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이런 생각을 한 게 처음은 아니다.
전에 그와 언쟁을 벌였을 때도 들었던 의문이었으니까.
다만 지금으로서는 더욱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였다면 진작 불려가 뭐 잘 못 먹었냐, 머리를 다친 건 아니냐, 그도 아니라면 정신과에 데려가 진료를 받게 했을 만큼 리엘리와 나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내 입장에서야 그게 당연한 일이지. 사람이 바뀐 거니까.’
하지만 공작이 이런 내 속사정까지 꿰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의아하게 여기는 편이 정상이다.
여태까지는 공작에 대한 생각을 의식적으로 자제해 왔기에 나 역시 그 부분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지 않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엘리는 공작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딸이지 않던가.
특히나 칼리온 호수의 일은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공작은 내가 허울뿐인 세리나의 무덤에 방문해 꽃을 두고 왔다는 걸 보고 받았을 거야.’
그런데 여태 아무런 말이 없다고?
이쯤 되면 이상하다 못해 수상하게 여겨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거늘.
나는 인상을 구기며 ‘말하다 말고 또 왜 그러는데?!’라고 소리치는 율렌을 뒤로 한 채 세바니를 불렀다.
“세바니, 요 며칠간 공작, 아니, 아버지가 저택에 머무르셨니?”
그녀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조금 당황해했지만 이내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 네. 며칠간 저택에서 업무를 보신 거로 알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 황궁으로 출타하셨거든요.”
“그래? 알겠어, 고마워.”
“아니에요, 아가씨. 물러가 보겠습니다.”
저택에 머물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나에 대한 보고는 전부 받아봤을 터였다.
‘…일단 황궁으로 갔다고 하니 며칠간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 안에 아르반과 먼저 흑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리셀과 클레어의 문제 역시 고민해 본 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해 보자.
나는 발치에서 무어라 구시렁거리는 율렌을 끌어안고 상념에 잠겼다.
3년 전 사건을 하나 알게 된 것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아름 쌓여버렸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잖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자.
그렇다면 역시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건….
“아르반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
편지의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점심 식사를 마친 직후 아르반이 보낸 시종이 편지를 들고 당도했다.
아르반의 편지는 참 그답다고 해야 할지, 정갈한 글씨체로 필요한 내용만이 간략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오늘 당장 보자고 한 건 좀 의외지만.’
얼결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버렸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의논할 문제가 있다고 말한 건 나였으나 그가 이리 적극적으로 만남을 제안할 줄은 몰랐다.
‘오늘 시간이 난다는 거니까, 그냥 이쪽에서 식사하자고 전달하는 게 낫겠다.’
어차피 오후에 그가 공작저에 방문할 터이니, 그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나는 후다닥 답신을 작성해 시종에게 들려 보냈다.
그리고 급하게 드레스 룸으로 향해 입을 만한 드레스를 고르고 목욕하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하아.”
사실 아까부터 생각하던 건 흑마법에 대한 게 아니었다.
내가 리엘리의 몸에 빙의한 사실에 대해 그에게 털어놓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면 모든 정황 설명이 수월해지겠지.’
애써 거짓말을 섞어가며 부연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나는 함께 욕조에 들어와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율렌을 바라봤다.
그냥 털어놓는다면 처음 성검을 찾으러 가자 제안했을 때처럼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했다.
어디 가서 말을 꺼내면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좋은 이야기.
‘하지만 지금은 그때랑 달리 내 말을 증명해줄 율렌이 있어.’
그러나 아르반이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뭐 때문에 망설이는 거지.’
빙의했다고 털어놓으면 죽는 것도 아니고, 원작이 틀어질까 전전긍긍할 처지도 아니었다.
…뭐야, 생각해 보니까 주저할 이유가 없잖아.
아르반이 빙의 전 리엘리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면 모를까, 그 또한 아니었다.
맨 처음 그와 마주했던 사람은 이전의 리엘리 로베르가 아닌 지금의 나였으니까.
결심이 선 나는 당장 욕조를 박차고 일어났다.
*
아르반이 도착하고, 그가 아몬과 수업을 하는 동안 리엘리는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세이린과 승마에 돌입했다.
“오늘 각하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시나 봅니다.”
수업을 마칠 즈음,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입을 여는 세이린에게 리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흠, 그러시군요.”
세이린은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당일 갑작스럽게 잡힌 리엘리와 아르반의 저녁 식사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리엘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뭔가가 있었다.
‘뭘까, 엘리가 드디어 주군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기라도 했나.’
혹시 고백이라도 할 생각일까.
저리 단단히 마음을 굳힌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녀는 내심 기대를 하면서도 괜히 실망할 만한 생각을 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잡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고마워요, 세이린.”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간단히 샤워하고 식사 자리에 참석해야 하니 시간이 빠듯했다.
리엘리는 급하게 준비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르반은 그녀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리엘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제가 먼저 도착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미안해요, 혹시 기다리셨나요?”
이쪽이 수업도 먼저 끝냈고, 씻고 준비하는 것도 최대한 시간을 아꼈으니까.
“아닙니다. 저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앉으시죠.”
아르반은 리엘리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주며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리엘리는 단숨에 그의 모습을 훑어봤다.
연회 날처럼 화려하게 꾸민 것은 아니었지만 잘 세팅된 머리하며, 평소 그가 아몬을 가르칠 때 입는 옷과는 다른 잘 정돈된 의복.
더구나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거 내가 쓰는 샤워 코롱 향기잖아.’
딱히 남녀 구분 없이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는 허브 향이었다.
손님용으로도 같은 제품이 구비되어있나.
리엘리는 가벼이 생각하며 무심코 입을 열었다.
“아르반, 방금 씻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리엘리의 모습에 아르반은 어쩐지 조금 민망해졌다.
예상치 못한 직구였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익숙한 것이기도 해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예, 아무래도 연무장에 들렀던지라, 실례를 무릅쓰고….”
사실 애초에 그럴 작정으로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왔다.
저녁 식사 약속이었기에 공자의 수업을 봐준 뒤, 곧장 자리에 응해야 했으니까.
흙먼지가 흩날리는 연무장에서 뒹굴던 추레한 몰골로 그녀의 앞에 자리한다는 건 지금의 아르반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호감을 사려면 깨끗하고 잘 가꾼 모습만 비치기에도 부족한 마당이다.
인간을 초월한 육체는 이런 촌각을 다투는 일정을 소화하기에 매우 유용했다.
실로 엄청난 능력 낭비가 아닐 수 없었지만 아르반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리엘리의 표정 변화를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다행히 제 모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엘리는 내 얼굴을 제법 좋아하는 편이지.’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제게로 돌리겠다 결심한 이상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써먹을 예정이었다.
“아아.”
리엘리는 그에게서 풍겨오는 저와 같은 향기에 묘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얼른 착석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르반은 리엘리가 자리에 앉자 제자리로 돌아가 주변을 훑었다.
전에 그녀가 카넬로웰 영지를 방문했을 당시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음식이 미리 준비되어 있다.
대기하는 사용인 역시 전무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밖으로 노출되면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올 듯이 보였다.
다만 그녀가 어떤 얘기를 꺼내려는지 짐작이 되지 않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먼저 드세요. 저는 별로 생각이 없어서.”
리엘리는 아르반에게 먼저 식사를 권했다.
그녀는 애초에 입맛이 없어 뭘 먹을 생각이 없었다.
“아닙니다. 식사보다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꺼내실지가 더 궁금하군요.”
리엘리는 순간 멈칫했다.
본래 무미건조한 어조가 몸에 배다시피 했던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서 은근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꼭 진심으로 제가 어떤 말을 꺼낼지 흥미로워하는 사람의 기대감 어린 목소리같이….
‘원래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이제 보니 그의 입매가 아주 조금 곡선을 그리고 있는 듯도 해 보였다.
리엘리는 재차 다른 쪽으로 빠지려는 생각을 본래 방향으로 되돌렸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릴게요. 당신한테 만나자고 한 건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였어요.”
“편하게 말씀하시죠.”
대답하는 그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이번에는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 속에 담긴 푸른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다정하게만 보여 감회가 새로웠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