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아르반이 작게 웃어 보이자 그 미소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짓는 것이라 여긴 리엘리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마주 웃었다.
사실 뒤늦게나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얼핏 들긴 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흑마법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겠지.
그런데 이런 문제를 두고 자신은 이리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도 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도 결국 평범한 사람일 뿐이란 현실을 상기해냈다.
생명은 소중하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목숨이요, 삶이었다.
흑마법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서자.
하지만 그 외의 일에서까지 그 사실을 떠올리고 죄책감을 갖거나 괴로워하지는 말자.
기실 제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요, 전지전능한 신도 아닌데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황궁의 문제는 일단 아르반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게 현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에게 부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사항을 남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유리 온실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아마 현재 그곳은 비어있는 공간일 테니 공작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이미 3년이나 지난 일이니, 뭐가 남아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공작저에 남아있는 검은 마력의 농도를 보아서 확인해 나쁠 건 없을 테니.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이에요?”
그러다 퍼뜩, 아직도 제 아래에 아르반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낸 리엘리가 물었다.
“일어나겠습니다.”
그녀의 지적에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면서도 동작이 굼뜨기만 했다.
내심 그녀와 가까이 있을 수 있어 일부러 자리를 지킨 것이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더 미적거리다가는 리엘리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볼 것 같아, 그는 제가 앉았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작은 아쉬움이 새어 나오는 아르반의 얼굴에 리엘리는 무심결에 웃음을 흘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근래 들어 그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게 되어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진작 저리 인간다운 표정을 짓고 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냐. 그랬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홀리고 다녔겠어.’
표정 없는 낯일 때도 그리 완벽했는데.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그의 얼굴도 보통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다채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들지는 못했다.
다만 여태 그의 무감정한 표정에서도 분위기로나마 기분을 파악해 냈던 리엘리였기에 아르반의 표정이 참 생동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흠, 근데 왜 갑자기 저렇게 표정이 좋아졌을까.’
역시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만큼 감성적으로 변하고 마음이 풀어지는 경향이 있는 걸까.
그런 이유라도 그의 변화가 저 때문이란 것이 되니… 썩 만족감이 들었다.
“우리 다시 식사나 할까요? 식어버린 음식은 물리고 다시 내어오라 하죠.”
중요한 이야기도 끝을 맺었겠다,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니 슬슬 배가 고픈 듯도 했다.
아르반은 물론 그녀의 제안을 기꺼이 승낙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으나 여태 필요에 의한 대화가 아닌, 일상적인 얘기를 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차라리 식사하는 편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가히 탁월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사용인들이 음식을 치우고 애피타이저를 내어오기까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를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으니까.
‘…머저리가 따로 없군.’
자신에게 신랄한 평가를 내린 아르반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머리가 너무 과열됐다. 하고 싶은 말은 넘쳐났으나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다.
내가 당신을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언제인가.
나를 좋아한다 여기게 된 것은 언제였나.
당신이 살아왔던 다른 세계는 어떤 곳이었나.
그곳과 이곳 중, 어느 곳에서의 생활에 더욱 만족하나.
그곳에는 혹시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던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아르반은 제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는 질문들을 정리하는 와중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만약, 그녀가 본래 살던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면 자신은 어찌하면 좋을까.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하기라도 해요?”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리엘리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멍청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가정은 쉽사리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넘어오는 게 가능했다면, 다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식사에도, 리엘리에게도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엘리는 약간 삐걱거리는 아르반을 보고도 마냥 웃어넘겨 주었다.
식사 자리가 즐거웠으므로.
“이 케이크 맛있지 않아요? 율렌이 제일 좋아하는 건데.”
“…달군요.”
맛있다 말하려 했는데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솔직한 감상평이 튀어 나가버렸다.
아르반이 급히 제 말을 정정하려는데, 리엘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야 케이크니까 당연히 달겠죠. 그리고 보니까 당신이 단 걸 입에 대는 걸 본 적이 없네. 전에 처음 식사했을 때 기억나요? 디저트로 나왔던 셔벗에 거의 손도 안 댔던 것 같은데.”
아르반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두며 아직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있는 리엘리를 바라봤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나.
그는 대체로 단 음식은 입에 대지 않는 편이었다. 지나치게 단 음식은 삼키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단 거 안 좋아해요?”
“…예. 단 음식을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리엘리는 흡사 기미라도 하는 사람인 양 신중한 표정으로 극소량의 케이크를 떠먹은 아르반의 낯이 구겨지는 모습을 전부 목격한 바였다.
여러 가지로 기분이 붕 떠 있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그가 다른 것에 신경 쓰고 있단 느낌은 받았다.
다만 자신처럼 익숙지 않은 고양감 때문일까 싶어 지적하지 않았을 뿐.
‘그래도 계속 그 상태였으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이니 귀엽네.’
케이크를 먹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르반이라니.
별것도 아닌 상황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마냥 즐거웠다.
“그런 것 같아요. 얼굴이 이렇게 굳어지는 거로 봐선.”
리엘리는 장난스레 순간 정색하고 질색하는 표정으로 아르반을 바라봤다.
아르반은 제가 저리 노골적인 표정을 지었나 싶어 케이크를 힐끔거렸다. 조금 민망했다.
“좋네요.”
리엘리는 씩 미소 지으며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크게 잘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런 그녀의 한마디에 아르반은 혼란에 빠졌다.
대체 무엇이? 단것을 먹고 질색하는 표정이 재미있었단 건가?
그녀가 즐거워한다면 좀 더 먹어야 하나, 싶어 다시 포크를 들려는데 리엘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싫어하는 걸 알았으니까 다음부터 단 음식은 빼고 준비하면 되겠어요.”
리엘리는 음료를 마셔 입 안을 정리하고는 아르반에게 질문했다.
“단 거 싫어하는 건 알겠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가 있어요?”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단 것을 제외하면.”
애초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음식을 골라 먹는 건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전쟁통을 몇 년이나 구르다 보니 어지간히 씹어 삼킬 수 있는 음식이라면 대체로 다 먹을 수 있었다.
“가리는 건 없어도 좋아하는 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아르반은 순간 이런 게 왜 궁금한 건지 의아해졌지만 반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금세 납득했다.
자신 역시도 그녀가 어떤 음식을 선호하고 싫어하는지를 알고 싶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창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리엘리가 작게 탄식하며 고향에서 먹었던 여러 음식을 언급했을 때는 아르반의 심장이 철렁이기도 했지만, 그 역시 그녀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게 달갑기만 했다.
그렇기에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흘러, 문득 창밖을 봤을 때는 어느새 해가 넘어가 사위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아르반의 시선이 밖으로 향하자 함께 그 사실을 깨닫게 된 리엘리는 조금 고민했다.
‘자고 가라고 물어볼까.’
아냐, 오늘부터 사귀는 사이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이전에는 잘만 권했던 바였지만 정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상태에서 제가 먼저 잠자리를 권하기가 좀 그랬다.
“많이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 일어나고 다음에 또 보는 게 낫겠어요.”
아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부를걸.
아니지, 이전에는 아몬의 수업이 있었잖아. 그냥 다음 날 와달라고 부탁할 것을. 그랬다면 온종일 같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아르반은 눈에서 아쉬움을 뚝뚝 떨구면서도 자신을 돌려보내려 하는 리엘리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이가 없군.’
한 번쯤은 묶고 가라 권하거나 모른 척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길 내심 바라고 있었나 보다.
그런 저 자신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아르반이 약간 침울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던 리엘리가 옅게 웃었다.
“돌아가기 아쉬워요? 그래도 밤이 늦었으니 집에 가야죠. 밤길도 어두운데 위험하잖아요.”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이곳에 있고 싶다 넌지시 운을 떼고 싶었지만 자신 때문에 그녀가 쉬지 못하는 상황을 원치는 않았기에 뒷말은 생략했다.
리엘리는 단호하게 답하는 아르반의 모습에 예전 일을 떠올렸다.
성검을 찾으러 무너진 신전 지하를 향했을 당시 맹금류인 양 제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던 모습.
‘괜한 걱정이긴 하네….’
이 잘생긴 남자는 비단 얼굴만 최고가 아니라 무력 또한 최강이었거늘.
“음, 그래도 마차는 당신이 모는 게 아니잖아요. 마부가 길을 잘 볼 수 없으면 곤란하니까….”
어째 그를 빨리 보내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은 모양새라는 생각에 뒤늦게 말끝을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반의 얼굴에 미약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당신을 빨리 보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지금 출발해야 당신도 나도 다음 날 지장 없이 잘 수 있으니까….”
리엘리는 약간 의기소침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이가 됐다는 게 좋아 웃음이 셀 듯도 한, 아주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미쳤나 봐, 진짜.’
문득 어디선가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고 했던가.
바보까진 아니어도 어딘가 이상해진 것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