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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03화 (103/153)

103화

*

리엘리의 짐작처럼 아몬은 제가 뱉은 질문을 도로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몬은 순간 돌아본 누님의 얼굴이 제 상상과는 너무도 판이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그립지 않으신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머니의 무덤에 대고 제 근황을 전하는 누님의 표정이 그리 말하는 듯 보여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아몬의 예상처럼 그리움에 가득 차지도, 그렇다고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불편해 보이지만 덤덤한 표정. 더구나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웃어주시기까지….

아몬은 여태 누님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유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라 확신했다.

그러니 누님께서 자신을 돌아봐 주길 기다리는 한편, 그게 가당치도 않은 소망이라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들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공작이 아몬을 찾아가 폭언을 퍼붓거나 학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어릴 적 아몬을 찾아왔던 이후, 단 한 번도 아이를 거들떠보지 않았으니까.

다만 주변 사용인들은 달랐다.

“공자님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각하께서 저리 되실 일도 없었을 텐데….”

“불쌍한 아가씨는 어떻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셔서 해쓱해지신 게 어찌나 안쓰럽던지.”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저러다 각하께서 정신을 놔버리시면 저희는 어떡해요?”

방을 청소하는 하녀 중 하나가 요람에 누워있는 아몬을 선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얘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평화로웠을 텐데.”

“맞아. 아가씨도 더 행복하셨을 테고, 각하께서도….”

“말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흥, 여긴 우리밖에 없는데 또 누가 듣는다고 그래?”

그들이 수군거리던 소리가 아직까지 선명하다.

애초에 기피의 대상이던 공작에게야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예뻐해 주는 누님께는 죄송한 마음이 컸다.

‘나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말처럼 누님은 더 행복했을 테지.’

또한 그렇기에 감사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등지고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누님께.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고 무어라 폭언을 쏟아붓는다 해도 말릴 사람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이리 자신을 거둬주시고 돌봐주시니….

‘여태 나를 피해 다니신 건 어머니를 죽게 만든 내게 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으셔서… 였을까.’

누님은 그 누구보다 상냥하시니, 자신을 원망함과 동시에 가엽게 여기셨을 터.

시간이 지나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고, 초라한 제 모습에 동정을 품으셨을 수 있다.

‘그냥 조용히 자리나 지키다가 돌아갈 것을.’

괜한 질문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그립지 않으냐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누님이 예상 밖의 질문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립지.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몬.”

리엘리는 세리나 로베르의 무덤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세리나가 아닌 제 엄마를 생각하며 뱉어낸 진심이었으니까.

그녀는 아몬의 양손을 제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마주했기에, 아몬은 그녀의 얼굴을 세세히 살필 수 있었다.

설핏 비쳤던 그리움은 금세 신기루처럼 자취를 감추고 어딘가 결연하기까지 한 표정의 리엘리가 아몬을 직시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 수는 없어. 오직 현재에 주어진 것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리움에 사무쳐 말라 죽어갈 뿐이다.

리엘리가 아닌 지서안이던 어린 시절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움은 그저 그리움으로 남겨둔 채, 가끔 그때를 추억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엄마 보고 싶다.’

리엘리는 지서안이던 시절의 제 엄마를 떠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나러 가고 싶다.

하지만 방법 따위는 없다.

그러니 좌절하고 절망하는 대신 다른 소중한 이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제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몬.”

리엘리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아몬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아몬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불의의 사고였을 뿐이지. 그러니까, 너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

아몬이 세리나의 죽음을 오롯이 자신의 탓이라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슬쩍 언급된 적이 있기도 했고, 아이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해도 쉽게 도출할 수 있는 답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너를 피했던 건… 순전히 내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지, 너를 원망하거나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야.”

이건 본래의 리엘리가 제 동생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단 한 순간도 아몬을 원망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몬이 태어났을 당시 그녀는 많이 어렸고, 달리 기댈 곳이 없었다.

하지만 리엘리는 아무 잘못도 없는 동생을 마냥 미워할 수 있을 만큼 뻔뻔스럽고 나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니 꾹꾹 눌러 참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겠지.’

과거, 세리나의 무덤을 찾은 리엘리의 고해성사를 보면 그랬다.

“…….”

아몬은 그녀의 고백에 잠시 얼어붙은 듯했으나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장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치 않은 낯의 아몬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지만… 제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누님은 지금 보다 더, 행복하셨을 거예요.”

아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자 리엘리는 아이를 잡을 손을 놓고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녀의 손 역시 차가웠지만, 아몬의 얼굴은 그보다 더욱더 싸늘했다.

“그럴 리가. 난 다른 누구보다 네가 내 옆에 있어 줘서 행복한걸. 네가 없는 이 세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리엘리는 만약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아몬이 존재하지 않던 과거로 빙의한들, 그녀가 아몬을 낳는 선택을 막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이기적이지만, 나한테는 그 무엇보다 네가 중요한걸.’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만약이란 존재치 않는다.

“아몬-,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널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마음 아프니까.”

아몬은 서글픈 미소를 머금은 리엘리의 목소리에 다소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놨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되뇌었다.

“절, 사랑하신다고요.”

그녀가 자신에게 보이는 애정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공작과 어머니를 향한 마음과는 결이 다르다 여겼다.

그랬기에 아몬은 일순 뇌가 정지해 버릴 만큼 당황했다.

“그럼. 누구보다 사랑하지.”

꿈인가.

아몬은 그리 생각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또다시 멍청한 착각에 빠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몬은 크게 떴던 눈을 깜빡였다.

솔직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기쁨에 가슴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여태 살아오면서 가장 바라마지 않던 말이 누님의 입을 통해 제게 전해졌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현실이라는 게 기뻤다.

*

나는 아몬이 눈을 깜빡이자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을 급히 훔쳐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하지만 아몬은 제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저도 그 무엇보다 가장, 누나를 사랑해요.”

작지만 또렷하게 파고드는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던 나 역시 웃으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마 내 표정 역시 아몬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한 번 안아주고 여느 때처럼 놓아주려는데, 아몬이 내 목에 팔을 둘러 나를 놓지 않겠다는 듯이 매달려서, 조금 당황하는 한편 기분이 좋아졌다.

‘오길 잘한 것 같아.’

나중을 기약했다면 그 언제가 될지 모를 기간 동안 아몬은 내심 나에게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앗아갔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있었을 테니까.

“누나.”

“응.”

“계속, 사랑해주세요.”

마치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도 속삭이는 것처럼 귓속말을 전한 아몬은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 한마디가 어찌나 애달프게 다가오던지….

아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하게 확신을 줘야겠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누나는 언제까지나 우리 아몬을 사랑할 거야. 나중에, 네가 다 커 어른이 된다 해도 넌 항상 내 동생이니까.”

항상 예뻐해 주고, 아껴주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네가 될 수 있게 노력하고, 사랑할게.

“…저도요.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제게는 누나뿐이에요. 누나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고, 또…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그만, 그만. 혼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날은 없어. 절대로. 단언할게.”

나는 품에 안긴 아몬을 살짝 떼어내 눈을 맞추며 단호하게 아이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아몬의 둥글게 뜬 눈매가 휘어지며 예쁜 미소가 그려졌다.

태양 빛을 머금어 빛나는 아몬의 눈동자는 호수의 수면보다도 영롱히 반짝였다.

그 눈동자에 잠시 홀려있던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아몬의 눈가를 뒤늦게 눈치챘다.

‘울었나.’

하지만 눈물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벅차오른 심정 탓에 눈가에 열이 몰린 듯했다.

나는 다시 팔에 힘을 줘 가여운 내 동생을 안아주었다.

몇 번을 포옹해도 늘 수줍은 기색이 역력했던 아이가 이 순간만큼은 필사적으로 나를 마주 안아왔다.

그런 아몬의 행동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사랑해, 내 동생.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해.”

입 밖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처음 입을 열었을 때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몇 번 말하다 보니 또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이왕이면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줘야지. 그래야 우리 동생님이 이상한 생각을 안 할 테니까.’

어른스럽고 똑똑한 만큼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지레짐작하고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항시 내가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걸 일깨워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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