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공녀님께서 손수 제 기사를 이끌고 전 실험장에 나타났다는 것만 해도 흥미롭기 그지없었거늘, 이건 더욱 그의 구미를 당기는 사항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신성이라, 혹시….
‘성녀인가.’
그녀가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라면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성녀, 혹은 신수 이외의 한낱 인간 나부랭이가 신성력을 몸에 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거기까지 추측하던 일레이는 돌연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하, 하하!!”
혼자 배를 잡고 낄낄거리는 일레이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먼드가 자리를 떴음에도 그의 웃음은 끊기지 않았다.
“하하, 아하하, 아… 웃겨.”
아비는 흑마법에 의지해 시체와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마당에 그 딸은 신의 사자라 불리는 성녀라는 말이 아닌가.
“진짜 재밌잖아….”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과연 공녀가 정말 성녀인지, 아니면 단순히 성물을 몸에 지닌 인간일 뿐인지는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일레이는 확신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건 분명 성물의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레이먼드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궁금하니 조금만 알아볼까.’
제가 공녀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면 길길이 날뛸 인간들이 많겠지만, 그를 벌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황제뿐이었다.
그러니 선을 넘지 않는 내에서 움직이면 될 것이다.
*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어제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그래도 사귀기로 하고 처음 마주한 거였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돌려보냈네.’
아니다. 실속있는 일을 하긴 했지.
무려 흑마법사를 실제로 마주하고 그들이 황제와 얽혀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냈으니.
다만 그 사실에 정신이 팔려 정작 아르반과 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음을 그가 돌아간 뒤에야 깨달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여간 아르반도 참 대단해, 진짜.’
그런 충격적인 내밀과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걱정하고 위하는 아르반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엘리, 당신은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준비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세요.”
그리 말하는데 어찌나 든든해 보이던지, 거의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온실 지하에서 흑마법사와 조우함에 따라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바람에 속히 식사를 마친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몬의 수업까지 봐준 후 대공저로 돌아갔다.
잘 돌아갔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한창 율렌과 흑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수업을 곧 마치리라는 사실도 잊고 있었으니까.
어제는 그만큼 정신이 없고 심란했다.
나, 아르반, 율렌, 셋의 세력과 힘을 죄다 긁어모으더라도 현재로서는 황제와 게임이 되지 않는다.
다만 작은 위안이 된 건 금술이란 것의 제약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정도였다.
‘하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면 벌써 온 대륙을 점령했겠지.’
미약한 한숨을 내쉰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래도 전처럼 막연하지 않고 해결 방안이 생겼다는 데 위안을 삼기로 했다.
일단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차치하고 나니 그제야 아르반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했으면 뭐하랴, 정작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일을 불려주기만 하는 격이랄까.
‘으, 생각하니까 진짜 미안하네.’
“그래, 다음번에는 같이 외출이라도….”
혼자 다짐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에 즉각 입을 다문 나는 밖에서는 내 혼잣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클레어입니다.”
“…클레어? 들어와.”
당연히 쌍둥이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실례는 무슨, 이쪽으로 앉아.”
생각지 못한 손님이긴 하나 나는 반색하며 그녀를 반겼다.
‘그때 생각해보겠다고 했던 것에 답을 하러 왔구나.’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굳이 시간을 내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클레어는 결심을 굳힌 얼굴로 곧장 입을 열었다.
“저, 오빠를 만나보려고요.”
의사를 밝힘에 있어 머뭇거림이 없는 것을 보아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한 게 분명했다.
나는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써 점잖게 답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나는 잠시 클레어를 바라봤다.
눈을 가리고 있는 천.
하얗게 센 머리카락.
비록 당장은 무리지만 율렌이 힘을 되찾는 데까지 몇 달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었다.
‘그럼 적어도 반년이면 아르반이 황제를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겠지.’
솔직히 황제를 끌어내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불가능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율렌의 존재가 만천하에 공개될 테니 클레어의 눈을 치료해주는 데 있어서 더는 거리낄 게 없겠지.
나는 다시 한번 클레어에게 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이 얘기를 꺼냈을 때 클레어는 내 말을 믿지 못했다.
하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다 보니 내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주는 상황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사실 클레어의 경우가 더 정상적인 반응일 텐데.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납득시킬만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으니 정말 회복시켜 줄 수 있을 때 다시 언급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나는 다시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 만나보는 건 어떠니.”
내 제안에 클레어는 조금 멈칫하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심했으니 더 시간 끌어 좋을 게 없겠죠.”
“좋아. 그럼 내가 리셀에게 먼저 얘기를 꺼내고 네게 전달해줄게.”
아무래도 예고 없이 동생과 마주하게 된다면 리셀이 얼마나 놀라겠는가.
무려 2년 만의 재회일 텐데.
‘더구나 클레어가 예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기도 하니… 미리 말해두는 게 좋겠지.’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 응, 그래. 있다 보자.”
“예, 아가씨.”
용건을 마치고 칼같이 자리를 뜨는 클레어에 조금 당황했다. 그러다 뒤늦게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는 황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리셀이 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방문할 시간이었다.
“…젠장, 클레어!”
나는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헐레벌떡 문을 박차고 나가 그녀가 향했을 방향으로 뛰는데, 제발 마주하지 않길 바랐던 노란 눈동자와 시선이 교차했다.
‘아아, 진짜 미치겠네.’
…우려했던 일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얼마 뛰지는 않았지만 워낙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일까, 유독 숨이 차는 듯했다.
복도는 뜻밖의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때, 리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공녀님. 어, 어째서 클레어가, 왜, 공녀님께서….”
그의 두서없고 참담한 목소리는 삽시간에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과거의 리엘리에게 동생에 수색을 부탁하면서도 이렇게 음성이 떨리지 않았던 리셀이었기에.
지금 그가 받았을 충격을 헤아릴 수가 없어,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아니, 그 전에 그가 물어본 건 정확히 무엇이지?
어째서 클레어의 머리가 하얗게 세었냐고?
눈은 어떻게 된 거냐고?
그도 아니라면… 왜 클레어가 이 저택에 시녀로 일하고 있었냐고?
어쩌면 전부 다일지도 모르겠다.
걸리는 바가 너무 많았던지라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데, 뜻밖에도 클레어가 나와 리셀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다 내 잘못이야.”
“…클레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워낙 조용했기에 우리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기에는 충분했다.
리셀은 크게 뜬 눈으로 클레어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듯해 입을 열었다.
“…설명해 줄게요. 일단 장소부터 옮겨요.”
다른 누군가가 들을 수도 있는 복도에서 떠들기에는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이야기였다.
*
리셀은 내 예상보다 훨씬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던진 제안에 즉각 정차 없이 흔들리던 눈동자의 초점이 돌아오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왔다.
혹시나 흥분한 리셀이 윽박지르며 대체 클레어가 왜 이렇게 된 거냐 따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제 옆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클레어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내 뒤를 따랐다.
마치 그렇게 잡고 있지 않으면 그녀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나는 리셀과 클레어를 이끌고 내 방으로 향하려다 율렌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빠르게 개인 응접실로 장소를 바꿨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리셀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에 본능적으로 리셀과 시선을 마주한 나는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3년 전 있었던 사건에 대해.
당시 리엘리의 심리 상태는 배제한 채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그의 부탁으로 클레어를 찾고, 그녀를 공작저에 머물도록 했다는 것을.
클레어가 리엘리에게 먼저 이곳에 머물게 해달라 요청했단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리셀이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그 사실을 털어놓기는 너무 변명 같이 느껴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클레어 본인이 얘기하는 편이 나으리라 여겨져.’
기껏 용기 내어 오빠를 만나보겠다고 했는데, 혹여라도 더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당장 얘기를 꺼내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리셀의 과열된 머리가 식고, 보다 냉정해졌을 때 클레어가 직접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그의 원망을 내가 받아들이라고 마음먹었다.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리셀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눌러 참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조심스레 리셀의 안색을 살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그럼 클레어가 이렇게 된 게 다 로베르 공작과 관련된 일 때문이라는 겁니까.”
“네. 맞아요.”
“공녀님께서는… 지금까지 클레어를 저택에 두시고 모른 척하시며 저를 우롱하신 겁니까.”
그는 고개 숙인 채 제 손등만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