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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04화 (104/153)

104화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더 밖에 있다가는 정말 감기 걸리겠어.”

내가 아몬의 등을 쓸며 말하자 아이는 내 어깨에 걸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게서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운지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기도 했다.

‘조금 더 안아주고 싶은데.’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실천은 빨랐다.

나는 주저 없이 아몬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줘 일어섰다.

한쪽 무릎을 오래 꿇고 있던 탓에 다리가 저려 잠시 휘청였지만 이내 균형을 잡았다.

아몬이 그 나이대 애들보다 현저히 작았기에 잠깐 드는 정도는 문제가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크면 못 들겠지만.’

그날이 기다려지는 하나, 동시에 서운한 감정이 일기도 했다.

‘이렇게 안아주고 싶어도 금세 자라서 못할 테니까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줘야지.’

나는 아몬이 알게 된다면 기겁할만한 생각을 했다.

평소 같았다면 당장 내려달라 아우성을 쳐야 할 아몬이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나는 아몬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치고 걸음을 뗐다.

“아가씨, 도련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선 호위 기사가 정중히 손을 내밀어왔다.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의 젊은 기사, 제롬이었다.

이전 외출 때에도 동행했던 자였지만 말을 섞어보는 건 또 처음이다.

“아냐. 마차까지만 이러고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지만….”

“괜찮으니까 하는 말이야.”

“예.”

그는 심히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물러났지만 지척에서 나를 따라오는 것이, 딱 봐도 내가 힘이 풀려 아몬을 놓치면 제가 받을 심산인 듯했다.

나는 심드렁히 내 팔뚝을 내려다봤다.

햇빛 한 번 못 보고 자란 양 하얗고 가느다란 팔뚝은 조금만 힘을 줘 잡아도 부러질 듯 연약하게만 보였다.

객관적으로 신뢰가 갈 만큼 튼실해 보이는 팔은 아니었다.

‘아마 내일 근육통 장난 아니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만능 힐링펙터인 율렌이 있다.

‘어차피 내일 회복을 받는 건 기정사실이니 근육통이 생겨도 상관없지 뭐.’

그렇다.

오늘 저택으로 돌아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지상 과제, 3년 3개월 전의 기억을 살피는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신성력에 의지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완전 무색해져 버렸지만….

나는 한숨을 삼키며 아몬을 안아 든 채 마차로 향했다.

하지만 중간쯤 왔을까, 미세하게 떨리던 팔이 본격적으로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떨림이 아몬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염려가 가득 담긴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누나, 이제부터는 제가 걸어서 갈게요.”

…사실 느끼지 못하면 이상할 만큼 부들거리긴 했다. 젠장.

걱정 어린 아몬의 표정에 잠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들려온 제롬의 목소리가 내 심기를 건드렸다.

“맞습니다, 아가씨. 무리하지 마시고 제게 넘기시죠.”

“아니에요. 제 발로 걸어갈 수 있으니까 그냥 내려만 주세요.”

못 이기는 척 내려놓을 심상이었는데, ‘그것 봐라, 이럴 줄 알았지’라는 듯한 약간의 업신여김이 새어 나온 제롬의 표정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힘들긴 하지만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것 같았으면 진작 내려놨겠지. 애 다치게 만들 일 있나….

나는 좀 더 속도를 높이며 대답했다.

“괜찮으니 신경 쓸 것 없어.”

내 불편한 심기가 묻어난 한마디에 제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그제야 만족스러워진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몬을 얼렀다.

“누나 괜찮아. 마차까지만 이렇게 가고 싶어서 그래.”

“그렇지만….”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줘, 응?”

“네….”

나긋한 목소리로 아몬에게 속삭이면서도 힘이 들어 이가 갈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에 도착했고, 나는 팔을 몰래 주무르며 아몬과 함께 간식을 먹었다.

본래 피크닉 용으로 준비해온 음식이었지만 밖에서 먹기에는 힘든 날씨라 그냥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만족했다.

“봄이 되면 다시 오자. 그때는 초목이 우거져서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거야.”

“벌써 그날이 기다려져요.”

아몬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가 얼추 배를 채웠을 무렵, 헐레벌떡 뛰어오는 에바와 세바니의 모습이 창밖으로 비쳤다.

“아가씨, 죄송해요!!”

“이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요, 아가씨….”

“괜찮아, 시간을 정해뒀던 것도 아니고. 자유시간 가지라고 일부러 말 안 했어.”

울상이 되어 사과하는 쌍둥이를 달래고서야 공작저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이상입니다.”

보고를 마친 제롬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늘 그랬듯이 오늘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총집사장 필에게 낱낱이 고해바쳤다.

“수고했네.”

“예, 다음 보고 때 뵙겠습니다.”

제롬이 자리를 뜨고, 필은 그에게서 전달받은 사항을 되뇌며 곧장 로베르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가씨께서 정말로 칼리온 호수에 다녀오셨다니….’

이상한 일이다.

리엘리 로베르는 분명 ‘그날’ 이후 그곳을 향한 발걸음을 끊어버렸으니까.

필의 어머니, 시녀장 미라는 그날의 일을 알지 못해 이를 이상히 여기지 않았지만 그는 달랐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최근 몇 달간 공녀의 행적 역시 그랬다.

마치 인격이라도 바뀐 양, 조용하고 얌전하던 성격이 백팔십도 바뀌어 버렸다.

그건 필에게 있어 그다지 희소식이 되지 못했다.

‘머리를 다쳐 기억에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일순,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정말 기억이 손상될 만큼의 외상을 입었다면 그 사실이 필에게 보고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최근 이상하다 못해 수상하기까지 한 공녀의 행적에 대해 생각하던 필은 어느새 도착한 집무실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각하, 총집사장 필 브록스입니다.”

그는 집무실에 들어서며 가볍게 묵례를 했지만, 루퍼스 로베르는 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로베르 공작의 태도는 익숙한 것이었기에 필은 개의치 않고 전해 받은 사항을 이야기했다.

“각하, 아가씨께서 칼리온 호수에 다녀오셨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우려하신 것처럼 다른 곳으로 걸음을 돌리시지도 않으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보게.”

필의 보고에 읽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루퍼스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진정 사실인지 의문을 품은 다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그를 담고 있었다.

서슬 퍼런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넘긴 필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읊었다.

“아가씨께서 칼리온 호수에 다녀오셨습니다. 꽃다발까지 두고 오셨다고 하더군요.”

“하… 그럴 리가.”

루퍼스 로베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펜을 내려놓았다.

제 생각에 깊게 잠긴 루퍼스 로베르는 깍지낀 양손으로 머리를 지탱한 채 고개를 떨궜다.

“그럴 리가… 리리가 그곳에 갈 이유가 없어.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뭐가 문제인 거야.”

부릅뜬 눈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도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제 앞에 필이 여전히 서 있음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이나 미동이 없던 그의 고개가 어느 순간 정면을 향했다.

창백한 얼굴과 핏기없는 입술,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 그리고 잔뜩 확장된 동공.

현재의 그는 마치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다 실패한 조형물과 흡사해 보였다.

업무에 집중하던 멀쩡한 모습과 상반된 그의 분위기에도 필은 속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공작의 상태가 더 악화된 듯 보여 곤란할 따름이었다.

“…리리의 행동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 빠짐없이 보고하라 전하게.”

“예, 각하.”

루퍼스는 빈 양손을 가만히 두지 못한 채 손끝 손톱으로 긁어 상처를 냈다.

“리리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의심이 가득한 눈동자가 필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늘 전속 시녀들과 호위들에게 이상이 없음을 보고받고 있습니다.”

“그래, 리리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으니 더 각별히 신경을 쓰라 전하고.”

“예.”

“나가봐.”

루퍼스 로베르의 명에 집무실을 빠져나온 필은 이전보다 상태가 나빠진 공작의 모습에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를 회상했다.

아몬 로베르 공자가 태어난 해, 망가지다 못해 무너져 버린 루퍼스 로베르를.

‘그때와 비교하자면 지금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볼 수 있겠지.’

그렇지만 안정된 모습을 유지하던 몇 달 전과 비교하자면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졌다.

‘이게 다 아가씨가 변하시며 시작된 문제로군.’

필은 탄식했다.

리엘리 로베르도, 아몬 로베르도 모두 드높은 신분을 타고났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겨우 안정을 찾은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건 곤란했다.

‘그저 가엾은 아가씨와 도련님으로 남아계셨다면 좋았을 것을….’

필의 얼굴이 안타깝다는 듯이 찌푸려졌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든지 간에 한순간 태도를 바꾼 리엘리 로베르의 행보로 인해 루퍼스 로베르의 상태가 불안정해졌다.

‘아무래도 공작의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겠군.’

공작의 상태가 지금보다 더 악화된다면 필은 제가 모시는 주인의 문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얼추 그럴듯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을 선보여야겠어.’

그럼 공작의 관심은 순식간에 ‘그것’에게로 쏠릴 터였다.

이전, 공녀가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혔던 때에도 그랬다.

공작은 ‘그것’의 실험에 차도가 있음을 증명해 냈을 때 잠시나마 상당히 안정을 찾았었으니.

이번에도 공녀에 의해 어지럽혀진 마음을 잊는 것은 순식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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