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아, 안돼.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건데 계속 아르반이나 살피고 있고….’
리엘리는 그의 미모에 사로잡힌 듯 이끌리는 제정신을 다잡았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사람을 홀릴 듯이 구는지, 곤란하기 짝이 없다.
“흠흠, 그리고 고백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리엘리는 아무쪼록 이야기를 끝마치는 순간까지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
고백, 아르반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잠시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리엘리의 표정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색을 읽어내고 곧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역시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녀는 제 앞에 있는 음식들을 멀리 밀어내며 음료 잔을 잡았다.
그 모습에 아르반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로부터 얼마 전의 일이에요. 내가 리엘리 로베르라는 사람의 몸에 들어온 게.”
리엘리는 사뭇 담담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떻게 말문을 열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그녀의 입을 통해 뱉어지는 설명은 매끄럽기만 했다.
아르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리엘리는 그가 다소 동요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다른 세계, 제가 이 몸에 빙의할 수 있었던 이유, 이 세계의 미래 배경으로 적혀진 소설, 그로 인해 알 수 있던 약간의 정보들.
그녀의 입에서 그간 말하지 못했던 모든 비밀이 쏟아져 나왔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게 제가 성검의 위치를 알 수 있던 이유에요.”
리엘리는 혼자 한참 얘기하느라 건조한 입을 축이며 아르반을 살펴봤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침묵하는 그의 모습에 여태 이상토록 평온했던 리엘리의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역시 그냥은 믿어주지는 않는 건가.’
하긴, 그럴 수밖에.
만일 자신이 듣는 입장이었다면 미쳤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을 것이다.
저리 평소와 같은 낯으로 진지하게 고심하는 것만 해도 양호한 반응이리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리엘리는 애써 씁쓸한 기분을 달랬다.
아무래도 그가 제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리란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작용한 모양이다.
이리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을 보면.
‘믿기 힘들다면 믿게 해주면 되지, 뭘 이렇게 의기소침해지는 거야.’
비논리적인 상황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면서.
리엘리는 그가 제 말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증인, 율렌을 데려올 생각으로 입술을 뗐다.
하지만 아르반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당신이 제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겠죠. 그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혼자 마음고생이 많았겠군요.”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순순히 제 말을 믿는다는 그 목소리도 믿기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위로하는 발언을 꺼낸 것에 놀랐다.
그러나 아르반은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무어라 대답할 새도 주지 않은 채 질문을 이었다.
“이전 세계에서 사용하던 당신의 원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르반의 얼굴에는 한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지만 도리어 이 모든 정황을 설명한 리엘리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거짓말.’
이런 얘기를 믿어준다고?
막상 믿어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는 실망하더니, 저리 시원하고 단호하게 답하니 또 기분이 묘해졌다.
더군다나 왜 갑자기 빙의 사실을 털어놓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도 않은지 대뜸 이름을 물어온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리엘리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지서안이에요. 지가 성, 서안이 이름.”
“지서안. 서안, 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리엘리는 그의 입에서 제 본래 이름이 튀어나오자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그냥 엘리라고 불러주세요. 어차피 여기서 그렇게 불려봐야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그래도 남이 사용하던 이름이지 않습니까. 그 몸에서 지내게 된 것도 당신의 원하던 일이 아니라 하셨는데, 그걸로 괜찮은 겁니까.”
“음, 어쩔 수 없죠. 제가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이미 죽은 제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거니까, 충분히 만족하기도 하고요.”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본래 이름으로 불러드리겠습니다.”
리엘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다 이내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위하고 생각해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서안이라고 불러 달라고 할까.’
누군가 한 명쯤은 자신을 원래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 본래 이름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밀려드는 한국에서의 추억들에 입 안을 사리물었다.
너무도 달콤한 제안이지만 그만큼이나 애써 묻어두려는 기억을 헤집어 놓는 일이었다.
“…아뇨, 원래 이 몸의 애칭은 리리였으니까 엘리라고 불리는 것으로 족해요.”
다른 애칭으로 이전의 그녀와 자신을 분리한 것으로 충분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전 이름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었다.
아르반은 약간 씁쓸하게 들리는 리엘리의 목소리와 그녀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그리움을 읽어냈다.
오직 자신만이 부를 수 있는 그녀의 호칭이란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괜히 돌아갈 수 없는 이전 세계의 기억을 헤집어 그녀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으니까.
‘혹여 향수병이라도 돋았다간 큰일이니.’
만약 그녀가 돌아가고 싶다 한들, 돌려보낼 생각이 없으므로.
“그럼 알아만 두겠습니다.”
“네, 그래요. 그보다 제가 한 말, 진짜 믿어요? 못 믿겠으면 율렌을 불러 증명해 줄 수도 있어요.”
리엘리는 그가 이미 제 말을 받아들였다 생각하면서도 괜히 율렌을 들먹거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을 믿어요.”
아까처럼 어딘가 간지러운 웃음을 띤 얼굴도 아니요, 그리 길지도 않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언제 나와 같은 무감정한 듯하지만 신뢰감 가득한 목소리에, 리엘리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왈칵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기 힘들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궈 제 얼굴이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했다.
자신을 믿어준다는 그 한마디가 뭐라고 이다지도 가슴이 벅차오른단 말인가.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이미 율렌에게 한 번 털어놨던 이야기임에도 이를 받아들여 주는 이가 다르기에, 제 마음을 털어놓는 심정 역시 달랐다.
또한 모든 정황적 확신을 지녔던 율렌과 달리 전혀 근거 없이 들릴 제 이야기를 오롯이 신뢰하는 그로 인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가 날 믿어준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구나.’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올곧게 나를 믿는다는 그 한마디가 이다지도 크게 다가와 심금을 울린다.
이 순간, 리엘리는 제 마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저 남자가 좋아.’
이게 애정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감정이 좋아한다는 말을 품을 수 있을까.
“엘리.”
처음 느껴보는 낯설고 감당하기 힘든 떨림에 숨을 죽인 리엘리를 보고 다른 의미로 심장이 덜컹거린 아르반이 재빨리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오직 단 한 번, 작위를 받을 당시 황제의 앞에서만 꺾였던 무릎이었지만 그 행동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엘리.”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부르며 꽉 쥐어진 작은 손을 향해 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충분히 제 행동을 인지하고 자신의 의지로 피할 수 있을 만큼 느릿하게.
하지만 리엘리는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도, 그 손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아르반은 하얀 손등을 살짝 감싸 쥐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나 무릎을 꿇었다 한들 신장 차로 인해 고개 숙인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르반은 리엘리의 양손을 감싸고 있던 한 손을 떼어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뺨은 약간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제가 어떤 말실수를 했는지를 돌아보며 아주 약간 힘을 줘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리엘리와 시선을 마주한 아르반은 가슴의 욱신거림을 느꼈다.
제 손에 닿았던 온기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은 미약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또한, 항시 총기 넘치던 보랏빛 눈동자가 약간의 물기를 머금어 희미하게 일렁인다.
그 속에는 너무도 많은 감정이 엿보였기에, 아르반은 감히 그녀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객관성을 상실한 것일지도.
“제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까.”
그는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리엘리의 앞에서는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감정을 표현하겠노라 다짐했지만 이런 그녀의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리엘리는 아르반의 질문에 입술을 달싹였다.
“…아뇨. 그냥.”
순간 그에 대한 제 마음을 깨달았고, 여러 감정이 아우러져 가슴이 벅찼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자니 안 그래도 열이 몰린 얼굴이 그대로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데, 순간 제 손을 잡고 있는 아르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엘리는 그 손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시정하겠습니다. 부디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묘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다소 경직된 듯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지나칠 만큼 제 눈치를 살피는 아르반의 반응에 일순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만약에, 아르반도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이전에 그가 브로치를 받아준 것도, 이후에 답지 않게 격한 감정을 내보인 것도 전부 설명이 된다.
비록 그때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
리엘리는 평소보다 과열된 머리가 도출해낸, 오로지 제 감정에 충실한 질문을 그대로 입 밖으로 냈다.
“아르반, 연회 날 제가 화낼까 봐 브로치를 받았다고 했던 거. 그거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