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17화 (117/153)

117화

*

리엘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지하로 연결된 분수의 통로를 닫아버리고는 크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어쩐지 탈력감이 느껴져 그대로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투명한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허공을 바라보는 사이, 아르반은 리엘리의 품에 안긴 율렌에게 이야기하도록 재촉했다.

“이제 말할 수 있겠지.”

율렌은 그런 아르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응. 저 아래 자리한 기운은 금술로 인해 발생한 거야. 일단 금술이 왜 금술이라 불리는지 알아야겠지.”

녀석이 설명을 시작하려는 듯하자 리엘리 역시 귀를 기울였다.

흑마법도 금지됐다 표현하지 않는 마당에 따로 금지된 술법이 존재한다니, 대체 어떤 것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금술이란… 인간의 영혼을 재료로써 소모해 사용하는 거야. 그렇기에 금지된 술법이라 불리는 거고.”

“영혼이라고?”

리엘리가 무심결에 되묻자 율렌은 힘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영혼이 녹아든 그 역겨운 금술의 기운이 묻어 있었어. 그 흑마법사에게.”

영혼을 재료로 사용한다니 무슨….

그녀가 놀라 입만 벙긋거리는데 율렌이 아르반을 향해 말했다.

“아까 주인이 느꼈던 기운이 그거야. 사특하지? 역겹고.”

“역겹다라… 그 표현이 딱 들어맞는군.”

“그래, 성검의 주인이 아닌 이상 평범한 인간들은 느낄 수 없는 기운이야.”

여기 예외가 하나 있긴 하지만.

녀석은 리엘리를 힐끔 올려다보며 작게 덧붙였다.

“여신께서 금하신 힘이야. 다른 모든 건 차치하시지만 영혼을 소멸시키는 행위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어.”

“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여신의 권능에 미치지 않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지.”

“구체적으로는?”

“시간 축을 틀어버린다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정도만이 불가능하고, 소모되는 영혼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급만 원활하다면 상상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어.”

“제국을 소멸시키는 게 가능할 정도인가.”

“제국… 아니. 그건 시전자가 버텨내지 못할 거야. 다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가만히 듣고 있던 리엘리는 작게 헛웃음 지었다.

솔직히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흑마법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보다 더한 힘이 존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소모되는 게 사람의 영혼이라니.

“혹시나 만약에라도 내가 힘을 되찾기 전에 움직일 생각일랑 말아.”

“…….”

율렌의 충고에 아르반은 침묵했다.

그 반응에 노파심이 들었는지, 율렌은 곧장 사설을 덧붙였다.

“주인이 강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저쪽을 얕보면 안 돼. 일개 인간이 금술을 사용하는 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서 함부로 힘을 쓰지는 않겠지만 작정하면 아무리 주인이라도 위험해.”

율렌의 입에서 저런 경고가 튀어나올 줄이야.

‘진짜 위험한 모양인데….’

리엘리는 걱정스레 아르반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느낀 아르반이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살짝 웃어 보였다.

“함부로 움직일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리엘리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율렌이 아르반에게 이어 말했다.

“몇 달만 있으면 나도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때까지만 기다렸다 놈을 죽이고 황좌를 넘겨받으면 돼.”

아, 그리고 보니 아르반은 황위 계승이니 뭐니 그런 얘기 전혀 모를 텐데….

리엘리는 제가 혼자 율렌을 달래기 위해 떠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난감함에 어떡하나 걱정하던 리엘리는 곧바로 이어지는 아르반의 대답에 놀라 작게 입을 벌렸다.

“그렇지 않아도 현 황제를 끌어내릴 방법을 모색하던 참이다. 나 역시 몇 달 내에 그자를 끌어내릴 참이었으니 잘됐군.”

예상 밖의 변수가 걸림돌이 될 뻔했어.

아르반은 작게 혀를 찼다.

자만에 빠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가 가진 무력을 맹신하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녀석이 내게 쓸데없는 충고를 해올 리 없으니 귀 기울여 듣는 편이 옳겠지.’

리엘리는 율렌과 자신이 나눈 대화를 아르반이 모를 것이라 여겼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율렌에게 온전한 힘을 되찾아 자신을 황제의 자리로 올려주란 소리를 했다는 걸.

율렌이 공작저로 떠나기 전, 이미 자신에게 모든 걸 떠들어댔다.

그때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르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렇든 저렇든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반역의 때를 볼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더 늘었을 뿐이다.

“근데 아까 그 흑마법사는 왜 다시 이곳에 나타났던 걸까요.”

아르반은 리엘리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꺼낸 이야기에 그녀를 바라봤다.

“그 사람, 분명 이전의 리엘리, 어… 편의상 리리라고 부를게요. 그러니까 리리랑 마주쳤었거든요. 3년 전에 이곳에서. 그때 공작의 명령으로 모두 철수했을 텐데….”

“잡아들이지 않는 한 알지 못하겠지.”

율렌의 대답에 리엘리는 탄식처럼 대꾸했다.

“그러니까!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저렇게 미리 도망갈 준비까지 다 해두고 있었는지 신경 쓰여 미치겠네, 진짜….”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리엘리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한탄할 따름이었다.

*

한편. 로베르 공작의 보좌관, 레이먼드 펄슨은 심드렁히 서서 제 앞에 펼쳐진 인형 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야 신기했지, 이 짓도 지겹군.’

차라리 서류 처리를 하는 편이 더 건설적 일터였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로베르 공작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은 아름다운 여자, 세리나 로베르를 보고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생전 모습과 다를 게 없어.’

단 하나,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을 제외한다면.

다른 부분은 어찌어찌 그럴듯하게 복구를 했다지만 이미 문드러진 눈만큼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다른 이의 것을 가져다 박는 수밖에.

‘그냥저냥 만족하면 될 것을, 그렇게 완벽히 생전의 모습을 재현하고 싶다면 공녀의 눈을 가져다 쓰면 될 것 아냐.’

그런데 뭐라고 했더라?

세리나가 되살아났을 때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온전히 보전돼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는 몰래 코웃음 쳤다.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다.

공작은 그저 세리나 로베르를 쏙 빼닮은 유일한 대용품인 리엘리 로베르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없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이제 ‘세리나’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좀 달라지려나.’

그는 경멸 어린 눈으로 세리나 로베르를 바라봤다.

저것을 움직이고 있는 일레이가 역겨운 한편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시체를 뒤집어쓰고 저리 생글생글 웃을 수 있다는 게.

최근 세리나가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공작은 리엘리 로베르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세리나에게 정신이 팔려 그쪽을 신경 쓸 정신머리가 없는 것일 테지.

‘그건 이쪽에서 의도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일순, 세리나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

“세리나!!”

순식간에 실이 잘린 마리오네트처럼 쓰러지는 세리나의 몸을 본능적으로 잡아챈 레이먼드는 자신을 밀치고 세리나를 채가는 공작에게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아아… 젠장.”

작게 혀를 차던 레이먼드는 이곳에서 들려선 안 되는 이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별안간 균열이 생기더니 그 사이에서 금발의 흑마법사, 일레이가 튀어나와 그대로 널브러졌다.

일레이는 몇 마디 더 욕설을 지껄이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레이먼드는 갑작스레 등장한 일레이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꼴을 보아하니 제 의지로 이동한 건 아닌 듯했다.

그는 세리나에게 정신이 팔린 로베르 공작을 곁눈질로 살피고는 일레이에게 눈짓했다.

‘밖으로.’

그 의사를 눈치챈 일레이는 머리를 헝클이며 제 옆을 굴러다니는 또 다른 금발의 청년을 발로 툭, 건드렸다.

세리나의 몸에 빙의하지 않을 때 일레이가 사용하는 몸이었다.

동공이 풀려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흡사 시체를 연상케 했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육체였다.

‘…멀쩡히라 말하기는 무리가 있나.’

피식, 실소를 터트린 일레이는 금발 청년의 눈을 손수 감겨주었다.

제 육체를 다시 가수면 상태로 돌리고 계속 이 몸에 신세를 져야 하니 눈동자가 말라 시력에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모처럼 마음에 든 몸인데, 망가지면 안 되지.’

그는 레이먼드의 뒤를 따라 옆방으로 이동했다.

“어떻게 된 거야.”

대뜸 취조하듯 제게 질문하는 레이먼드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전 상황을 회상했다.

분명 아무도 발 들이지 않고 안전하다 여겨 제 육체를 잠재워둔 곳에 상상도 못 한 깜짝 손님이 방문했다.

‘아르반 카넬로웰 대공, 그리고 리엘리 로베르 공녀라.’

아르반 카넬로웰이 로베르 공녀에게 청혼받았다는 소문은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저와 아무 상관 없다 생각했다.

‘그 리엘리 로베르가 대공을 끌고 그곳을 찾을 줄은….’

더구나 잠깐 마주친 눈빛은 3년 전 그가 보았던 심약한 소녀와 동일 인물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총명히 빛났다.

‘공작이 길길이 날뛸 만도 했군.’

리리가 이상해졌다며 정신 사납게 굴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변하면 얼마나 변했을까 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잖은가.

‘재밌네.’

슬슬 인형 놀이에 싫증이 나던 차였다.

일레이의 눈동자가 보다 짙어졌다.

어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일이 재밌어지리란 확신이 들었다.

“일레이.”

레이먼드의 부름에 눈동자를 굴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일레이가 히죽였다.

그 미소를 마주한 레이먼드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놈이 저리 웃으면 재수가 없었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는 무슨, 아무것도 아냐.”

“똑바로 대답해. 무슨 일이길래 안전한 곳에 모셔져 있을 네 본체를 여기까지 이동시킨 건지.”

레이먼드는 의심스러운 낯을 한 채 미간을 좁혔다.

흑마법에 손을 대고 황제에게 충성한 이유조차 제 육체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 지껄이고 다닐 만큼 무엇보다 제 몸을 아끼는 게 바로 일레이다.

‘그런 놈이 고이고이 모셔둔 본체를 이동시켜 왔을 정도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데….’

꼴을 보아하니 입을 열 생각이 없군.

레이먼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피곤하게 구는 건 매한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일레이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소파에 몸을 누였다.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그냥 쥐새끼 두어 마리가 기어들어 와서 혹시 몰라 설치해둔 이동마법이 강제 발동했을 뿐이라고.”

“너… 하. 그래. 혹여라도 이쪽에 피해가 오지 않도록 조심해.”

“아아.”

일레이는 건성으로 답하며 조금 전 리엘리 공녀에서 느껴지던 신성한 기운을 떠올렸다.

대신관이라는 자들과도 대면한 적이 있었지만 그처럼 강렬한 신성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오히려 성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던 것과 흡사하지만 결정적인 뭔가가 달랐다.

‘그게 뭘까.’

확신할 순 없지만 일레이가 느끼기에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무언가에 깃들어 있는 신성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