찌 됐든 지금 당장 가능한 얘기는 아니야.”
“그렇지….”
하지만 이후에 리셀에게 물어보기는 해야겠지.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고 죽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마력을 되찾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그건 내 선에서 함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나중에 클레어의 눈을 치료해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같이 얘기하면 될 듯했다.
*
시간은 언제나 붙들어 들새도 없이 흘러간다.
나는 가만히 앉아 내 초상화를 그리는 리셀을 바라보다 벌써 내일이면 새벽 축제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내일부터 새벽 축제가 시작되겠군요.”
“네, 시간이 참 빠르네요.”
그는 캔버스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여느 때와 달리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 노파심에 불과하겠지만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안전에 유의하도록 할게요.”
그가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지 알았기에 구태여 묻지 않았다.
클레어와 리셀이 납치되어 끌려갔던 날이 바로 축젯날이라고 했으니까.
‘그 축제가 새벽 축제인지까지는 묻지 않았지만….’
리엘리가 그와 마주했던 시기로 미루어 보아 아마 맞을 터였다.
본래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법이다.
그의 충고처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니 리셀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문득 아르반과의 약속을 상기해 냈다.
그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지만 실상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반이 급히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과 만날 필요가 있었기에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몬의 수업만큼은 빠짐없이 진행해 주는 덕에 잠깐씩 얼굴을 볼 수는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 아르반에게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도 못 하느냐며 투정 부릴 생각도 없었다.
아르반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집에서 마법과 정치를 공부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리엘리의 기억을 받아들이며 후계자로서 받았던 교육들 역시 머릿속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아르반이 그때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데이트는 한동안 더더욱 엄두도 못 냈겠지.’
며칠 전, 여느 때와 같이 아르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몬의 수업이 마쳤을 무렵,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는 잠시라도 머물 시간조차 없었는지 훈련장을 빠져나와 이미 현관으로 걸음을 옮긴 지 오래였다.
가까스로 그를 찾아 인사를 하자, 마차를 앞에 둔 아르반이 불현듯 내게 질문했다.
“엘리, 며칠 후에 있을 새벽 축제에 방문하신다고 하셨지 않았습니까.”
“아, 네.”
“괜찮으시다면 잠시나마 함께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의 제안에 눈을 크게 떴다.
“저야 당연히 좋죠. 그런데 당신 괜찮겠어요?”
“새벽에는 시간을 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속이 상했다.
새벽에나 시간을 낼 수 있다니, 그럼 전까지는 쉴 수 없다는 말이잖아.
그런 내 마음이 표정에 그대도 드러난 모양인지 아르반이 설핏 미소 지으며 내 얼굴을 쓸어왔다.
그의 따듯한 손길에 살짝 눈을 감고 기대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무리하고 있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비록 처음부터 함께하기는 어렵겠지만 불꽃놀이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매일 새벽까지 일하는 거예요?”
“…매일은 아닙니다.”
아르반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작은 머뭇거림을 읽어낸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를 흘겨봤다.
“거짓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축제 이후부터는 좀 더 여유가 생길 겁니다. 지금은 낮에 만나볼 이들이 많은지라 서류 처리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러니 이해해주십시오.”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 걱정되는 거예요.”
내가 투덜거리자 그가 살짝 입을 달싹이다 도로 다물어버렸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입을 뗐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며칠 정도 잠을 안 잔다고 문제 생기는 게 아니란 것도요.”
“…….”
그가 표정 없는 낯으로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영락없이 내가 저를 왜 걱정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새로 삽시간에 가슴이 답답해진 나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퉁, 치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튼튼하고 강한 것과 별개로 걱정되는 거라고요!”
으이구, 진짜!
그는 내 속이 터지는 것과 별개로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내 걱정이 기꺼운 듯 작게 웃었다.
그에 다시 한번 주먹을 치켜들자 아르반이 살짝 내 손목을 붙들어 왔다.
“잘못하면 손목이 상할 수 있습니다.”
“아, 몰라요!”
사람 가슴 좀 치는데 손목이 상할 리가 있겠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타격감이 단단하다 못해 마치 돌기둥을 때리는 듯했기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나는 이번에도 이중 약속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번에는 내 고의가 아니었다.
실상 축제가 진행되는 건 둘째 날 하루로 불꽃놀이 역시 그날에만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앞뒤로는 말이 축제지 사실상 그냥 노는 날에 가까운 느낌이라 했다.
그래도 자정에 한 번, 새벽녘에 한 번 더 진행된다고 하니 몸을 둘로 나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물론 아르반을 포함해 다 같이 논다면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러려면 모두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그게 번거롭고 면구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귀고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 번 못 해봤으니까.’
비록 잠시라도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공녀님, 이제부터 세밀히 작업해야 하니 웃으시면 안 됩니다.”
“아, 미안해요.”
기억을 곱씹다가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멋쩍게 사과하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
나는 힐끔, 율렌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마.”
“누가 풀 죽었다고 그래….”
너지 누구겠니.
나는 뒷말을 삼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렌을 제외한 내 지인 대부분이 이번 축제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니까.
“내년에는 너도 같이 가자. 미안해.”
“…네가 미안할 일도 아닌데 사과하지 마.”
율렌은 기운 없는 것과 별개로 내 사과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마력이 부족한 걸 왜 네 탓을 하겠어.”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회복된 거 아니야?”
“맞아. 하지만 몇 시간씩 투명화를 유지하고 폴리모프가 가능한 정도는 아니거든.”
“음….”
그렇다고 다 같이 함께하는 축젯날 바구니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정말 다른 수가 없었다.
내가 침음을 흘리자 율렌이 축 늘어진 채로 꼬리만 들어 올려 휘적휘적 저어댔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고 와.”
그렇게 말하면 더 미안해지는데….
하지만 이미 약속된 일인지라 차마 다른 말을 붙이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렇게 어색한 적막 속에 불편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율렌은 방문자가 누군지를 밝히기도 전에 잽싸게 몸을 숨겼다.
이제는 인기척만 있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아가씨, 릭입니다.”
“들어와.”
나는 갑작스레 나를 찾아온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는 미묘한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평소 같지 않은 그의 태도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항상 똑 부러지게 할 말 다 하는 사람이 별일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릭이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말해봐.”
“그, 아가씨. 함부로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인데.”
“다름이 아니라, 에드가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에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