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우롱했다라….’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찌 말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여태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클레어가 화들짝 놀라며 급히 입을 뗐다.
“아, 아냐, 오빠.”
“…클레어?”
“내가, 내가 아가씨께 부탁드렸어. 오빠한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나는 클레어의 돌발행동에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그녀가 나서서 직접 해명하려 들지는 몰랐다.
“…클레어 네가? 어째서?”
그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클레어는 몇 번 입술을 뗐다 꾹 다물기를 반복하다 결국 대답했다.
“…내가 오빠의 걸림돌이 되지 않길 바랐어. 앞길이 창창한데 나 같은 게 곁에 있으면 방해가 될 테니까.”
“클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리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반박했다.
다만 목소리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에 클레어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빠는 마탑주의 수제자로 승승장구할 텐데, 평민 출신인 것도 모자라 눈도 없는 동생이 곁에 있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더구나 우린 이복 남매인….”
“클레어!”
그녀가 점점 몸을 움츠리며 털어놓은 이야기에 결국 참다못한 리셀이 소리쳤다.
그에 놀란 클레어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소리친 당사자 역시 그제야 제가 큰소리를 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달랬다.
“미, 미안해. 소리 지르려던 게 아니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말했잖아. 넌 내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너마저도 없으면 난 대체 어떻게 하라고….”
“…미안해.”
클레어가 훌쩍이기 시작하자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던 리셀이 조심스레 그녀를 감싸 안았다.
“내가 더 미안해. 네게 믿음을 주지 못해서.”
나는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울먹이는 가운데 머쓱하게 앉아 자리를 지켰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감싸며 흐느끼는 와중에 클레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목멘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런데 오빠, 아가씨의 초상화를 그려드리기 위해 왔다면서.”
“그래, 맞아.”
“오빠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거로 은혜를 갚기보다 다른 쪽으로 보답하는 편이 좋지 않아?”
“…….”
리셀의 침묵에 클레어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게는 묻지 않아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클레어는 내심 제 오빠가 왜 하필이면 그림을 그려 내게 보답하고자 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지.’
평민 출신이었다니 그들 사이에서 은근한 멸시와 따돌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탑주의 수제자라는 타이틀은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압도적인 위치에 있을 사람이 제 능력을 사용하는 대신 고작해야 그림을 그려준다는 사실이 클레어에게 얼마나 이상하게 비쳤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갔다.
“…놀라지 말고 들어.”
리셀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느릿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세한 묘사는 생략되어 있었지만, 그가 클레어와 같은 곳에서 다른 실험의 희생양으로 잡혀 더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자 듣다 못한 클레어는 그의 얘기를 끊고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 오, 오빠가 어째서?!”
“나도 축제 때 너와 같은 음료를 마셨잖아, 클레어.”
리셀은 차분한 어조로 씁쓸히 말했다.
“약물은 내성이 없다면 마력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어. 눈치챈 뒤는 이미 당한 후니까.”
“…….”
클레어가 멍하니 넋을 잃고 있자 씁쓸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리셀이 나를 돌아봤다.
“제가 당치 않은 오해를 한 듯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내가 말리기도 전에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이는 리셀에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사과할 것 없어요. 고개 들어요. 제가 오해할 수밖에 없게 말했는걸요.”
“감사합니다.”
그제야 리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공녀님, 여태까지는 공녀님께서 저희를 납치한 놈들과 연관이 없다 판단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
“비록 한순간도 공녀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날 공녀님의 표정과 행동은 절대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죠.”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기억을 확인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라 머릿속에 너무 생생해 나도 모르게 반응할 뻔했다.
“무엇보다 정말 연관이 있었다면 저를 살려주셨을 리 없다는 걸 압니다. 또한, 어차피 되돌릴 수도 없는 일에 매달리느니 클레어를 찾는 것에 전념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러잖아도 그가 어째서 리엘리를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리셀이 뱉어내는 이야기로 인해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이 모두 해소되었다.
“다만 클레어를 이렇게 만든 것 역시 흑마법사 놈들의 짓이란 걸 알게 된 이상 확실히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로베르 공작께서, 이 일의 주범이신 겁니까.”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와 같이 벼려진 눈.
솔직히 긴장됐다. 다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 편으로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셀이 그와 클레어를 이렇게 만든 주범이 공작이란 사실을 짐작했으리란 건 예상한 바였다.
비록 저런 이유로 묻지 않은 건 몰랐지만, 3년간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혼자 고뇌했을 그의 인내심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찌 됐든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은 정해져 있지.’
나는 그에게 거짓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공작이 연관된 게 맞아요. 당신의 짐작대로 제가 그 일에 관계되지 않았던 것 역시도.”
잠시 말을 끊은 나는 클레어와 리셀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 사람은 공작이 벌인 사건의 피해자이니만큼 사건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별개로 공작의 뒤에 선 세력이 황실임을 아무런 힘도 없는 두 사람이 알게 된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입이 가벼울 것 같지는 않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불리하게 흘러 들어갈 수도 있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 하니 실험을 중단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공작과 관련되었다 보니 제가 힘을 쓸 수가 없어요. 그 때문에 카넬로웰 대공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요.”
모든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거짓말은 아니지만 적당히 진실을 가려두기로.
“…카넬로웰 대공께서 말입니까.”
그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리셀의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일 수도 있었다.
화가인 셀리안을 내게 소개해 준 게 그라고 한들, 나와 아르반이 그렇게까지 긴밀한 사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테니까.
“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줬으면 해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반드시, 공작을 처단할 테니.”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생각을 조금 고쳤다.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면 내 세력을 쌓아가겠노라고.
‘어떤 방면으로라도 힘을 키워야 해.’
율렌이 힘을 회복하는 거야 곁에 붙어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지만 아르반이 황좌에 오르는 건 얘기가 다르다.
‘아르반이 황제가 될 생각을 했다는 건 좀 충격이었지만….’
그 덕에 어렴풋이 고민만 하고 있었던 선택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무력으로 황위를 찬탈할 수야 있겠지만 그를 지지하는 기반 세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크다.
아르반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황제에 대적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세력을 구축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손가락 빨며 상황이 정리되길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차기 공작으로서 내 사람들을 만들어야 해.’
솔직히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요량이었다.
로베르 공작이 이번 사건의 주범이었기에 걸리는 바가 없는 건 아니나 아르반이 황좌에 오르면 그 작위를 내가 가져오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닐 터.
그 사실을 십분 이용해 보이겠다.
나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셀이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에 뵈었을 때와 많이 달라지셨다 생각은 했지만 마치 다른 사람 같으시군요. 가족이니만큼 결정하시기 힘드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를 듣고 잠시 멈칫했던 나는 이내 잔잔한 미소를 내건 채 말했다.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예, 물론.”
그는 한풀 기색이 꺾여 미지근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는 많이 불안해 보이셨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나는 속으로 작게 쓴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당시 리엘리를 마주했던 모두가 같은 감상을 늘어놓을 것 같아서.
아무렴 멀쩡해 보였다면 오히려 그 사람의 안목을 의심해봐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굳건해지셨군요.”
“좋게 봐줘 고맙지만 그렇지만도 않아요.”
비록 이전의 리엘리와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 역시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공녀님께서 하는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성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
“아마 공녀님께서 진심을 다해 말씀하신다는 게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응시했다.
진지한 낯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해대는 그에게 무슨 답을 하면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빈말 같지도 않아서 더….’
그러나 이후 침묵이 계속되자 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무슨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요. 내가 뱉어놓고 이렇게 말 뒤집어서 웃기긴 하지만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한 소리예요.”
그렇게 철석같이 사이비 종교 믿듯이 신빙성 없는 말에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난감하다는 듯 덧붙이자 그는 옅게 웃어 보였다.
“이성은 근거 없는 말이라 경고하지만 묘한 설득력이 느껴졌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요.”
“원하신다면.”
그 뒤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우선 클레어의 거취 문제.
이제 공작저에서 생활해야만 하는 문제가 사라졌으니 자신과 함께 생활하자는 리셀과 그가 마법사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능하다면 시녀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클레어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다행히 이 문제는 내가 나서서 어렵지 않게 일단락되었다.
“클레어, 너도 마법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정식으로 배워볼 생각이 없니?”
“네? 제가요?”
“응. 내가 아는 마법사가 있는데 그… 우연히 저택에 방문했을 때 너를 본 적이 있나 봐.”
내 이야기에 리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육안으로 보고 그런 사실을 알았다는 말입니까?”
음, 사실 마법을 사용했을 때 클레어가 그 흐름을 눈치챈 것이었지만 이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마력 스캔은 신체 접촉이 있어야만 하니 본인이 모를 수가 없고….’
전직 마탑주의 수제자가 보일 만한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뜨끔한 나는 변명처럼 말을 더했다.
“어, 사실 제가 아는 마법사가 마탑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엄청난 실력자시거든요. 다만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그렇습니까.”
리셀은 조금 전 내 말일랑 근거가 없더라도 다 믿을 듯이 굴더니, 인제 보니 입바른 소리였나보다.
“네, 그으래서… 평소에 마법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시는 아티팩트로 확인해 보시고 제가 말씀해주셨었어요.”
그는 내 얘기에 어느 정도 납득한 듯 조금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탑주님 같은 분인가 보군요. 그분의 취미도 마력에 재능있는 이들을 찾아다니시는 거였습니다. 비록 눈이 높으셔서 어지간한 이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셨지만요.”
‘그럼 당신은 그런 눈높은 마탑주의 수제자로 발탁될 만큼 재능있는 사람이었다는 거잖아.’
나는 안타까움에 속으로만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띤 얼굴로 제안했다.
“아무튼 클레어 네가 생각이 있다면 내가 따로 마법사를 초빙해보도록 할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클레어에게 정말 소질이 있다면 제가 직접 가르치면 될 일입니다.”
아, 그러네. 전직이라지만 마탑주의 수제자였으니.
실상 흑마법 실험에 의해 마력만 사라졌다 뿐, 지식적인 면은 온전히 남아있을 터였다.
“그러면 되겠네요. 그 마법사가 말하길, 클레어가 아주 작은 마법을 사용했는데도 그걸 눈치챘다고 말했었거든요. 마력에 굉장히 민감한 것 같다고. 참고가 됐으면 좋겠네요.”
“마력에 민감하다라… 직접 마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아티팩트 제작 쪽으로 나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군요. 아무래도 섬세한 컨트롤을 요하는 작업이니….”
그렇게 클레어 본인을 옆에 두고 그녀의 진로에 관해 토론하던 우리는 다시금 거취 문제에 대해 몇 마디를 나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야기를 나누다간 끝이 없을 것 같기도 했고, 몇 년 만의 해후를 기뻐할 시간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