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하지만 그대로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 이 세계에서도 암녹색 머리칼에 샛노란 눈동자는 따로 떼어놓고 봐도 찾기 힘든 색이었다.
더구나 두 색을 전부 지닌 남자라면 분명 기억에 남을 법도 했다.
‘…혹시, 진짜 셀리안이 리셀인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셀리안이나 리셀이나,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으니까.
결국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아는 척을 했다가 오히려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아뇨.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셀리안을 모른다 답하자 아르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그림 두어 장을 꺼내 내게 내밀어왔다.
“그러시다면 이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심은 어떠십니까. 셀리안이란 자는 수상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누군지 모를 귀족의 초상화 몇 점이었다.
아르반의 얘기처럼 정말 내가 셀리안을 처음 보는 게 맞는다면 어딘가 수상하다 여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와 리엘리가 정말 초면인지 아닌지는 만나봐야 알 수 있으니….’
그가 리셀이 아니라 하더라도 만에 하나 그냥 옛날에 리엘리의 초상화를 그려준 인연이 있다거나, 뭐 어떻게든 정말 알고 지낸 사이일 수도 있다.
나는 그를 피하기보다 일단 한번 만나는 봐야겠다 생각했다.
정 불편하면 나중에 핑계를 대고 내보내도 그만이니까.
“아뇨. 그래도 셀리안에게 의뢰하고 싶어요. 어쩌면 어디선가 봤는데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여긴 로베르 공작가인 걸요.”
그래. 나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여차하면 호위를 대동하고 만나면 된다.
아르반이나 세이린 정도의 무력을 지닌 자가 아닌 이상에야, 두려울 건 없었다.
내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자 아르반은 실낱같은 숨을 뱉어냈다.
그에 본능적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른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단념의 의미였던 모양이다.
“…당신 뜻이 그러시다면.”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그리고 셀리안에게 연락해준 것도요.”
나는 아르반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그자에게는 언제까지 방문하라 이르면 되겠습니까.”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최대한 빠를수록 좋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르반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마디를 채 나누지 못했는데 용건만 전달한 채 자리를 뜨려는 그의 모습에 나 또한 아르반을 따라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요?”
내가 많이 아쉬운 낯을 하고 있는지 아르반은 난감한 기색을 표출해 왔다.
그래 봐야 남들 눈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겠지만.
“저도 당신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공자가 기다릴 겁니다.”
아, 맞다.
이 사람 원래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아몬의 수업을 하러 온 거였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더불어 그에 대한 어색했던 감정 역시도.
정말이지, 나 자신의 단순함에 감탄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주변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도 이쯤 되면 병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불현듯, 여태 잊고 있던 또 다른 존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애고, 삐졌나.’
녀석이 사람이었다면 아마 볼이 터질 듯이 빵빵하지 않을까.
잔뜩 골이 난 듯한 율렌을 보고 있자니 삐진 녀석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난감해졌다.
내 눈길이 율렌을 향하니 아르반이 자연스레 제 어깨에 있던 녀석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녀석을 넘겨받았다.
의외로 순순히 내게 건너온 율렌이 긴 목을 세워 아르반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리 매정하게 대하는 주인이라도 헤어지려니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르반은 아니었고, 그는 녀석을 한번 바라보고는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럼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어느새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흠칫 몸을 굳혔다.
아르반이, 웃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가 아닌, 분명한 눈웃음.
시원하고 날카롭게 올라간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광경을 정면에서 보고 있노라니, 일순 사고가 정지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따로 시간을 내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그가 정말 마지막 인사를 던지고 사라지는 와중에도, 나는 그의 너른 등만을 멀거니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진짜로 아르반이 나한테 웃어준 거… 맞지?’
전에도 좀 이상하다 싶더니, 오늘 아르반은 그의 저택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이상했다.
정말 뭘 잘못 먹은 건 아닐까?
물론 그가 웃어준다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당황스러운 건 별개의 문제였다.
너무 뜬금없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마주하게 된 그의 미소는 파급력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어디 아르반 카넬로웰이 함부로 웃음을 흘리는 남자던가?
절대 아니었다.
나는 아르반이 방을 나서고도 한참을 못 박힌 듯 서서 자리를 지켰다.
“엘리.”
“흡!”
그러다 율렌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 이번에도 잘 생겨서야?”
“뭐?”