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의문은 아니었다.
나는 아몬을 힐끗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 에바를 불렀다.
“에바, 꽃다발은 네가 대신 챙겨줄래?”
“네, 아가씨.”
일단 가지고 가되, 마차에 올라 아몬과 둘만 남게 되면 그때 물어보자.
어머니의 무덤에 들르고 싶은지를.
무턱대고 아이를 끌고 세리나의 묘를 방문했다간 그게 오히려 아몬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버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 꺼낼만한 주제는 아니니까.’
나는 에바에게 꽃다발을 챙기라 명하며 그제야 안도한 시녀장을 스치듯 지나쳤다.
무의식중에 아몬의 손을 맞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이윽고 마차에 오르고, 서서히 출발하는 와중에도 아몬은 조용했다.
시녀장과 나 사이의 대화가 궁금할 법도 한데 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창밖을 내다보지도 않았고, 그저 고요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을 뿐.
그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투영되던 기쁨도 설렘도, 무엇 하나 비치지 않았다.
나는 창밖으로 에바가 하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다른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모처럼 놀러 가는 만큼 아몬과 둘만 탈 수 있게 그들을 위한 마차를 따로 준비시키길 잘한 것 같다.
쌍둥이가 타고 있었다면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을 테니.
“아몬.”
여전히 미동 없이 앉아있던 아이가 내 부름에 시선을 들었다.
언젠가는 세리나의 묘에 함께 방문해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가 리엘리의 기억을 모두 알게 된 이후에 찬찬히 설명해 주며 같이 가보려고 했었는데….’
아몬이 그녀에 대해 질문을 하더라도 내가 거리낌 없이 대답해 줄 수 있을 때.
그러나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으니, 지금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그….”
“누나, 바깥 공기는 차가웠는데 하늘을 보면 구름 한 점 없이 참 파래요.”
구름 한 점 없이, 그 말이 잘 어울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몬은 아무렇지 않은 양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잠시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분명 의도해서 내 말을 잘랐다.
‘…엄마 얘기, 별로 듣고 싶지 않나.’
공작부인, 세리나는 아몬이 태어남과 동시에 사망했다 보니 아몬은 그녀를 마주한 적조차 없을 터였다.
애초에 애착이 형성될 기회조차 없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가벼이 여기고 넘기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그냥 웃으며 아몬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게. 외출하는 날이 맑아서 다행이야.”
“누나랑 둘이 놀러 가는 건 처음이라 많이 기대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 뒤로 아몬은 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도착하면 주변을 둘러보며 걷자거나, 호수가 얼어붙더라도 은보라 빛으로 빛이 날지 궁금하다는 둥,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잡담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니 더더욱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몬이 공작부인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걸 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몬에게 맞장구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슬금슬금 피어나는 씁쓸한 심정을 감추고자 노력했다.
조막만 한 어린아이가 제 마음속 응어리조차 털어놓지 못하고 애써 저리 숨기려 드는 모습은… 지켜보는 입장에선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몬이 무엇 때문에 세리나의 이야기를 피하려고 하는지 짐작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아몬의 불행은 사실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지….’
그러니 지금의 아몬이 그녀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더라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작의 아몬은 나름 제 어머니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듯했었지만….
‘원작이 아무래도 아몬의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그마저도 확신은 할 수 없지.’
만약 맞다고 한들 그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아몬에게까지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다시금 세리나에 대한 얘기를 꺼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몬이 이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를 굳이 들먹여 기분을 망쳐놓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좋은 날인데 아무렴.
‘더구나 다른 아이도 아니고 아몬인걸.’
섬세하고 어른스럽기에 그만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아이였다.
내게 말하고 싶어지면 먼저 입을 열어오겠지.
우리의 관계는 그만큼 발전했고, 내가 아몬에게 의지하는 만큼 아몬 역시 내게 의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겠지.’
나는 오늘 세리나 로베르의 묘에 방문하는 것은 깔끔하게 접기로 했다.
애초에 갈 생각 자체가 없었는데 얼결에 꽃다발을 보고 충동적으로 들릴까 생각했던 거니까.
우리는 마차가 멈출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딱히 대단치 않은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호숫가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려서자 지근지처에 위치한 호수의 은보랏빛 수면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빛을 발했다.
“이게, 칼리온 호수….”
보랏빛 수채화 물감을 잔뜩 풀어놓은 물가에 수천 톤이 넘는 은가루를 들이부어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좀처럼 자연에서 발생한 호수라고 믿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윽… 눈 아파.’
애석하게도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래도 정말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운 호수였다.
반사광 탓에 눈을 뜨기 힘들어 슬쩍 걸음을 옮기는데, 아몬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엄청 마음에 든 모양이네.’
나는 수면에서 반사된 햇빛이 내게 향하지 않는 양지에 자리를 잡고 엉덩이를 붙였다.
에바가 눈치 빠르게 내가 자리 잡은 곳에 돗자리와 두툼한 담요를 여러 겹 깔아주었지만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추위에 몸을 웅크린 나는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뺨을 기댔다.
자세는 좀 불편했지만 몸을 둥글게 말고 로브 위에 망토를 하나 더 걸치니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햇볕은 진짜 따사롭다.’
아몬이 호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나는 광합성을 하며 앉아있었다.
“예쁘긴 하네.”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풍경은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감상을 끌어올렸다.
가만히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엔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아몬이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턱을 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자세를 따라 한 모양이다.
여전히 호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가 귀여워 미소 짓다가 나 또한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을 텅 비워줄 만큼 몽환적인 호수였다.
사유지가 아니었다만 사시사철 관광객이 넘쳐날 만큼의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었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하며 찌뿌둥한 팔다리를 쭉 펴서 기지개를 켰다.
“우윽!”
추운 날씨에 몸을 말고 있었더니 상당히 뻐근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나를 바라보는 아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근처를 돌아볼 생각인데, 같이 갈까?”
“좋아요.”
벙어리장갑에 감싸진 손을 잡고 천천히 호숫가를 걸었다.
간단히 먹을 만한 음식을 챙겨왔지만 예상보다 추운 날씨 탓에 밖에서 음식을 먹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새어 나가자 곧바로 하얀 입김으로 변해버린다. 사람이 얼어붙기에도 딱 좋은 날씨였다.
일찍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래도 추억거리 하나 정도는 필요하지 않나 하는 마음에 눈을 돌렸다.
‘배라도 띄워볼까.’
우려했던 대로 호수가 얼어붙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하릴없이 왔다 갔다만 반복하다 돌아가야 했겠지.
생각난 김에 바로 작은 나룻배를 두 개 띄웠다.
하나는 아몬과 내가 탈것이었고, 또 하나는 에바와 세바니를 위한 것이었다.
이왕 따라왔으니 같이 즐겨야지.
처음 내가 직접 노를 젓는 작은 나룻배를 타겠다는 말에 사색이 되어 만류하던 쌍둥이 아가씨들은 막상 배를 띄우니 나보다 신이 난 듯 번갈아 가며 노를 젓고 있었다.
그래, 이런 거 처음 해보면 신나지.
하물며 이렇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신비한 호수를 유영하고 있는데.
특히나 나룻배가 아주 마음에 든 듯한 에바가 세바니에게 무어라 말을 걸며 힘차게 노를 저어 저 멀리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아련히 지켜봤다.
이 호수, 생각보다 커서 저렇게 멀리 나갔다간 돌아올 때 고생할 텐데….
하지만 이미 내 목소리가 닿지 않을 곳까지 멀어진 두 사람의 모습에 작게 고개만 내젓고 말았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내 옆에 붙어서 일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심심했을까.
이럴 때라도 마음대로 놀게 내버려 둬야지.
그리 생각하며 다시 노를 저으려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응?’
황급히 주변을 살피니 내가 젓던 노를 가져간 아몬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제가 노를 저을 생각인지 배 위에 일어나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아몬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다 가까스로 멈췄다.
작은 나룻배였기 때문에 내가 저쪽으로 옮겨갔다간 전복될 위험이 있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몬, 위험하니까 일단 앉아볼래?”
“괜찮아요, 호수라 흔들림이 없어서 이 정도 균형은 잡을 수 있어요.”
“아니, 그래도 만에 하나 빠지기라도 하면 단순 감기로는 안 끝날 거야. 빨리 앉아.”
이게 바로 물가에 애를 내놓은 기분이군.
항상 의젓하게 행동하기에 딱히 손이 가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아직 애는 애였다.
내가 짐짓 엄하게 말하자 아몬은 약간 시무룩한 낯으로 노를 꼭 쥔 채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저도 할 수 있는걸요. 누나만 힘든 일을 하시게 둘 수 없어요.”
그 한 마디에 뭉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굳어졌던 표정을 풀며 부드러운 어조로 살살 아몬을 설득했다.
“누나 하나도 안 힘들어. 그러니까 둘이 나오자고 했지.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돌려줄래?”
나를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으로 가져간 건 알겠다만, 아직은 짧은 아몬의 팔로는 노를 젓는 게 거의 온몸 운동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 둘째치고 너무 위험했다. 호숫물이 워낙 불투명해 바닥이 보이지는 않지만. 수심이 깊다고 미리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네, 죄송해요….”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는 아몬을 마주하는 건 심장 쓰린 일이었다.
그렇게 노를 돌려받은 나는 그대로 배를 돌려 부두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아몬의 따가운 시선은 내 팔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호수를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배를 타면 더 기뻐할 줄 알고 탔던 건데, 다른 곳에 더 신경을 써서야….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우리가 땅을 밟았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쌍둥이를 뒤로한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부를 채우는 공기가 시리다.
쌍둥이들도 정신없이 뱃놀이에 빠져있고, 더 있다가는 정말 아몬이 감기라도 걸릴 것 같다.
“춥다. 우리 이만 돌아갈까?”
내가 방긋 웃으며 묻자 아몬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뗐다.
하지만 이내 아무 말도 뱉어내지 않고 도로 꾹 닫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