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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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마침내 굳은 결심을 다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일단 말이나 꺼내 보자.’
눈을 바로 고쳐주지 못하는 건 정말 안타깝지만, 이후로 미뤄두고.
내 욕심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냉정해지자. 차분하게, 클레어를 불러서….’
잠시간 내가 찾아갈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몬을 처음 찾아갔을 당시가 떠올랐다.
놀라 댕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아몬이 참 귀여웠… 흠, 이게 아니라 놀라게 하면 안 되니까.
나는 클레어를 호출하기 위해 에바를 부르려 했다.
“저, 아가씨.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에바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응, 들어와.”
무슨 일이지. 에바가 원래 저리 소극적인 성격이 아닌지라 의아해졌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힐끔힐끔 문밖을 쳐다보던 에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실은… 아까부터 아가씨 방문 옆에 클레어가 서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조금 있다 지나갈 때 보니까 계속 그 자리에 있길래 이상해서요.”
우물쭈물하던 에바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계속 벽을 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데, 혹시 클레어가 뭔가 실수라도 해서 벌을 받는 건가요…?”
그럴 리가.
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대답하며 표정을 굳혔다.
힐끗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 클레어가 오는 시간인데 내가 시계를 잘못 보고 여태 방 안에 있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시계는 당연하게도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도 밖에 서 있니?”
“네. 흐음, 아가씨가 명하신 게 아니라면 왜 저러는 걸까요….”
에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사교성이 좋은 편이었다.
클레어가 에바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튜나 쌍둥이와 클레어가 동갑이라는 점에서 에바가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더라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에바, 혹시 클레어랑 친하게 지내니?”
“어… 친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데, 그냥 지나가다 보이면 안부 정도는 물어봐요.”
에바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클레어가 워낙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아서 마주친 적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요. 가끔 아가씨 방을 오가다가 마주하는 게 전부예요.”
“그래… 알겠어. 일단 클레어를 계속 새워둘 수는 없으니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 좀 전해줄래? 그리고 같이 들 차도 준비 부탁할게.”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내 방 앞에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
발소리도 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선 클레어는 언제나처럼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방 중앙에 서서 제 두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클레어를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앉을래?”
아무래도 클레어 또한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하니, 이야기가 짧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런 내 목소리를 듣고 몸을 한 번 떨 뿐, 발을 떼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기다리던 나는 몸을 일으켜 클레어가 서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분명 바닥에는 폭신한 융단이 깔려있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을 텐데, 클레어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내가 걸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며 말문을 열었다.
“제, 가 가서 앉겠습니다.”
“…그래.”
내심 자리를 잘 찾아 앉을 수 있을까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클레어는 내가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소파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에바가 차를 준비해 들어왔다.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절대 먼저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클레어가 입을 열어왔다.
“…아가씨. 물론 그럴 리 없고 단순히 제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사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오… 빠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나름 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하려 했던 듯하지만 입에서 오빠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부터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그걸 본인도 느꼈는지 클레어는 더 질문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나는 그녀가 어떤 것을 묻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어쩌다 마주하게 된 걸까.
아니,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그를 직접 마주했을 리는 없다.
만약 두 사람이 마주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리셀 역시 내 방문을 두드렸을 테지.
그럼 어쩌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 걸까.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꼬여버렸다.
본래 그가 저택에 있다는 얘기는 내가 먼저, 클레어가 놀라지 않게 꺼낼 생각이었는데….
“미안해, 클레어.”
우선 사과하는 게 좋겠지.
어찌 된 영문이든 클레어는 리셀과 마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택했고, 리엘리는 그녀의 의지를 받아드려 리셀이 사실 여부를 모르도록 도왔다.
비록 나로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배신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상황이었다.
‘공작저 내에 리셀을 데려다 놓고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건….’
나는 입술 새로 한숨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왜, 왜 사과하세요, 아가씨….”
내 사과에 클레어는 조금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리셀에게 네가 이곳에 있단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 약속해 놓고 그를 공작저에 데려왔으니까. 정말 미안해.”
내가 진중하게 다시 한번 사과하자 클레어의 손끝이 벌벌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생생히 보일 정도가 됐다.
나는 그런 그녀를 조금이나마 안심시키고자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리셀은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모르고 있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내가 독단으로 그에게 말할 생각도 없고.”
“…….”
내 설명에 클레어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 작게 물었다.
“…정말인가요? 오빠는 제가 여기 있다는 거, 모르는 게 확실해요?”
“당연하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사실 그를 데려온 것도 고의는 아니었어. 우연히 그가 그린 그림을 보게 됐는데-.”
나는 놀란 클레어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게 찬찬히 정황을 설명했다.
내 얘기가 이어질수록 클레어의 꽉 쥐어졌던 양손에 조금씩 힘이 풀려갔다.
“셀리안, 그 이름을 오빠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리셀 세르딘이 아니라, 화가 셀리안으로서 방문했던 거군요.”
클레어는 한층 차분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나는 처음보다 많이 진정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는 슬쩍 운을 띄웠다.
“리셀은 아직도 널 애타게 찾고 있어.”
“…오빠는 잘 지내나요.”
“글쎄, 잘 지낸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아.”
나는 그의 초췌한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잘 먹고 잘사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긴 했다.
“잃어버린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어.”
그 가족의 생사 여부를 은폐해주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나였으니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지만.
“클레어,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리셀에게 네 생사 정도는 알려도 되지 않을까 해.”
“…제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오빠는 절 찾아올 거예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네가 죽었든 살았든 그는 어떻게든 널 찾아낼 생각으로 보였거든.”
“저는… 더 이상 오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비탄에 차 중얼거리는 클레어의 말에 문득 울컥함을 느꼈다.
짐이라니, 여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클레어, 가족을 짐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어.”
가족이라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뜻한 바는 아니었으나 단호한 어조가 튀어 나갔다.
하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까.
만약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반신불수가 되고,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나는 절대 내 사람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설령 나 혼자만의 욕심일지라도.
“…아마 오빠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가씨처럼.”
클레어는 옅은 웃음 띤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그래도 오빠가 나 같은 건 놔버리고, 마법사로서 이름을 떨치면서… 사교계에서도 흠 잡힐 일 없이 살았으면 해요. 제가 오빠의 걸림돌이 되길 원하지 않아요.”
나는 가만히 클레어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심 놀라 눈썹을 추켜 올렸다.
아까 리셀이 말했던 그 재능이라는 게, 마법을 의미하던 것이었구나.
“이 김에 저 같은 건 잊어버리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저는 이복동생일 뿐이니까, 오빠가 더는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클레어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은 낯으로 덧붙였다.
“그런데 아직도 저 같은 걸 찾고 있나 보네요.”
“당연하잖아. 사랑하는 가족이 그렇게 사라지고 소식이 없는데,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애써 심기 불편한 티가 나지 않게 노력하며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리엘리, 정말 그때 이후로 클레어에게 단 한 번도 리셀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구나.
어찌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타인에 대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쓸 만큼 멀쩡한 정신 상태도 아니었을 테고.
그럼에도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안타까움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클레어, 여태 말하지는 않았지만, 리셀은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널 포기한 적이 없어.”
아까 일순이지만 그가 클레어를 포기한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리셀은 클레어를 찾는 것을 포기한 게 아니다. 절대로.
“그러니까, 그를 만나보지 않을래?”
“…….”
나는 말이 없는 클레어의 모습에 서둘러 덧붙여 해명했다.
“강요는 아냐. 네가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해도 억지로 마주하게 할 생각은 없어. 다만, 네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줘.”
클레어는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왜 지금에서야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건가요,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