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내뱉고 보니 또 너무 행복 회로를 돌린 건가 싶어 솔직히 좀 후회되었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기라도 하는 양,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르반은 제 손바닥에 닿아있는 그녀의 체온과 심박 수가 보다 높아짐을 느꼈다.
어떻게 말하는 편이 좋을까.
솔직하게 털어놓는 쪽이 득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이런 얼굴을 하고 그런 질문을 하면, 거짓을 말할 수 있을 리가.’
결심을 굳힌 아르반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를 바라보는 당신의 얼굴에 일말의 그림자도 드리워지지 않길 바랐을 뿐입니다”
“왜요? 제가 당신의 친구라서?”
아르반은 제 대답에 곧장 되물어 오는 리엘리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음을 눈치챘다.
제 대답이 마뜩잖은 듯한 그녀의 어조에, 아르반은 심장의 떨림을 느꼈다.
친구.
리엘리와 아르반의 사이를 명확히 정의하자면 그보다 알맞은 단어가 없었다.
‘친구라서 그랬다는 답을 듣고 싶은 게 아냐.’
리엘리는 약간 흥분해 저도 모르게 추궁하듯 질문했다.
“아니죠? 친구라서 받아준 게 아니잖아요.”
그에 아르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분명 티를 내지 않았다고 여겼거늘,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당신을 친구 이상의 의미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믿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은 그러한 가정에서밖에 연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르반은 그녀 몰래 탄식했다.
역시 그녀의 앞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지금에 와서야 제 감정을 의식하고 그녀가 제게 이성적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지만 이전에는 아니었다.
귀 끝이 화끈거렸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제 감정을 들켰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창피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알았을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음을.
그 자신도 자각하기 이전의 마음을 그녀가 꿰뚫어 보고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느껴졌다.
리엘리는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든 아르반이 아무 말 없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눈을 가늘게 떴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진짜 당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평소에 이다지도 감정표현이 다채로운 사람이 아니면서.
왜 갑자기 제게 잘 웃어주고, 부끄러워하며 다정히 구는지….
이러면 애당초 마음이 없었다 한들 설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나는 오죽하겠어?’
만약 제 가정이 틀렸다면, 그건 전부 당신이 나쁜 것이다.
“저를 좋아하는 거잖아요.”
아니라면 지금 당장 그 입으로 부정해.
리엘리는 아르반의 시선을 다시 제게로 돌리기 위해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빼내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조심스럽기 짝이 없던 아르반의 태도와는 달리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대답, 안 해줄 거예요?”
답을 재촉하자 내리깔려 있던 그의 긴 속눈썹이 작게 파르르 떨렸다.
아르반은 혹여 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을까,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리 빨리 그녀에게 전하게 될 줄은 몰랐던 진심이었다.
“예. 당신을 좋아합니다.”
아르반을 바라보고 있던 보랏빛 눈동자에 격정이 비치며, 리엘리가 미소 지었다.
“저도요.”
아르반은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도 당신이 좋다고요.”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든 애정을 확인한 순간, 아르반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제 입꼬리를 제어할 수 없어져 버렸다.
*
나는 만개한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아르반의 얼굴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어떻게 이리 예쁠 수 있을까.
그의 아름다움을 한낱 꽃에 비유하고 있는 내 뻔한 문장력이 통탄할 따름이었다.
‘나한테만 이렇게 웃어주는 거겠지.’
안 그래도 긴장해서 터질 것 같던 심장이 이제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작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막상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 무슨 말을 이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온통 눈밭처럼 순백으로 물들어버렸다.
나와 그는 잠시간의 침묵에 사로잡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아르반이 살짝 눈을 감으며 아직 뺨을 감싸고 있는 내 손에 제 얼굴을 문질러왔다.
마치 쓰다듬어 달라 애교부리는 고양이처럼.
나는 그에 홀린 듯이 손을 움직여 살살 보드라운 뺨을 쓸어주었다.
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백옥 같은 피부였다.
손끝을 스치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에 집중하다 그에게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뗐다.
“있잖아요, 아르반.”
“예, 말씀하십시오.”
내 부름에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들리며 푸른 눈동자가 다시 나를 담았다.
오직 내 모습만이 비치는 게 퍽 만족스러워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에요.”
한국이었다면 선을 보지도 않았거니와 단순히 서로 마음을 확인한 것뿐인데 이런 말을 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좀 달랐다. 특히나 귀족들에게는 더욱.
나야 후계 문제에서도 발을 뺄 생각이고 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었으니 상관이 없다지만 그는 아니었다.
‘원작에서 당신이 왜 독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결혼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닐 테지.’
그러니 미리 말을 해주는 편이 옳다고 판단했다.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요.”
“곁에 있게 해주신다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중간에 약간 머뭇거리는가 싶었지만 이내 굳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왔기에 착각인가 싶었다.
“…그럼 지난번 당신 생일 연회는 정말 황제의 명령 때문에 열린 거예요?”
나는 화제에 맞춰 슬그머니 지난 생일 연회를 언급했다. 안 그래도 조금 신경 쓰이던 터였다.
“예, 연회를 주최한 것부터 쓸데없는 의미 부여로 번거롭게 만든 것까지 모두 그 때문이었습니다.”
흠, 결혼할 생각이 없다라.
원작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어째서 결혼 생각이 없는지 좀 궁금해졌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결혼은 부가적인 요소가 아닌, 필수에 가까운 사항이었으니까.
“아.”
하지만 그걸 물어보기 전에 더 중요한 문제가 떠올라 버렸다.
원래 오늘 그를 불러온 목적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갑작스레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는 바람에 흑마법사와 관련된 사안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 아르반. 사실 오늘 당신을 보자고 한 건 고백하려던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거든요.”
나는 약간 민망한 기분에 어색하게 운을 뗐다.
“듣고 있습니다.”
그는 내 말에도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를 유지한 채 나를 올려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자세로 흑마법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는 좀….
“일단 다시 앉아 봐봐요.”
“괜찮으니 이대로 말씀하시죠.”
아니, 내가 안 괜찮아.
나는 이 상태로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아르반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그냥 입을 열었다.
“하… 그럼 그냥 말할게요.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얘기를 하려고 제가 빙의한 사실을 밝힌 거였는데….”
나는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
내가 빙의하며 율렌의 마력과 함께 신성력을 흡수한 것으로 인해 연회 때 방문했던 황궁에서 검은 마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일.
그리고 빙의한 이후 리엘리의 기억을 서서히 습득하다 율렌의 도움으로 그 과정이 급속도로 빨라졌다는 것.
또한 기억을 습득하는 와중 알게 된 공작저에 존재했던 흑마법사들에 대한 비밀까지.
“…신성력의 영향으로 검은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된 후에 공작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늘 궁금했어요.”
대화를 시작하며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는데, 아르반은 그런 내 손을 재차 붙들고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 손에 금칠이라도 돼 있는 줄 알겠다.
“그랬군요. 저는 황성에서도 공작저에서도 특별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명색이 성검의 주인이라는 자가.
무미건조하게 덧붙이는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죄책감을 느끼는 듯이 들려왔다.
그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율렌에게 들었던 바도 있었기에, 나는 그에 대한 설명을 더했다.
“아, 그건 성검과 관련이 없어요. 율렌의 말로는 인간이라면 원래 느낄 수 없는 기운이라고 했거든요. 당신은 성검의 주인이지 신성력을 지닐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습니까.”
다행히 그는 내 설명에 납득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검은 마력이라는 것이 당신에게 좋지 않게 작용하는 겁니까.”
“음, 인체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물어본 건 아니지만 일단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그보다 더 기분 나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역겹고 불쾌하게 만드니.
황궁에서 느꼈던 기운을 다시 상기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내 표정 역시 굳어진 모양인지 아르반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불러왔다.
“엘리.”
“아, 네.”
“제게 그것들의 소탕을 부탁하고 싶은 겁니까.”
아직 그들을 어찌해달란 요청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아르반은 내 이야기를 듣고 부탁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유추해냈다.
*
리엘리는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수를 쳐온 아르반으로 인해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순순히 수긍했다.
“네. 솔직히 당신이랑은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 어지간하면 제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어요.”
그렇기에 공작저 내부에서 흑마법의 흔적을 발견했을 당시 아무에게도 그 말을 전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달한들 누가 믿어줬겠느냐 마는….
“하지만 희생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겠지. 제가 알고 있는 그녀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린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아르반은 내심 제가 가진 무력에 뿌듯함을 느꼈다.
여태껏 살아오면 제가 가진 힘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힘을 갖고도 제 어머니 한 명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을 질책한 적은 있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자신이 가진 이 무력으로 인해 리엘리가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온 것이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것들을 모두 치워드리죠.”
공작저 내부에서 느껴지는 것이 흑마법의 잔재뿐이고 현재 근원지가 황궁이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더구나 그녀가 말을 꺼낸 지금은 마침 아르반이 황권 교체를 다짐한 직후였다.
‘현 황제를 끌어내리고 그 내부에 무엇이 들었는지 낱낱이 파헤치면 그만이겠군.’
시기가 절묘했다.
아르반은 제가 계획한 일이 동시에 그녀의 걱정을 덜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슬쩍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