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저런 말을 함부로 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라면 생긴 것과 달리 무던하고 상냥한 사람인 걸까.
내가 잠시 리셀을 관찰하는 사이, 그는 챙겨온 가방을 뒤적이며 물었다.
“저는 아무 때나 시작해도 좋습니다. 이곳에서 그려드리면 되겠습니까?”
“…하루 이틀 걸리는 일이 아닌데,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작업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잘은 몰라도 그가 머무는 곳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꽤 되었을 터였다.
또한 초상화를 그린다는 게 불과 몇 시간이면 끝나는 작업도 아니고. 최소 며칠을 잡아먹을 일이었기에 이리 다급하게 진행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내 권유에 부지런히 가방을 뒤적이던 남자의 손이 손놀림이 멎었다.
“한동안 이곳에 머무는 편이 나을 듯하니, 일단 방을 안내해 달라고 할게요. 필요한 물건 있으면 모두 요청하시고요.”
나는 그와의 대화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도록 빠르게 말을 이었다.
“참. 내일은 아몬과 제가 저택을 비울 예정이라, 괜찮다면 모레부터 작업을 시작했으면 해요.”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공녀님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죠.”
“그럼 모레 보도록 해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가 내게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응접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복도를 거닐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셀리안과 리셀은 동일 인물이 맞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에 대한 기억을 확인하는 게 좋겠지.
지금 마주한 리셀은 내게 무언가를 캐묻거나 나를 곤란하게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을 섞다 보면 이상함을 느끼는 건 순식간일 터.
‘역시 좀 힘들더라도 그 당시의 기억을 우선 살펴보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서랍을 뒤적여 리셀이 맨 처음 보내왔던 편지를 재차 확인했다.
“편지는 또 왜?”
갑작스레 편지를 찾아보는 내 행동이 이상했는지 율렌이 발치에서 기웃거렸다.
“아무래도 이때의 기억을 먼저 찾아봐야겠어서… 날짜를 확인하려고.”
“뭐? 이 당시 기억을 먼저 들여다보겠다고?”
왜 그러냐 묻기에 대답했을 뿐인데, 녀석이 눈을 홉뜨며 반문했다.
그에 살짝 고개만 끄덕이며 편지를 살피고만 있자 율렌은 폴짝 날아올라 책상에 안착하며 내 시선을 끌었다.
“내가 전에 했던 충고 기억 안 나?”
“기억나. 혼란스러울 거라며.”
“단지 ‘혼란스럽다’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했었잖아.”
나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율렌의 목소리에 편지를 내려놓고 녀석을 내려다봤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목을 죽 편 율렌은 책상 위에 앉아 있음에도 나보다 한참이나 작았다.
나는 녀석과 시선을 맞추고자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너, 지금 리엘리 로베르의 예전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하고 있지.”
“…….”
그렇긴 했다.
나는 심드렁히 생각하며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고, 녀석 역시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으니까.
처음 율렌의 도움을 받아 몇 주간의 기억을 받아들였던 날 아침.
그 깨질 듯한 두통과 어지럼증은 수면제로 인한 부작용이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기억을 습득한 후유증과 비슷한 것이었달까.
그 탓에 며칠간은 율렌의 신성력에 의존해 아침을 시작하곤 했다.
‘그래도 또 익숙해지고 나서는 나름 괜찮았는데.’
“근데 갑자기 이자에 대한 기억은 왜? 만나기라도 했어?”
율렌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내게 질문해왔다.
“응. 이번에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한 화가가 리셀이었어.”
나는 간략하게 조금 전 그와 마주했던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흐음….”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율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약한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 편지를 꼬리로 쓱 끌고 와 날짜가 적힌 봉투 끝자락을 가리켰다.
“이거, 맨 처음 왔던 편지를 기준으로 몇 달간의 기억을 들여다봐야 할 텐데.”
“그래야겠지.”
그와 리엘리가 마주한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그렇게 해야 했다.
나는 녀석의 꼬리를 살짝 치우며 리셀의 편지를 내 쪽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편지 봉투 끝자락에 적혀있는 날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통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낼 때 날짜를 적어서 붙이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이렇게 편지 봉투 겉면에 적어서 보내는 경우는 아마 거의 없겠지.
정황상 이건 리엘리 로베르가 적어둔 것일 터였다.
‘무엇보다 날짜를 적은 필체만 다르기도 하고.’
그리고 단순히 주소만을 적어 보낸 편지들을 폐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 또한, 의아한 부분이 있다.
아마 리엘리가 리셀을 어떤 면으로든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을까.
‘리셀, 그 남자도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지.’
어영부영 초상화만 그리고 떠나보내기에는, 너무도 찝찝한 구석이 많았다.
“에휴….”
율렌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얼굴 보니까 내가 말려도 소용없겠네.”
나는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였다.
다 알면서 한숨은.
“말했다시피 나도 너 같은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어. 이전에 네가 리엘리 로베르의 기억을 볼 때 무리가 없었던 건 영혼이 육체와 동화되며 자연적으로 기억을 찾는 현상이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율렌의 설명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이전에 나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무엇 하나 확신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때는 지금처럼 몇 주, 혹은 몇 달 분의 기억을 하룻밤 안에 들여다본 게 아니었지.”
나는 처음으로 율렌의 도움을 받았던 날, 리엘리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탄생 당시부터 2주간의 기억을 들여다봤다.
그 뒤로는 속독을 하다 보면 점점 가속도가 붙듯, 하루가 다르게 보는 양이 늘기 시작했다.
많이 익숙해진 현재에 이르러서는 대략 3달 정도의 기억을 단번에 들여다보는 게 가능해졌다.
실상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모든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도 머지않았다.
이리 빠르게 기억을 습득함에 따른 부작용은 아침에 찾아오는 통증과 혼란 외에도 한가지가 더 있었다.
‘너무 빠르게 넘겨보기 때문인지 상세하게 기억할 수가 없어.’
그래도 어지간히 중요한 기억은 파악할 수 있으니, 그게 어딘가 싶었다.
한 번 습득한 기억은 일단 머릿속에 남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억을 더듬어 살필 수도 있고.
“지금은 내가 도움을 줘서 자연히 알게 될 기억을 인위적으로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한 거야.”
“알고 있어.”
율렌이 없었다면 리엘리 로베르의 기억을 모두 알게 되는 건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되지 않았을까.
‘20년을 살아왔으니 대충 20년 넘게 들여다봐야 했겠지.’
상상만으로도 진력이 났다.
“나한테는 고작 20여 년의 세월 따위 아무런 타격도 없지만, 그 비슷한 세월을 살아온 너는 달라.”
20년보다는 한참을 더 살아왔다만….
하지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니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율렌이 살아온 세월의 앞에서는 도긴개긴일 테니까.
“시간순으로 살펴보는 와중에도 힘들어했는데, 그 순서를 거스르고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는 전혀 모르는 거라고.”
“설마 죽기야 하겠어? 머리 좀 아프고 말겠지.”
어차피 결정 내린 사항이니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곁에 율렌이 있으니, 크게 걱정이 되지도 않고.
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율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 뭐, 좋아. 그렇게 원한다는 데 못 해줄 것도 없지.”
조금 전 진지하게 충고하고 설명하던 것에 반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뜨려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황당해졌다.
하여튼, 율렌 저 녀석도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그 뒤로 잠이 들 때까지는 여느 때와 같았다.
비록 아침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식은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난 나는 침대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지만 이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다시 엎어져 버렸다.
“미친… 우욱…!”
욕설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원심분리기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방 전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한다.
아니, 내가 돌고 있는 걸까.
너무 어지러워 그조차 판단이 어려웠다.
그 와중에 누군가 내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한 통증이 지속됐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축축이 적셨지만 미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어마어마한 통증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막상 잇새로 나가는 소리는 옅은 신음이 전부였다.
상상 이상의 격통은 비명마저 삼켜버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가만히 엎어져 있는 내 귓가에서 율렌이 무어라 속닥거리며 머리를 토닥여왔다.
하지만 정신이 없던 나는 녀석이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계속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데 율렌이 신성력을 사용했는지, 순식간에 고통이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왔다.
“허억…!”
나는 익사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건져진 사람처럼 급히 숨을 들이켰다.
일순간에 내가 겪었던 모든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자 싸늘히 식어가던 몸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된 나는 뒤늦게 조금 전 겪은 끔찍한 감각에 몸서리치며 이를 갈았다.
통증이 가신 와중에도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아직도 조금 어지러운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몸은 멀쩡해졌지만 순식간에 진이 빠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에 율렌 역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복잡했던 머릿속이 대강이나마 정리가 되었을 때, 나는 손을 내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편지가 도착했을 때로부터 3개월간의 기억 속에, 리셀과의 만남은 존재치 않았다.
“…이 짓을 또 해야 한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중얼거리자 옆에서 기웃거리던 율렌이 물었다.
“왜, 기억 속에 없어?”
“…없었어,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생각에 잠겨 잠시 율렌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도움으로 고통에서 벗어남을 뒤늦게 상기해내고 감사를 표했다.
평소에도 신성력을 사용해 주는 건 항상 고마웠지만, 오늘만큼 감사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신성력에 너무 의지하지 말자 다짐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약간의 자조가 스며든 웃음이었다.
“너 아니었으면 진짜 머리를 깨버리고 싶었을 거야.”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다른 생각이 파고들 틈 따위가 존재치 않을 정도로.
오로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해서, 그대로 조금만 더 방치됐다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아찔하네.’
더 아찔한 건 이 짓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