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뜨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에 과하게 몰입해봐야 무엇 하나 득 될 것이 없다.
다만 3년 전 벌어졌던 일들을 제외하더라도 나 또한 당신에게 사과해야만 하는 문제가 한가지 존재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당신에게 숨기고 있으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그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고 싶었다.
네 동생이 지금 이곳에 있다고.
내가 돌보고, 아니, 돌봤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저 이곳에 머물도록 했을 뿐, 리엘리는 죄책감에 잠겨 클레어와 마주하지도 못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의 여파로 하얗게 새어버린 클레어의 머리카락 끝자락만 시야에 걸려도 곧장 뒤돌아 눈을 감아버릴 만큼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쥐어짠 리엘리의 용기는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치명적인 맹독을 삼킨 격이 되었다.
‘사실 리엘리보다 마음이 쓰이는 건 당신이지만.’
리엘리 로베르가 가엽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이미 이곳에 존재치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남자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가족을 떠나보냈는지, 단순히 실종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어딘가에 살아있단 한 줌의 믿음으로 제 동생을 찾고 있는 남자.
나는 리셀이 내 손을 본래 위치로 돌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클레어를 먼저 설득하고 그 뒤에 꼭 당신에게 말해줄게.’
당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동생이 살아있노라고.
“공녀님께서 저를 어떤 마음으로 도우셨든지 간에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비록 공녀님께는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제게는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었으니까요.”
그는 다시 이젤 앞으로 가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런 그림 몇 장으로 대가를 치를 수는 없습니다.”
리셀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사실 카넬로웰 대공께도 신세를 졌기에 어떻게든 보답을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제게 남은 재주라고는 이 정도가 전부인지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빚은 꼭 갚을 겁니다.”
나는 이채 띤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사람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 같은데….
참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자발적 빚쟁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대공 각하께는 죄송하게도 공녀님께 더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이름을 걸고 충성하겠다 맹세하는데 그걸 두 사람에게 한다는 건 주군을 두 명 모시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당신도 정말 피곤한 삶을 사는구나.’
아르반도 나도 누구 하나 그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았음에도 저리 혼자 빚지고는 못산다며 노력하는 것을 보면.
*
나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다 방으로 돌아왔다.
클레어, 클레어를 불러다 얘기를 나눠야 하는데….
‘막상 부르려니까 뭐라고 설득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클레어가 리엘리의 시녀로 이곳에 남은 것 자체가 사실 그녀의 의지였으니까.
하얗게 세고 눈도 보이지 않게 된 자신이 오빠에게 짐일 뿐이라며 절망하는 클레어를 보고, 리엘리는 그녀를 제 시녀의 위치에 두었다.
사실 리엘리로서는 이러나저러나 죄책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클레어와 리셀이 겪어야 했던 모든 비극은 오직 세리나의 부활을 위한 실험 탓이었고, 그 실험을 주도한 이는 로베르 공작이었으니.
제 아버지가 벌인 만행과 업보는 그녀에게 있어 감당할 수 없이 벅찬 것이었다.
그러니 저런 몰골이 된 클레어를 리셀에게 억지로 돌려보내는 것도, 클레어를 애타게 찾고 있을 리셀에게서 그녀를 숨겨주는 것도,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리엘리를 숨 막히게 했다.
그렇기에 리엘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클레어의 의지를 지지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으나, 당장 제 앞에서 좌절하는 소녀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왔으므로.
또 실질적으로 리셀보다는 클레어가 더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불러다 뭐라 말하는 게 좋을까.’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설득하는 일은 젬병인데.
‘네 오빠는 네 머리가 하얗든 파랗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눈도….’
“그래, 눈!”
내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치자 율렌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눈은 갑자기 왜.”
“율렌 너, 전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멀쩡하게 고쳐줄 수 있다고 했잖아. 혹시 적출된 안구도 원래대로 고쳐줄 수 있어?”
“어렵지 않지.”
나는 율렌의 심드렁한 대답에 눈을 반짝였다.
그럼 클레어는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
‘아, 근데 이거 당장 부탁하면 안… 되겠지.’
율렌의 존재를 비밀에 부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르반이 성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지금 내가 갑자기 클레어의 눈을 회복시켜 준다면 다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신관이라 할지라도 이미 잘려나간 신체 부위를 재생시키는 건 예삿일이 아닐뿐더러, 실상 가능한 이도 몇 없었다.
‘차자리 신전에 가서 부탁하는 건….’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런 이들이 황족도, 귀족도 아닌 준 귀족의 가족에 불과한 어린 소녀에게 손길을 베푼다는 건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내민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건 나로서도 걸리는 바가 많았다.
여태 가만히 있다 3년이나 지난 현재에 이르러 갑자기 시녀 애 하나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참 수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만약 신전 측에서 뭔가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기라도 하면 곤란하기도 하고.
인간은 흑마법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다고 하나 성물이라면 또 경우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신전과 엮이는 건 여러모로 신중한 편이 좋았다.
‘…골치 아프네.’
가장 쉽고 빠른 길을 앞에 두고 돌아가야 하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내가 난감해지는 일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지만, 이 이상 아르반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흑마법사들의 소탕을 부탁한 데다가 덤을 얹어줄 수는 없으니….
“하아….”
당장 낫게 해줄 수 있음에도 이리 망설여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클레어를 불러다 털어놓을까 싶기도 했다.
율렌의 존재를 말하고, 네 눈을 고쳐줄 수 있으니 너무 염려치 말고 리셀과 만나보라고.
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아냐, 너무 이쪽 생각만 하면 안 돼. 아르반이 곤란해질 걸 생각하자.’
율렌의 마력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았는데 드래곤이나 성검의 존재자 황실 측에 전달된다면 단순히 곤란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적어도 율렌이 힘을 되찾고, 아르반이 그의 의지로 성검을 세상에 공표하겠다 말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기밀로 남겨두어야 한다.
나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팔자 좋게 늘어져 있던 율렌이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러고 있을 시간에 마법 연습이라도 좀 해봐라.”
녀석의 핀잔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율렌이 뭘 그런 눈으로 보냐는 듯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마력이 아깝다! 너 지금 네 몸 안에 늘어나는 마력이 남들은 얼마나 가지고 싶어서 안달하는지 알기는 해?”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기운이 쭉 빠져 소리 지를 힘도 없어 중얼거렸다.
율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소파에 늘어져 버린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력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데 조절이 그리 형편없어서야 어디 써먹기나 하겠어?”
그러게 말이다.
안 그래도 지난번 율렌이 내 몸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마력에 대해 언급한 이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녀석과 마법에 관해 공부하고 연습을 하고 있긴 했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내 몸에 쌓이기 시작한 마력은 한 번 자리를 잡은 이후 무서운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고 한다.
영혼이 삼킨 넘쳐나는 마력과 마력을 흡수하는 데 특화된 육체의 시너지 효과랄까.
틈이 날 때마다 날 붙잡고 마력 스캔을 해대며 어찌나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여대는지….
그러다 자기는 왜 이렇게 회복이 더딘지 모르겠다고 발작하긴 하지만, 아무튼 내 가장 큰 문제는 마력‘만’ 너무 넘쳐난다는 것에 있었다.
대체로 마력을 타고난 아이들은 애초에 선별을 통해 조기 교육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성장하며 방대한 마력을 지니게 되더라도 미리 컨트롤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둔다는 것이다.
“너 그러다 다른 마법은 못 쓰고 폭발만 일으키고 다녀도 난 모른다. 어디 가서 나한테 마법 배웠다고 입도 뻥긋하지 말고.”
“…….”
그래, 문제는 이 마력을 제어할 수 없는 내게 있었다.
마치 방금 이론 시험을 통과한 사람을 레이싱카에 앉혀 놓고 25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라 하는 것과 같달까.
이제 막 조작법을 배웠을 뿐인 왕초보에게 그런 속도로, 하물며 유지하며 달리라니 가당키나 하겠냔 말이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근데 그게 마법이라고.’
한 마디로 내가 제대로 된 마법을 성공시키려면 그 정도의 컨트롤 실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마력을 끌어다가 폭발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게 어딘가 했다.
‘그래도 해내긴 해낸 거니까.’
나는 처음 내가 마법을 발현했을 당시를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최소한의 마력만을 가져다가 불을 만들어내려 했을 뿐이었는데, 무슨 폭탄이라도 터진 줄 알았다.
다행히 내 방의 층고가 높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그때 진짜 간담이 서늘했다.’
때아닌 굉음에 놀란 사용인들이 죄다 내 방으로 몰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며 기사들을 불러오겠다 난리를 치는데 말리느라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더랬다.
그래서 결국 지금 내가 연습하고 있는 건 최대한 적은 마력으로 최대한 작은 폭발(불꽃)을 만들어내는 마법이었다.
목표는 비눗방울이 터지는 정도의 강도.
처음의 실수가 워낙 치명적이다 못해 충격적이었던 탓에 두 번째 시도에서는 다행히도 현저히 강도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그때는 방이 아닌 정원의 구석에서 몰래 사용했지만… 슬프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진짜… 내가 마법을 못 쓰는 건 당연한 거라고. 너무한 거 아냐?’
그리 생각하면서도 괜히 머쓱해져서 율렌을 등지고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오늘 내게 주어진 과제는 클레어를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지에 대한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