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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00화 (100/153)

100화

사실 이제 리셀이고 뭐고 내가 들여다보고 있던 타임라인을 벗어난 기억을 우선 찾아보고 싶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머리 좀 아프고, 혼란스러운 정도일 것이라 여겼는데… 너무 안일했다.

이 짓을 다시 하느니 차라리 리셀을 당장 돌려보내 버리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으니.

‘방금 내가 본 기억이 평범한 것이었다면 그랬겠지.’

이제는 리셀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억 속 3년 전의 리엘리가 보인 행동이 너무 심상치 않아서, 도저히 이 앞의 기억을 알지 않고는 넘길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보고 온 기억 속의 그녀는 무려 석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경기를 일으키며 깨어나는 그녀의 꿈은 언제나 동일했다.

과거의 리엘리는 제 꿈속에서 그녀의 어머니, 세리나 로베르가 누워있는 관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얼마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세리나가 눈을 뜬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만큼 생기있어 보이는 세리나의 모습은 일순간 반전된다.

죽은 지 며칠은 지난 것처럼 혼탁한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지만 정확하게 리엘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체의 입술이 달싹였다.

“편해지고 싶어…. 리리, 도와줘.”

언뜻 특별한 것 없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 한마디에 리엘리는 매번 사시나무 떨듯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이때부터 리엘리는 수면제를 찾았다.

약을 먹고 잠이 들면 일어났을 때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았기에.

‘분명 뭔가 일이 있었어.’

리엘리 로베르가 본격적으로 무너져내렸을 만큼의 충격적인 사건이.

그리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건은 세리나 로베르와 어떤 연관이 있는 듯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그녀가 왜 갑자기 리엘리를 괴롭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작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강해졌지.’

하지만 리엘리가 의식적으로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무언가 희미한 잔상이 스치려 들면 곧장 제 뺨을 후려쳐서라도 생각을 멈추려 들었기에 당장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두 번은 사양하고 싶은 경험이지만… 이런 중대한 단서를 발견했는데 확인하지 않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물론 빠른 속도로 기억을 습득하고 있기에 가만히 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겠지만….

‘불안해. 저 기억을 당장 알아야만 할 것 같아.’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리기에는 내 불길한 예감이 제법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통탄하게도….

내가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자 어느새 내 어깨에 올라 그걸 지켜보던 율렌이 제 꼬리로 내 손등을 냅다 후려쳤다.

찰싹-

“아!”

아프지는 않았지만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어디서 엄살이냐는 듯이 눈을 세모꼴로 뜬 율렌이 나를 쳐다봤고, 좀 찔린 나는 괜히 눈길을 피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리셀에 대한 기억, 더 찾아볼 거야?”

“그래야지. 좀 걸리는 일이 있어.”

“그럼 내일 아침도 고생하겠네.”

“아…. 말하지 마.”

아까의 고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다시 두통이 유발되는 것 같다.

나는 율렌을 침대에 던져두고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겨울에 접어든 것 치고는 포근해 보였다.

하늘만 놓고 보면 구름 한 점 없는 것이 가을 같기도 하고.

햇빛도 따사로워 보이는 게, 오늘 나들이를 가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해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오늘 같은 날에 가만히 앉아 그림 모델이 되었다면 생각에 묻혀 힘들기만 했겠지.’

내가 고민해서 결론 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끙끙거리기보다는 잠시 잊고 있는 편이 낫다.

그마저도 오늘 밤이면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을 테니, 하루만 정신없이 넘기면 될 일이었다.

*

아몬과 나는 호수로 향하기 위해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했다.

아몬에게는 특별히 귀를 폭 감싸는 귀마개까지 씌워주었다.

그 덕에 얼굴 빼고는 밖으로 내비쳐진 살갗이 없어 아주 흡족했다.

좋아, 감기 걸릴 걱정은 없겠군.

‘역시 저 귀마개랑 벙어리장갑을 샀던 건 신의 한 수였어.’

귀족들은 어린아이라 해도 품위를 우선시했기에 잘 착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있으면 언젠가는 쓰겠지, 싶어 몇 개 사두었던 물건이다.

지금 이 순간 그때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었다.

실내이니만큼 꽁꽁 싸매서 더운 건지, 아니면 부끄러움 탓인지 볼이 발갛게 상기된 아몬이 하얀 털목도리에 폭 파묻혀 고개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아주, 깨물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하, 누구 동생이 이렇게 귀엽지.’

당장에 번화가로 뛰어나가 이 애가 내 동생이다 소리치며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내 흡족함이 아몬에게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누나, 움직이기 불편해요….”

어지간하면 불평하지 않는 아몬이 손을 모두 감싸는 두꺼운 벙어리장갑을 몇 번 꼼질 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확실히 여태 입고 다니던 옷에 비하면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런 옷을 입어본 적 없을 아몬이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입어야 해. 호수 근처는 죄다 숲이랑 산이라 얼마나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야.”

전에 외출했을 때와 달리 이제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

더구나 실내로 들어갈 것도 아니고, 야외에서 활동하려면 이 정도 무장은 해줘야 안심이 된다.

아몬은 어쩐지 조금 억울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렇지만 한 번도 걸려본 적 없는걸요. 그리고 누나도 좀 더 두꺼운 옷을 입으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요.”

“난 괜찮아. 이 옷, 생각보다 두껍거든.”

어차피 나야 감기에 걸려도 율렌이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아몬은 달랐다.

애초에 리엘리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원단도 두껍고 겉에 걸치고 있는 외투 역시 세 겹이나 되었기에 문제없었다.

“그래도, 누나가 아프기라도 하면….”

내가 앓아눕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아몬의 고운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나를 걱정하는 아몬의 모습에 마음이 찡해졌다.

귀여운 것. 역시 나한테는 너뿐이다.

나는 외투가 땅에 끌리지 않게 조심히 쪼그려 앉아 아몬의 볼을 양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아이를 얼렀다.

“아구, 누나 정말 괜찮아요. 엄청 따뜻하게 잘 챙겨입었는걸? 이 로브도 발끝까지 내려오고. 그러니까 누나 걱정은 말고, 슬슬 내려갈까?”

“…네.”

아몬은 그럼에도 내 차림새가 마뜩잖은지 계속 내 옷을 힐긋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더 겹쳐 입으면 팔이 접히지 않을 터였기에 모른 척 웃어 보이며 아몬의 손을 잡았다.

두꺼운 손모아장갑에 감싸진 작은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는 와중, 무심코 아몬을 내려다본 나는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푸… 흠흠.”

종아리를 전부 감싸는 털부츠가 이상한지, 한 발 한 발 내딛는 아몬의 걸음이 유난히 신중했다.

그게 꼭 걸음마 하는 펭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을 참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항상 어른스럽던 아이가 이제야 제 나이대다운 옷을 입고 어색하게 걷는 모습을 보는 건 상당히 유쾌한 일이었다.

“…누나?”

내 헛기침에 아몬이 제 발에 고정된 시선을 떼고 나를 올려다봤다.

“흠, 큼! 아무것도 아냐. 앞을 보고 걸어야지.”

“네.”

표정은 사뭇 진지했지만 입은 옷이 너무 깜찍했다.

벌써부터 즐거워진 나는 아몬의 보폭에 맞춰 느릿하게 걸었다.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인사에 대충 고개를 까딱이고 걸음을 떼려는데, 문득 시녀장의 양손에 들린 하얀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익숙한 꽃다발이지만 지금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저걸 왜 들고 왔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시녀장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 둘이 앞으로 나서며 에바와 세바니에게 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잠시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친 내게 다가온 시녀장이 꽃다발을 건네왔다.

당연히 내가 직접 들고 가리라 여기는 듯한 태도. 나는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이건 왜 준비한 거야? 난 성묘를 하러 가겠다고 말한 기억이 없는데.”

나무랄 생각은 아니었지만 굳어지는 얼굴을 펼 생각도 없었다.

심기 불편한 기색이 묻어나는 내 질문에 시녀장은 조금 당황한 듯, 한 박자 늦게 답해왔다.

“아가씨께서, 칼리온 호수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셨기에… 늘 그랬듯 준비했습니다.”

“…….”

나는 잠시 침묵하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정말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 것처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리엘리 로베르는 성묘를 하러 간다는 말을 돌려서 했던 모양이다.

‘칼리온 호수에 다녀오겠노라.’고.

다른 의미로 조금 곤란해졌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생각하는 동안 초조한 낯이 된 시녀장이 뜻밖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몇 년 만에 칼리온 호수에 다녀오시겠다 말씀하셔서, 저는 당연히 마님을 뵈러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의문에 빠져들었다.

‘성묘를 가지 않았다고?’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눈살을 찌푸린 나는 곧장 시녀장에게 물었다.

“정확히 몇 년 전부터였지? 내가 호수에 방문하지 않았던 게.”

이상한 질문이란 걸 알았지만 물어보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던 시녀장은 다행히 내 질문에 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황급히 답했다.

“그러니까… 대략 3년 정도 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3년, 또 3년 전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리엘리의 악몽에 죽은 세리나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또 그녀의 무덤에도 방문하지 않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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