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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12화 (112/153)

112화

*

아르반은 공작저를 나와 저택으로 향하는 도중 상념에 잠겼다.

여태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과 신뢰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 여겨왔다.

그가 유모와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린 날에도 제게 속삭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었어.’

그녀가 제게 담담한 목소리로 털어놓던 그 신빙성 없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버린 것을 보면.

미약한 실소를 터트린 아르반은 아까 리엘리가 제게 했던 이야기를 돌이키다 중요한 사항을 다시 되뇌었다.

‘부탁받은 바도 있고 하니 서둘러야겠군.’

한시라도 빨리 세력을 모아 현 황제를 끌어내리는 계획을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자금력 문제는 에시트 산맥의 마정석 광산만 활성화된다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으니 그쪽에 총력을 기울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여태 연락을 무시해 왔던 세력가들에게 답신을 보내야겠지.

그녀가 신경 쓸만한 일은 빠른 시일 내에 전부 치워버리고 가능하면 좋은 경험만을 채워줘야 했다.

‘그래야 고향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지.’

그의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았다.

만에 하나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 해도 제가 그녀를 잡는다면 순순히 붙잡혀 줄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원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

나는 아르반이 돌아간 후 율렌을 붙잡고 한참이나 침대를 굴러다녔다.

흑마법사 무리에 대한 것은 당장 어찌할 것이 아니기에 일단 둘째치고, 클레어와 리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감정 소모가 컸던 탓일까, 고민하는 와중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곧장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바로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아직 리셀과의 클레어에 관한 일을 어찌할지 정한 바가 없었다.

하지만 잘 차려입고 곧은 자세로 앉은 나와 그런 날 앞에 두고 묵묵히 작업을 시작한 리셀 사이에는 침묵만이 쏟아졌기에 내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차고도 넘쳤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리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깨끗하고 하얀 손등과 달리 찢긴 상처가 아물어 울퉁불퉁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손끝. 죄다 갈리고 빠졌다 다시 자라 짧고 뭉툭한 손톱.

분명 3년 전 리셀을 발견했을 당시 갖고 있던 상처가 흉터로 남은 것일 터였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 쌓여 있던 시체들도 죄다 손이 성치 못했어.’

나는 그 당시를 보다 뚜렷하게 기억해내고자 집중했다.

그래, 확실하다. 그곳에 있던 시체들 모두 손이 엉망진창이었다.

더불어 입술 역시 성한 이가 없었지.

나는 리셀의 입술을 바라봤다.

아랫입술에 아주 희미하지만, 사선으로 찢어졌다 붙은 흔적이 있다.

리엘리와 마주했을 당시에 보았던 상처.

‘누가 봐도 스스로 물어뜯은 상흔이야.’

손끝 또한 마찬가지.

스스로 손을 갈아버리고 입술이 반쯤 잘리기 직전까지 물어뜯을 만한 일이 무엇일까.

내 비루한 상상력으로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고통을 참기 위해.’

그렇다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리셀은 흑마법 실험에 동원돼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참아야만 했던 걸까.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한 자세로 가만히 있기 힘드시다면 조금씩은 움직이셔도 괜찮습니다.”

그는 내가 눈살을 찌푸리니 어딘가 불편하다 여긴 모양이다.

“아뇨,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럼 계속 작업해도 되겠습니까.”

“네.”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그 역시 굳이 말을 붙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 다시 말문을 텄다.

“리셀.”

“예, 말씀하세요.”

내 부름에도 손을 멈추지 않으며, 리셀이 답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을 계속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셀리안이라는 가명은, 어쩌다 사용하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번에는 쉼 없이 움직이던 그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이내 다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스케치를 이어가며 대답했다.

“동생이, 클레어가 지어준 것입니다. …어릴 적 꿈이 화가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만 다른 쪽에 더 재능이 있었기에 금방 포기했었죠.”

나는 그가 그린 아르반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그 이상의 재능을 지녔었다고?

“그 분야에 있어 최고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분을 사사할 기회 또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야가 무엇을 말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리셀이 의도적으로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을 알기에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내가 물어보면 말해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감추고 싶으니 애써 언급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림을 그리는 건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만 남겨두기로 했었습니다. 제가 그림을 병행하는 건 스승님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이곳에서 화가란 그다지 각광받는 직업이 아니다.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실력을 지닌 화가라면 일반적인 평민들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지만 준 귀족의 권위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향력을 가진 게 그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평민들 사이에서야 인기가 있을지언정 귀족 사이에서는 멸시받고는 했다.

‘틀림없이 귀족이었겠군.’

그 스승이라는 사람.

“셀리안이란 이름은 동생이 어느 날인가 장난스레 지어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이름은 스승님의 제자로서 등재될 테니,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셀리안이란 이름으로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떠냐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그 당시를 회상하듯이.

“그때는 주의 깊게 듣지 않았습니다만… 이리 망가지고 스승님의 제자로 설 수 없게 되니 제게 남는 것은 결국 그림밖에 없었습니다.”

“…….”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리셀의 시선이 내게 와닿았다.

답이 되었는가.

그리 묻고 있는 듯이 보였다.

‘…클레어가 지어준 것이었구나.’

묻지 말았어야 했나.

그런 후회를 하던 차에 리셀이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공녀님을 뵙게 되니 다시 누군가에게 클레어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돼서… 기쁘군요.”

나와 마주한 그의 노란 눈동자는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지만 다른 무언가를 투영하듯, 흐릿했다.

“언제까지고 그 애를 생각하면 마냥 슬프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런 마음이 든다는 게 신기합니다.”

제가 벌써 그 아이에 대한 것을 한때의 추억으로 여기고 있는 건가 싶어 두렵기도 하지만요.

리셀은 작게 중얼거리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께 언젠가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번은 제가 불편하신 눈치시기에 말을 꺼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인사를 어떻게 할 생각이기에 저러는 걸까 싶었는데, 그가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사드립니다. 제 목숨을 살려주신 것도, 클레어를 찾기 위해 힘써주신 것도.”

리셀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때아닌 엄숙한 분위기에 이러지 말라 그를 말릴 타이밍을 놓친 나는 결국 어정쩡하게 그에게 내 손을 내어주었다.

그는 내 손이 깨지기 쉬운 설탕 공예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닿을 듯 말 듯 조심히 붙잡고는 고개를 숙여 살짝 제 이마를 대었다.

그에 나는 크게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리셀 세르딘의 이름을 걸고 감히 맹세하고자 합니다.”

“잠…!”

나는 그가 성이 있는 귀족이었다는 사실에 태평히 놀라워할 수도 없었다. 뒤이어 이어질 그의 말을 막기 위해 급히 입을 열어야만 했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리셀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막무가내였다.

“이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제 앞에 계신 당신께 충성하겠습니다.”

귀족이 제 이름과 성을 걸고 하는 맹세는 저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거는 행위였다.

결코 가벼이 여길만한 사항이 아니다.

“대체…!”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리셀이 나를 향해 말했다.

“본래는 클레어를 찾게 된 후에 말씀드리려 했지만… 언젠가 될지 모를 일이니 기회가 있을 때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

순간 그가 클레어를 포기한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장 그의 눈빛을 보고 그런 뜻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래, 3년이나 제 동생을 찾아 헤맸는데 저런 반응이 당연한 거겠지.

그럼에도 대단하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3년 동안 단서라고 할 만한 것도 찾지 못했을 텐데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비록 반쪽짜리 맹세일 뿐이지만, 클레어를 찾기 전까지는 제 목숨을 함부로 여길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뭐? 클레어를 찾기 전까지는 목숨을 함부로 여길 수 없어?’

그럼 그 이후에는 함부로 여길 수 있다는 뜻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지나치게 흥분한 사실을 깨닫고 작게 숨을 골았다.

그리고 한결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리셀 경…?”

“단승작에 불과하니 편히 리셀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준 귀족은 뭐 귀족이 아닌가.

하지만 본인이 원한다는데….

“그래요, 리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실질적으로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었던 건 완전한 우연이었고, 당신 목숨을 구했다 한들 한 것이라곤 부축해서 내보낸 게 전부니까.”

애초에 리엘리 로베르라는 사람 자체가 당신이 가장 증오해야 하는 그 사건의 원흉, 로베르 공작의 딸인 것을.

나는 리셀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과연 그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흑마법사들에 의해 벌어진 은밀한 실험. 그곳에 갑작스레 나타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귀족 영애.

그녀는 공녀였고, 갇혀 있던 곳은 공작저의 지하에 마련된 은밀한 공간이었다.

이때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심정으로 리엘리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로베르 공작을, 나아가 리엘리 로베르의 존재를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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